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빨래판 같지만 엄연한 타악기입니다, 워시보드
워시보드 /flickr |
옛 사람들은 옷을 세탁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썼다. 물을 흘려려보내 세탁하는 방법, 또는 옷을 마찰시켜 세탁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초기에는 물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가장 쉽고 원시적인 방법이라면 큰 바구니에 옷을 넣고 흐르는 시냇물에 바구니를 고정시킨 다음 놔두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것보다 깨끗한 세탁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시냇물이 깊지 않다면, 다른 곳으로 물을 가져와 빨래판을 사용하거나 돌 위에 옷을 두드려 물에 헹구는 방법이 있었다. 빨래판은 세탁을 조금 더 쉽게 해 주는 물건이었지만, 비단 단순히 세탁에만 쓰였던 게 아니었다. 19세기에도 여전히 빨래판을 사용했는데, 이 빨래판과 동일한 형태의 타악기가 생겨났다. 이름도 빨래판과 동일한 워시보드(Washboard)라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썼었을 워시보드 형태 /flickr |
전통적인 빨래판의 모양은 나무 프레임에 옷을 문지르기 위한 주름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다. 19세기 빨래판은 나무로 만든 게 일반적이지만 20세기 들어 금속으로 만든 빨래판이 늘어났다. 따라서 워시보드도 나무로 된 것 외에도 금속으로 만든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1868년, 뉴욕타임즈는 워시보드를 두고 "미국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소개하기도 했다.
워시보드를 연주하는 연주자 /flickr |
워시보드는 금속 표면을 이용해 연주하며 재즈, 자이데코(루이지애나의 미국 흑인들이 연주한 춤곡), 스키플(1950년대 초 영국에서 유행한 음악 장르로 재즈·블루스·포크·민속 음악의 요소를 더한 대중음악 장르), 저그 밴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사용된다. 워시보드는 주로 두드리는 방식으로 연주를 하지만 골무로 워시보드 표면을 긁어내는 방식으로도 연주한다. 종종 워시보드는 나무 블록, 카우벨(소 목에 다는 방울처럼 생긴 금속제의 체명악기), 작은 심벌즈를 붙여 연주하기도 한다.
밴드 연주를 할 때 워시보드는 드럼을 대체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음악에서 백비트(약박에 강세를 붙인 것)로 연주한다. 재즈를 연주할 때엔 밴드 더 워시보드 리듬 킹스나, 뉴먼 테일러 베이커처럼 모든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훨씬 더 복잡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워시보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워시보드 리듬 킹스는 워시보드를 대중화시킨 그룹 중 하나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흑인 뮤지션으로 구성된 소규모 밴드로 재즈를 연주했다.
프로투아르 /flickr |
이 외에도 악기 전체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깨에 걸 수 있도록 윗부분이 둥글게 말려 있는 워시보드도 있다. 금속으로 된 빨래판처럼 보이는 이 악기는 ‘문지르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동사 ‘frotter’에서 파생된 프로투아르(Frottoir/Froittoir)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프로투아르는 프레임이 없고 목에 매달 수 있는 금속 리브로만 구성되어 있다. 연주자는 주로 숟가락, 병따개를 사용해 긁고 두드리는 등의 조합으로 연주한다. 프로투아르가 드러머가 있는 밴드에서 쓰다듬는 형태의 타악기로 연주된다면 워시보드는 드럼을 대체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타악기로서의 워시보드는 서아프리카에서 연주하던 함본 댄스(팔, 다리, 가슴 및 뺨을 때리고 두드리며 스텝을 밟는 댄스)에서 파생되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리드미컬한 춤, 노래, 드럼, 기타 타악기 등을 높은 수준으로 구사했다. 원주민들은 통나무나 동물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북을 사용해 인근 부족과 소통했다고 한다. 또 가슴, 배 등 신체 부위를 두드려 나오는 리듬을 통해 다양한 소리를 내는 함본 댄스를 개발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리듬을 맞춰 추는 모습은 현대의 음악 축제에서 볼 수 있는 드럼 써클을 연상케 한다.
한 밴드에서도 볼 수 있는 워시보드 /flickr |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은 리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노예제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으로 끌려왔을 때, 농장주들은 노예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반란이 일어날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드럼을 포함해 이들이 악기를 쓰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노예들은 춤을 추고, 손과 발을 이용해 리듬을 만들어냈다. 해방 이후 아프리카인들은 뉴욕으로 이주하며 다양한 문화들이 혼합되었다. 노예 출신의 아프리카인들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친하게 지내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결성된 저그 밴드들이 만들어졌다.
이후 주전자, 숟가락, 워시보드를 사용해 음악을 만드는 저그 밴드가 만들어진다. 저그 밴드는 손잡이가 달린 술병인 잭(입에 대고 음을 내며 연주할 수 있다)을 중심으로 하모니카, 밴조, 커즈, 바이올린, 워시보드 등으로 편성된 일종의 재즈 밴드를 뜻한다. 저그 밴드는 1920년대 큰 인기를 얻었고 워시보드 윌리, 워시보드 샘 등 유명한 연주자들이 이름을 날렸다. 워시보드는 여전히 빨래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지만, 점점 자이데코와 케이즌 음악(블루스와 포크 음악이 혼합된 형태)을 연주하는 데에도 쓰였다.
미국 남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음악가들은 고가의 악기를 구입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워시보드를 포함해 숟가락, 머리빗 등으로 즉석에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곤 했다.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타악기를 살 돈이 없어 워시보드를 악기로 대신 썼다.
프로투아르를 연주하는 연주자 /flickr |
프로투아르는 자이데코 음악을 위해 고안된 20세기 발명품이다. 미국에서 발명된 몇 안 되는 악기 중 하나로, 워시보드를 필수 요소로 한다. 다만 포르투아르는 워시보드보다는 가격이 훨씬 더 나간다고.
워시보드 /flickr |
워시보드는 규격화되어 있는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제작될 수 있다. 대부분 직사각형이며 높이 약 25cm, 너비 약 10cm 안팎의 작은 워시보드부터 높이 약 60cm, 너비 약 30cm의 큰 워시보드까지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전통적인 빨래판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형태다.
연주에 사용하는 중앙판(옷을 문지르는 용도로 사용했던 부분)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감싸는 틀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나무 틀의 윗부분에는 비누를 놓는 용도로 사용했던 직사각형 칸이 있고, 아래쪽에는 다리가 있다. 과거에는 실제 집에서 사용하던 빨래판을 연주에 사용했기 때문에 중앙판이 유리이거나 빨래판 전체가 나무 또는 금속 소재로 된 것도 사용되었다.
수평으로 워시보드를 두고 연주하는 연주자 /flickr |
워시보드를 사용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워시보드 채즈 블루스 트리오처럼 미국 연주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워시보드를 가슴 아래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연주하는 방법이다. 브루클린 블루 바이퍼 같은 유럽 쪽 연주자들은 무릎을 벌린 채 수평으로 놓고 잡거나 특수 제작된 스탠드에 수평으로 장착하고 연주한다. 마지막으로는 흔하지 않은 방법인데, 앉은 상태에서 다리 사이에 수직으로 워시보드를 놓고 보드의 양쪽을 두드리며 연주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워시보드 연주자들은 여러 손가락에 금속 골무를 착용하고, 금속 표면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거나 문지른다. 연주 도구는 숟가락, 포크, 못, 병따개, 동전, 열쇠, 클립, 골무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인 경우가 많다. 그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금속 소재의 골무다.
손에 금속 골무를 낀 연주자 /flickr |
골무를 사용할 때는 각 손에 1개씩, 최소 2개의 골무를 사용하며, 여러 손가락에 골무를 끼우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는 골무가 부착된 워시보드 장갑을 사용하기도 한다. 워시보드는 무엇으로든 연주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손톱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도 있었지만 손톱이 쉽게 상하기 때문에 오늘날 널리 쓰이는 방법은 아니라고 한다.
워시보드에서 보이는 다양한 악기들 /flickr |
워시보드는 사용하는 재료나 연주자의 동작에 따라 다양한 리듬과 소리를 낼 수 있다. 워시보드엔 연주자가 원하는 장식이나, 추가 기능을 더해 나만의 워시보드를 만들 수도 있다. 종, 호른, 깡통 등 뭐든지 가능한 수준이다. 처음에야 워시보드가 워낙 빨래판 그 자체로 생겼으니 어색할 수 있지만 연습하면서 두드리다 보면 표현력이 풍부한 악기이며, 재미있는 도구라 느낄 수 있다고.
길거리에서 워시보드를 연주하는 연주자 /flickr |
2020년 11월, 스미소니언매거진은 오하이오주 로건에 있는 한 공장에 대한 내용을 기사로 실었다. 콜럼버스 워시보드 컴퍼니는 연간 약 8만 개의 워시보드를 판매한다고 한다. 공장 관리자 측은 "회사 매출의 40%는 빨래를 하거나 예비용품으로 보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20%는 장식용, 40%는 악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판매된다"고 전했다. 또 공장에서는 예약을 통해 약 35분간 투어를 진행하는데, 워시보드를 만드는 과정을 배우고 구경할 수 있다고.
관리자 측은 투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은 오래된 기계가 여전히 작동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 말한다. 덧붙여 "투어를 온 사람들에게 스틱을 주고 워시보드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전했다. 옛 조상들이 빨래했던 방식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 워시보드를 사 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세탁이 목적이 아닌 엄연한 타악기로써 워시보드를 찾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