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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고 칼칼하고 달큼한 ‘거창한 거창’을 맛보다 [ESC]

커버스토리 거창 1박2일 미식 여행


어탕국수와 생청국쌈장, 제철 식재료로 만든 수제 국수


자연 효모로 소량 생산하는 포도주·‘사과 발효주’도 인기


‘월간거창농부’ 장터에선 친환경 농산물이 소비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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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30분 남짓을 달렸다. 딸기와 사과, 포도 등 맛 좋고 향 좋은 과일로 유명한 동네, 경북 김천시와 전북 무주군, 경남 함양군과 맞닿아 있는 산속의 고장, 경남 거창군으로 가는 길이다. 멀다면 먼 동네라지만 이번 여행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인 만큼 거창군은 농민과 소비자를 잇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올해 3월부터 12월까지 매달 거창군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단에서는 친환경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과 소비자가 바로 만날 수 있는 장터(월간거창농부)를 연다. 거창의 친환경 식재료와 가공품을 보고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일종의 장터다. 거창에서 나고 자란 재료로 만든 각종 제품과 ‘월간거창농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난 4월 중순 거창에 도착했을 때 쌀쌀한 기온을 느꼈다. 당일 낮 12시30분 기준 기온은 5.5°C. 온화한 서울의 늦봄 날씨와는 사뭇 달랐다. “고도 1000m 이상의 15개 산이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중간이 움푹 파인 분지 형태라 초여름까지는 꽤 쌀쌀하다”는 박영민 투어 가이드의 말이 바로 와닿았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시간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첫 끼 아닌가. 여행의 첫인상인 만큼 어떤 음식을 먹는지가 중요하다. 박 가이드의 추천은 추어탕과 어탕국수.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엔 유독 잡어를 갈아 넣어 만드는 어탕국수나 추어탕이 유명한 지역이 많은데 거창도 그렇다. ‘추어탕 거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10곳 이상의 추어탕집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많고 많은 가게 중 거창읍 대평리에 위치한 ‘구구추어탕’을 선택했다. 거창버스터미널에서 차로 4분, 도보로도 11분 정도면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토박이 맛집’이다. 상호에서도 알 수 있듯 메뉴는 단출하다. 잡어와 미꾸라지를 갈아 만든 추어탕과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넣은 어탕국수, 공깃밥과 안주용 닭발이 전부다.


어탕국수를 주문하자 각종 밑반찬이 깔리는데, 서울에서는 보지 못했던 반찬이 유독 눈에 띄었다. 거창 사람들의 식탁에는 매일 생청국장에 고춧가루와 마늘, 고추와 된장으로 양념을 한 ‘생청국쌈장’이 오른다. 삭히지 않은 생청국장이라 쿰쿰한 맛은 거의 없는, 깔끔하고 고소한 콩 맛이 도드라진다. 함께 나오는 아삭한 풋고추에 찍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으면 이곳의 명물, 어탕국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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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어를 갈아 넣은 국물에 면을 그대로 넣어 끓이는 ‘제물국시’ 방식이라 묵직한 질감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국물은 맑고 가벼웠다. “거창의 어탕국수는 최대한 깔끔하고 맑게 끓여내고, 화한 향이 나는 방아잎을 듬뿍 넣는다”는 박경자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랐다. 나온 상태로 국수를 먹다가 이 지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향신료인 제피 가루를 넣어 먹으면 박하처럼 시원하고 칼칼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뒤따른다.


식사를 마친 뒤 차로 5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거창읍 장팔리에 위치한 ‘거창한 국수’. 김현규 전 대표의 뒤를 이어 그의 딸인 김상희 대표가 2020년 이곳에 합류했고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유명한 국숫집이 됐다. ‘연구소장’ 직함을 달고 국수공장을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김현규 전 대표는 “밀가루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연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계에서 뽑은 생면을 자연광으로 널어 말리는 재래식을 고수한다. “비 오는 날과 햇빛 쨍쨍한 날의 국수 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한참 국수를 만들 때에는 밤이고 낮이고 계속 국수만 쳐다보고 있다니까요. 잠시라도 눈을 떼면 국수가 다 망가지거든.” 부추와 단호박, 비트, 쌀, 흑미로 만든 오방색의 ‘오방국수’가 이곳의 시그니처다. 계절마다 제철 식재료를 넣은 ‘월간 거창한 국수’도 만든다. 한라봉, 사과, 아스파라거스, 바질, 민들레 등 보통의 국수에서는 볼 수 없는 재료를 껍질째 넣는다. “한라봉국수에서는 진짜 한라봉 맛이 나고, 부추국수에서는 부추 향이 나요. 부재료를 넣지 않고 들기름에만 비벼 먹어도 맛있습니다.” 김상희 대표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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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25분 남짓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정쌍은 포도주’다. “한국에도 포도주가 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전국 곳곳에는 200여곳의 와이너리가 분포해 있다. 거창군 웅양면 군암리 산자락에 위치한 ‘정쌍은 포도주’는 거창에서도 포도로 유명한 웅양의 포도를 이용해 유기 가공 인증을 받은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다.


1990년 웅양면에 터를 잡은 정쌍은·임혜숙 부부가 ‘본인들이 마실 술을 만들기 위해’ 만든 와인이 시초다. 2007년 정식으로 공장을 내고 2020년 아들 정규송 연구실장이 합류하며 와인의 라인업이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거창의 유기농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포도밭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흙이 철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화강암이에요. 비료를 많이 주지 않아도 영양분을 충분히 머금고 있는 건강한 토양이라 포도의 맛과 향이 아주 진해요. 와인을 만들기에 최적화된 포도지요.” 정 실장의 말이다.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 고유의 맛과 향을 해치지 않기 위해 화학 첨가물이나 보존제 등을 넣지 않고, 자연 효모만을 이용해 옛날 방식대로 만들기 때문에 생산량도 많지 않다. “제품당 연간 300병에서 600병 정도 생산합니다. 대부분은 출시되자마자 품절되고요.”


이튿날은 ‘월간거창농부’ 장터가 열리는 거창읍 가지리의 ‘해플스 팜사이더리’로 향했다. 와인을 만드는 곳을 와이너리라고 부르는 것처럼, 사이다를 만드는 이곳을 사이더리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가 보통 탄산음료로 알고 있는 ‘사이다’(cider)에는 사과로 만든 발효주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곳은 사과 발효주를 만드는 체험형 양조장이다. 넓게 펼쳐진 사과나무 숲에는 때늦은 흰 사과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해플스 팜사이더리의 유영재 대표는 “과수원이라고 하면 왠지 농민의 공간이라 일반인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사과나무 숲이라고 이름 지었다”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편하게 돗자리도 가지고 와서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농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유 대표의 말처럼 수령이 50년도 넘은 오래된 사과나무 사이로 ‘애플 사이다’를 마시며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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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거창농부’ 4월 주제는 ‘꽃’. 활짝 핀 사과꽃밭 사이로 사과, 샐러드 채소, 딸기와 버섯 등 거창에서 나고 자란 유기농 농산물과 와인, 사과 사이다, 국수 등 거창의 특산물을 판매하는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야외에 나와 쇼핑도 하고, 식사를 하는 행락객들이 왕왕 눈에 띄었다. “이런 풍경이 ‘월간거창농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자연스럽게 농부와 소비자가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박영민 가이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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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는 특별히 이곳 현장에서 식사를 하는 ‘팜 다이닝’도 마련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지속가능미식연구소 ‘플래닛 랩 바이 아워플래닛’의 장민영 대표는 거창의 식재료로 거창 사람들이 가장 많이, 편하게 먹는 음식을 색다른 방식으로 맛보이기 위해 이번 다이닝을 기획했다. “말리고, 삭히고, 소금에 절이는 저장 식품이 발달한 거창에서는 일반적인 식탁에서 보기 힘든 식재료가 많아요. 싱경이(경남 방언으로는 싱기)라고 불리는 납작파래도 그중 하나입니다. 소금에 절인 싱경이를 막장 담글 때 함께 넣어 먹으면 독특한 식감을 내지요. 우엉잎에 쌈 싸 먹는다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나요? 늦봄에서 여름까지만 나는 귀한 식재료죠. 거창만의 음식 문화를 모르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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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코스로 천천히, 여유롭게 진행되는 식사 시간 동안 그동안 몰랐던 거창에 대해 천천히 생각했다. 긴긴 시간을 삭히고 절이고 말리기도 하는데, “세시간 반이나 차로 가야 하는 거리는 너무 멀다”고 투덜거렸던 하루 전을 떠올렸다. 겨우 세시간 반이면 이렇게 색다른 세상이 펼쳐지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고 촉박할까? 쿰쿰하고 구수한 추어탕 같기도, 향긋하고 달큼한 포도 같기도 한 거창의 매력, 그야말로 ‘거창한 거창’이다.


백문영 객원기자


거창의 볼거리




신나게 먹고 마셨다면 이제는 구경할 차례다. 거창에 방문했다면 꼭 들러봐야 할 관광 명소도 많다.


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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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거창이 백제의 영토였을 때, 이곳에서 신라에 ‘근심으로 사신을 떠나보낸다’라는 뜻으로 ‘수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며 ‘수승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맑고 깨끗이 흐르는 월성계곡 덕에 거창을 찾는 이들의 필수 관광지로 손꼽힌다. 거북 모양을 닮은 ‘거북바위’, 바위 사이 흐르는 물로 붓을 씻는다는 뜻의 ‘세필짐’, 먹을 갈았다는 ‘연반석’ 등 과거 선비들의 풍류를 느끼며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현재는 거창군에서 수승대 관광지로 관리하며 야외 수영장과 야영장도 운영하고 있다.


계곡을 따라 숲길로 10여분 걸어가면 수승대 출렁다리가 나온다. 1.5m 폭으로 240m를 걸어가야 하는 다리다. 수승대와 거북바위, 월성계곡은 물론이고 주변의 기암괴석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많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2 수승대관리사무소.


정온 선생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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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은 걸출한 문인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천면 강동마을에 있는 ‘정온 선생 고택’은 조선 광해군 때 사간원 정언을 지낸 동계 정온의 생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면 고택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화장실과 욕실을 현대식으로 보수해 한옥 숙박의 불편함을 없앴다. 200년 넘은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는 이에게 적극 추천한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1길 13.


백문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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