2019 아트바젤 홍콩, 한국미술 통째로 빨아들였지만…
36개 나라 232개 화랑 작품 부스 국내외 미술인·컬렉터들 모여 7회째지만 세계적 규모로 성장
힌덴부르크호 추락 소재로 삼은 이불 작가 설치작품 집중 소개 등 곳곳서 주목받는 작가 알리기
재조명 작가군·트렌드 제시 없이 메이저 화랑, 대가 작품 판매 골몰. 국내 화랑도 실적 쌓기에 급급
5억 넘는 부스 출품비용 등 부담 탓 신선감 잃고 활력 없는 구성 그쳐. 경직된 전략 혁신할 ‘전환기’ 지적
이불 작가가 인카운터 섹션에 선보인 대형 설치작품. 1937년 폭발한 비행선 힌덴부르크가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실패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시도하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비행선 모양의 은빛 기구와 바닥에 깔린 금속제 거울판을 통해 암시한다. |
파티는 밤 10시부터 시작됐다. 장소는 옛 홍콩 누아르 영화의 무대와 비슷한 곳이었다. 트인 테라스와 기둥들, 구석진 실내 공간들이 포개져 음울하면서도 내밀한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수십년 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의 중앙경찰서, 감옥으로 썼던 건물이라고 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미술인과 기획자, 컬렉터들이 여기에 모여서 한 작가의 이름을 연호하며 축하인사를 건네고 눈도장을 찍었다. 주인공은 이불(56). 지난 20여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간판으로 꼽혔던 스타 작가다.
지난 27일 홍콩에서는 이불 작가를 위한 축하파티가 열렸다. 27~31일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미술품 장터인 아트바젤 홍콩의 전시장에 그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내외 전속화랑 3곳에서 함께 마련한 자리다. 홍콩섬 센트럴지구의 옛 경찰서이자 근대문화유산인 ‘타이쿤’이 파티 장소라는 점도 많은 미술인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자정 넘어서까지 진행된 파티에서 이 작가는 은빛이 번쩍거리는 재킷 차림으로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고풍스러운 기둥들이 들어선 파티장 홀을 여기저기 누비며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느라 바빴다. 유럽과 미국, 아시아, 고국에서 온 수많은 남녀 미술인, 기획자, 컬렉터들이 작가와 눈길을 맞추려고 다가왔다. 포옹하고 악수하고 덕담을 나눴다. 국내외 미술인들뿐 아니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최윤정 파라다이스그룹 이사, 가수 인순이 등 국내 저명 컬렉터들의 모습도 보였다. 자리에 모인 이들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 초소 철거 잔해를 재활용한 출품작들을 비롯해 오는 5월 20년 만에 이불 작가가 출품하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 아트바젤 홍콩의 현황을 놓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 파티는 아트바젤 홍콩 장터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을 알리기 위한 차원에서 종종 열리는 이벤트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홍콩 완차이 지구의 대형 컨벤션센터에 36개 나라의 242개 화랑이 각자 작품 부스를 차렸다. 2013년 장터를 시작했지만, 7회를 맞는 지금은 세계적으로 맞수가 없는 압도적인 권위와 규모를 자랑한다.
10년도 채 안 된 국제 미술품 장터인데도 사실상 한국 미술판의 컬렉터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아트바젤 홍콩은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이다. 브이아이피(VIP) 및 언론 사전공개가 27~28일이고 장터 일반 전시가 29~31일이지만, 이미 지난주부터 장터 주변 일반 화랑들의 전시가 잇따라 막을 올리면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홍콩 아트바젤 1층 전시장 인카운터 영역에 나온 대형 설치작품의 모습. 일본 작가 지하루 시오타가 만든 것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이 붙었다. |
이불 작가 말고도 패션업체 프라다와 일본 거장 구사마 야요이를 후원하는 3개 화랑들의 연합파티도 27일 밤 홍콩섬 센트럴지구에서 잇따라 열렸다. 이처럼 주요 작가들의 전시가 거의 매일같이 열리는 것이 국제 장터의 일상적인 풍속도다. 이불 작가는 1전시장 들머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대형 설치작품을 놓았다. 1937년 비행선 힌덴부르크호의 추락 참사를 소재로 길이 12m의 초대형 은빛 비행선을 띄웠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몇년 전부터 한국 국립현대미술관과 유럽의 여러 전시장에서 선보였던 것으로 애호가들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는 근작이다. 미국의 리먼 머핀, 유럽의 타데우스 로파크, 한국의 피케이엠갤러리 등 유명 화랑 세곳이 이 작가의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그의 대형 설치작품까지 전시하면서 이번 장터에서는 그의 존재감이 한층 돋보였다.
홍콩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 전시에 나온 루이즈 부르주아의 홀로그램 작품. 온통 붉은빛으로 실루엣만 묘사된 남녀의 교합상이 섬뜩하고 강렬한 기운을 던진다. |
그런데 화려하고 풍성한 파티 이벤트와 별개로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요란한 빈 수레’라는 평가가 대세다. 의욕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트렌드나 재조명하려는 작가군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1전시장의 중심을 차지하는 페이스, 가고시언, 리먼 머핀, 하우저 앤 워스 등 미국·유럽 등의 메이저 화랑들은 데이비드 호크니, 윌럼 더 쿠닝(빌럼 더 코닝), 게오르크 바젤리츠 등 익히 검증된 1970~80년대 현대미술 대가들의 작품 판매에 골몰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유럽 쪽 화랑들은 에곤 실레나 피카소, 레제, 키리코 같은 20세기 초 거장들의 작품을 들고 와 관객들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했다.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가 장터와는 별개로 센트럴지구의 에이치퀸스 빌딩의 지점에 마련한 페미니즘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전이 그나마 색다른 홀로그램과 오싹한 붉은빛 드로잉들을 다수 선보여 눈길을 모았다. 경매사 필립스의 독일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특별전도 대가의 신작이란 것 외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영국 화랑이 출품한 백남준의 91년작 <콜럼버스+콜럼버스의 배>. 3전시장 들머리에 놓여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
국제갤러리, 학고재 등 한국 쪽 출품 화랑 10곳의 작품 목록에선 지난해까지 단골 출품 목록이던 단색조 회화가 사실상 꼬리를 감췄다. 화랑들은 제각기 국제시장에서 거래해온 주력 작가군의 백화점식 전시로 매장을 채우며 판매 실적을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산 그림의 대가 유영국 등 일부 근대 작가의 작품을 내걸기도 했지만, 단색조 회화를 이을 만한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얼굴을 발굴하려는 의지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필두로 국제적으로 활약 중인 이불, 서도호, 양혜규 작가의 신작들은 서구 여러 저명 화랑의 매장에서 줄을 이어 볼 수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흐름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장터를 돌아본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아트바젤 홍콩의 전시 전략이 전환기를 맞을 시점에 왔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부스 출품비용이 기본적으로 1억원을 넘기고 운송비, 보험료까지 치면 기본 비용만 5억원을 넘기는 등 너무 고액이어서 출품작도 철저히 팔리는 작품들로 채우는 식의 활력 없는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시가 신선감을 잃고 미술관 취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는 분석이다. 최웅철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21세기 이후 미래 중개 역할을 하는 화랑과 미술품 장터가 고객의 취향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장터 참여비용이나 운영체계 등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트바젤 홍콩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트바젤 쪽은 현재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서울 쪽의 코엑스 등과 접촉하며 장터의 판매 반경을 넓히려는 시도를 계속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홍콩 행사를 계기로 아트바젤 쪽에서 새로운 변신의 모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지도 앞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홍콩/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