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점프는 ‘넘사벽’이지만 ‘피린이’는 짜릿해
피겨 스케이팅 인기
‘빙상의 예술’ 피겨 스케이팅 취미로 배우는 성인들 늘어
김연아 보고 자란 ‘피린이’들 “덕질 끝은 직접 해보는 것”
스핀·점프 등 우아한 기술 하나하나 도장 깨기 하듯 즐겨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을 가르는 모습.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바깥은 춥고, 안도 추웠다. 겨울의 온도를 느끼게 하는 지하 공간. 지난달 21일에 찾은 서울 성동구 용답동의 실내아이스링크. 피겨 스케이팅 성인반 수업이 열리는 날이었다. 검은 레깅스에 하얀 스케이트화를 신은 김수진(25)씨가 링크를 한 바퀴 돌았다. 굳은 몸을 푸는 준비운동이다. 날카로운 스케이트화의 날이 빙판을 가를 때마다 ‘사악사악’ 소리가 났다. 몸을 푼 김씨는 피겨 동작을 연습했다. 앉아서 빙빙 도는 싯 스핀. 돌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김지우 피겨코치가 김씨에게 다가가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김씨가 일어나 싯 스핀을 했다. 지치지 않고 도전은 계속됐다.
김씨처럼 ‘빙상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피겨 스케이팅을 취미로 배우는 성인들이 늘고 있다. 유청소년들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체육에서 전연령대가 즐기는 생활체육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피겨 스케이팅. 유니크한 취미를 찾는 엠제트(MZ)세대 사이에서 특히 인기다.
루미너스 피겨스쿨의 김지우 피겨코치는 “전체 수강생 120명 중에 성인이 90명인데 20대 초중반인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 가장 많다”며 “코로나 이전에는 수강생 대다수가 아이들이었는데 2년 새 성인 수강생이 늘었다”고 말했다. 특히 어릴 때 김연아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성인이 되어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러 오는 경우가 많단다. ‘김연아 키즈’가 ‘성인 피린이(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는 초보자들)’가 된 것이다.
피겨 스케이팅 기술을 연습하는 성인 수강생들.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얼음 위 질주하는 쾌감
대학생 김수진씨는 16살 때 피겨 스케이팅을 처음 해본 뒤 성인이 돼 다시 피겨를 배우고 있다. 빙판에 서면 언제나 작아진다. 몸이 말을 안 듣고 뛸 때마다 넘어지곤 한다. “점프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냥 착지하는 걸 팝(POP) 했다고 해요. 잘되면 클린 했다고. 클린보다 팝 할 때가 많죠.”
그런데도 피겨 스케이팅은 끊을 수 없는 ‘마성의 운동’이다. “복싱, 필라테스, 요가, 유행하는 운동은 거의 다 해봤는데 피겨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새로운 기술에 성공할 때마다 뿌듯해요. 그런 날은 온종일 즐거워요. 얼음 위를 질주하면서 느끼는 쾌감과 시원함도 좋아요.”
피겨를 하면서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3년 전 피겨 스케이팅 승급 시험을 보러 갔을 때를 잊을 수 없다. “피겨 스케이팅 1급을 따러 시험장에 들어서자 심사위원이 ‘○○대학교 김수진’이라고 불렀어요. 호명을 받고 빙판에 혼자 올라섰는데 다들 저만 쳐다보는 거예요. 마치 제가 국제대회에 출전한 피겨 선수가 된 것 같았어요. 감격스러웠어요.”
김씨는 피겨를 평생 취미로 하고 싶다. 피겨를 타는 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꿈의 기술인 악셀 점프를 하고 싶지만 취미로 피겨를 하는 저에겐 ‘넘사벽’이에요. 목표는 더블 점프예요. 그것만 해도 만족해요.”
지난해 2월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는 박예림(21)씨의 피겨 사랑도 뜨겁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온통 피겨다. 피겨를 타는 그의 영상을 보고 ‘김연아다’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피겨를 배운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그가 다시 피겨를 한 것은 도장 깨기를 하듯 다양한 점프 기술을 하나씩 성공하는 기쁨이 커서다. 그러기 위해선 수백번의 연습이 필요하다. “스핀보다 점프에 성공했을 때 쾌감이 커요. 성공한 뒤 착지했을 때 그 짜릿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게 좋아서 넘어져도 계속 시도하나 봐요.” 박씨가 웃으며 말했다.
황준후(26)씨는 김연아 팬심으로 시작해 피겨의 세계에 입문했다. “김연아를 모델로 한 크리스마스실을 사고 굿즈도 모았어요. 아이스쇼에도 갔고요. 덕질을 계속하다가 피겨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덕질의 끝은 직접 해보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피겨 스케이팅 성인반에 남자 수강생이 자신뿐이라 쑥스러웠다. 피겨 스케이팅을 한다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전용 가방이 아닌 일반 백팩에 스케이트화를 담아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피겨는 하면 할수록 점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컸다.
“피겨는 예술과 기술이 합쳐진 멋진 스포츠예요. 지상에서 하는 리듬 체조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달라요. 빙판에서 활주하면서 팔을 벌리고 뒤로 크로스를 하는 자세는 피겨에서만 볼 수 있어요. 특히 얼음 위에서 앞으로 나가는 자세가 매력적이에요.”
한 발 들고 도는 ‘비엘만 스핀’ 동작.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피겨 스케이팅 수강생들의 지상훈련. 루미너스 피겨스쿨 제공 |
연습 과정이 즐거워
직접 찾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실내아이스링크도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려는 이들로 붐볐다. 한쪽엔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같은 ‘피린이’, 다른 한쪽에서는 빙판 위를 우아하게 나는 상급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은빛 무대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이보람 코치는 “피겨 스케이팅 성인 여성반 수강생이 최근 크게 늘었어요. 낮 시간대 강습이 1시간 늘고 오후반이 새롭게 만들어졌어요. 올해만 8개 반이 새로 생겼어요”라고 말했다.
움츠리기 쉬운 겨울에 빙판에서 체력을 기를 수 있는 스포츠라는 점이 인기 요인 중 하나다. “피겨는 전신을 골고루 쓰는 운동이에요. 그러면서 평소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쓰게 돼요. 미끄러운 빙판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니 균형 감각을 길러줘요. 허리를 펴고 하는 동작이 많으니 구부정한 자세를 고칠 수 있어요.” 이 코치가 피겨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지난해 8월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는 김지연(26)씨는 나날이 체력이 좋아지는 걸 느낀다고 했다. “여름에 시원한 스포츠를 하고 싶어 피겨 스케이팅을 택했어요. 어릴 때 영상으로만 보던 피겨를 직접 해보니 힘들기도 하지만 어느새 피겨를 타는 내 다리가 튼튼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평소 피겨를 잘 타기 위해 스쾃이라든지 근력운동도 하거든요.”
휴직 중인 박정민(42)씨에게 피겨는 삶의 활력소다. “요즘 백 크로스를 연습하고 있어요. 잘 안되더라도 그걸 연습하는 과정이 즐거워요. 얼음 위에서 하는 거라 제약도 많고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잦죠. 하지만 기술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느낄 때 즐거워요.”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영상도 찾아본다는 박씨는 “차준환 선수의 영상을 봐요. 잘하는 선수들이 피겨 기술을 하는 걸 보면 대리만족이 되거든요. 영상을 보며 점프를 이렇게 하는구나 배우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스케이트화의 긴 끈을 매는 모습.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스케이트화 피팅의 중요성
피겨 스케이팅이 인기다 보니, 관련 용품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피겨 스케이트용품 전문업체 스포텍의 이창주 대표는 “피겨 스케이트화 판매량이 1~2년 사이에 2~3배 정도 늘었다”며 “주요 고객은 20~30대 여성”이라고 말했다. 피겨 스케이트화는 일반 강습용 20만원대부터 선수용 15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초보자들은 보통 20만원 초반대를 선택한다.
스케이트화를 고를 때 고려할 점은 무엇일까.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인지 아닌지 피팅을 해보는 게 중요합니다. 빙판에서 신는 것인 만큼 더욱 꼼꼼하게 살펴야 해요. 스케이트화 피팅을 할 때 발만 넣어보지 말고 끈을 끝까지 다 묶고 발 길이와 볼 너비가 맞는지 확인해야 해요. 스케이트화의 날과 발끝이 수직선상에 있어야 하고요.” 이 대표가 조언했다.
큰맘 먹고 스케이트화를 구매했다면 보관하는 것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스케이트화는 부츠와 날로 이루어져 있다. 날은 물기를 제거하고 가드독(플라스틱 날집)에 보관해야 한다. 금속이기 때문에 물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 부츠는 통풍이 되는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주기적으로 스케이트화의 날을 연마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구멍 난 타이어를 달고 운전하는 것만큼 불안하다. 스케이트화를 관리하는 것, 피겨 스케이팅을 안전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운동인 셈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