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PD? QC? 고속충전 상식 이모저모
폰은 잠잘 때 충전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폰들은 배터리 용량만큼이나 또 충전 속도도 빨라져서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 중에 충전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아무리 보호회로가 있다고는 하나 늘 꽂아 놓는 것은 배터리에 좋지 않을 듯한 느낌이라서인 것 같다. 어쨌거나 배터리 0%라 해도 한 시간 준비 시간 동안 80% 충전할 수 있으니 아침 충전은 트렌드가 될만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 충전기는 5V 전압에 1A 전류, 이를 곱한 5W 공급량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폰의 화면이 커져 전력 소비가 늘어나고 이를 상쇄하고자 배터리의 용량이 더불어 커졌다. 이 커진 통을 예전의 물줄기로 채우기에는 벅찬 일이다.
제품 중에는 전류를 2~2.4A 정도까지 더 받아서 10~12W를 다룰 수 있는 기기들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충전이 그나마 쾌적했다. 반면 가끔 길거리에서 산 저질 케이블이나 충전기의 경우는 USB 최소 사양 그대로인 0.5A 정도밖에 뽑아내지 못해 세월아 네월아 하며 기다리곤 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5V*0.5A=2.5W도 보통 노트북의 USB 단자가 뱉어낼 수 있는 정격 용량이다.) 비슷해 보이는 어댑터와 케이블, 그리고 단자였지만 그 안의 물살은 예전부터 꽤 달랐던 것이었다.
이제는 고속충전의 시대. 어떤 폰에는 9V*1.7A=15W가 흐르기도 하고, 또 어떤 폰에는 5V*5A=25W가 흐르기도 한다. 예전보다 두 배 이상 빨라진 충전 속도다. 하지만 케이블 안의 물살은 제각각 천양지차가 되어 버렸다. 메이커들마다 그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폰에게 상대편 충전기는 이제 미지의 대상. 주는 대로 받을 수는 없어진 폰과 충전기는 얼마만큼의 전압과 전류를 서로 설정할지 서로 ‘네고시에이션’을 통해 결정해야 하는데, 이에는 규격과 표준이 필요하다.
고속충전의 대표주자는 퀄컴의 ‘퀵차지(QC)’였다. 버전 1.0은 그냥 5V*2A=10W, 2.0부터 전압을 12V까지, 3.0부터는 20V까지 네고시에이션을 통해 다단계로 전력과 전류를 공급하는데, 기준 목표치는 18W다. 퀄컴제 폰 두뇌인 스냅드래곤이 알아서 지원해 주니 LG, HTC 등 퀄컴 생태계에 속한 이들이라면 당연스럽게 채택했다. 이 생태계에 다리를 걸친 삼성이 만든 ‘어댑티브 패스트 차지’도 사실상 QC의 파생품이었다. 퀄컴은 이렇게 고속충전의 세계 통일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USB PD(Power Delivery) 규격이 정리되고 신형 애플 맥북이 양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USB PD는 USB의 공식 표준 고속 충전 규격이다. USB C 단자를 필수로 하며, 폰 만을 위한 것은 아니기에 맥북 등 노트북에서 한창 쓰이고 있다. 최대치는 20V에 5A로 최고 100W까지를 뿜어낼 수 있다. 애플이 이를 기반으로 맥북은 물론 아이폰 8, X, Xs 등을 고속 충전할 수 있게 하고(하지만 아이폰 박스에는 고속충전기는 안 들어 있다), 또 구글의 픽셀이 PD에 공식 대응하면서 안드로이드용으로도 밀고 있는 모양새이기에 앞으로의 업계 전망은 USB PD가 가장 밝다고 볼 수 있다. QC마저 4.0+ 버전부터는 PD와의 호환성을 맞춰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플과 구글이 밀어도 PD 천하는 쉽사리 오지 않고 있다. 근래에 PD와 QC 이외에 중국계의 고속 충전 혁신이 가세한 덕이다. 현재 각종 벤치마크에서 가장 충전 성과가 좋았던 것은 화웨이의 수퍼 차지라는 규격이었다. 오포의 VOOC 플래시 차지(원플러스의 대시 차지라는 이름으로도 라이센스)라는 것도, 그리고 퀄컴의 경쟁사인 미디어텍이 자사의 칩을 쓴 폰을 위해 마련한 펌프 익스프레스도 전압보다는 전류를 늘려 공급한다. 이들 경우에는 모두 높은 전류를 받쳐 줄 고급 케이블이 필요하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똑같이 생긴 USB 단자를 지닌 충전기와 케이블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규격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물리적으로 구멍에 쑥 들어는 가도 네고시에이션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인데, 이 경우 최악의 상황은 고장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의 공업 제품에서는 잘 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네고시에이션에 실패할 경우는 가장 기본적이고 안전한 충전 전압으로 내려 버리는 상식 정도는 다들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나온 USB C 단자 폰 들이 PD 지원 사양이 아니라도 애플 맥북 어댑터 등 PD 충전기로도 충전할 수 있곤 하는 이유다. 많은 경우 5V에 2.4A로 최저 전압의 최대치를 뽑아 주므로 얼핏 고속으로 느껴진다.
전압을 높이는 일은 대개 위험하다. 특히 네고시에이션이라는 개념이 없는 제품, 예컨대 최신 폰이 아닌 각종 염가의 전자기기 등도 USB 전원을 채택 중인데, 여기에 고속 충전기를 꽂은 경우 상당히 높은 확률로 기기를 망가뜨리기 일쑤다. 특히 마이크로 USB 때부터 보급된 QC 충전기(삼성의 패스트 차지 포함)들을 절대 꽂으면 안된다는 안내서가 마이크로 USB로 전원부를 탑재한 각종 제품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나마 이런 설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냥 원인 모를 제품 사망으로 이어지곤 하는 일이다.
동봉된 충전기만 쓰세요, 라고 많은 제품들은 주장하지만, 세상에 어디 집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 다행히도 최신 폰들은 먹성 좋고 튼튼해 보이지만, 고속 충전을 둘러싼 혼돈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