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달러 컴퓨터 한 잔
[IT 강국의 품격] 영국편
드라마 「응답하라 1988」보다는 조금 이전.
8비트 전성기가 가끔 그립다.
미국에 애플2(APPLE II)가 있었고, 일본에는 MSX가 있었다면, 영국에는 'BBC 마이크로(Micro)'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영향권 안에만 있었던 우리로서는, 머나먼 나라였던 영국의 BBC 마이크로란 기억날 리 없는 낯선 과거다.
BBC 마이크로는 영국의 공영 방송 BBC가 지금으로부터 30 여년전 대대적인 컴퓨터 교육 캠페인을 벌이면서 영국의 무려 약 80%의 학교에 보급하게 한 대박 상품. 구매비의 반 정도는 정부 보조로 충당했고 또 공영 방송이 밀어줬으니 범국가적 사업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야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한국도 이런 일에는 지지 않았다. 80년대 당시의 과기처도 문교부도 교육용 PC 사업으로 생색내는 일에 열심이어서, 그 관납의 역사가 8비트 시대의 문을 열었고 또 셧다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BBC 마이크로를 만든 납품회사는 대량 정부 조달 납품에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수요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이 달랐다. 교육용처럼 대량으로 소비되는 컴퓨터에는 더 가볍고 ‘효율적인’ 아키텍처가 필요하겠다는 자극을 받은 것이다. BBC 마이크로를 개발킷 삼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안드로이드와 iOS를 움직이고 있는 ARM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ARM의 A는 원래 그 무모한 납품회사 에이콘(Acorn)의 머릿글자였다.
마치 영국의 국어가 세계 공용어 영어가 된 것처럼, 스마트혁명의 모국어는 IoT 시대의 공용어가 되어 가고 있다. 애플도 퀄컴도 삼성도 모두 ARM을 담은 칩을 만들고 있다.
8비트 시절, 그 수많은 제약 조건 속에서도, 아니 오히려 그 제약 조건이 미래를 위한 자극이었음을 영국은 기억한다. 이는 그렇게 함께 자라난 아이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청춘을 컴퓨터와 보냈던 즐거운 추억을 지닌 아이들은, 그 추억을 다시 한 번 다음 세대에게 돌려주자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어른들로 자라났다.
25달러짜리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는 그렇게 시작한다. 지금은 ‘오픈소스 하드웨어’ 풍조의 대명사격이 되어 버린 라즈베리 파이. 기판처럼 보이지만 리눅스는 물론 이제는 윈도우 10 (IoT 버전)도 올라가는 어엿한 컴퓨터다.
라즈베이 파이 재단이 소프트웨어 교육을 중흥하기 위한 비영리 재단인 것도, 라즈베이 파이 컴퓨터가 ARM에 근거해 만든 결과물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라즈베리 파이 운동에 영감을 얻은 BBC는 30년전 BBC 마이크로의 추억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마이크로:비트(Micro:bit)라는 작은 하드웨어를 영국의 10대 초반 학생들에게 무상배포할 예정이다. 이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도 파트너로 동참했는데, 내심 놀랄만한 일이 지난주에 발생했다.
5달러짜리 ‘라즈베리 파이 제로’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돈이 없어서 컴퓨터를 못 했다는 변명만큼은 사라져도 좋다. 라떼 넉 잔 값에서 한 잔 값이 되었다고 라즈베리 파이 제로의 개발자는 영국식 조크를 한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관주도 파트너십이나 무상배포가 아니라, 그런 거대 프로젝트가 사회적 토양을 남기는 것, 또 그런 프로젝트가 이미 계획 중임에도 “라떼 한 잔 값”의 컴퓨터가 뜬금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다양성, 그리고 이를 격려하는 IT 강국다운 풍토와 문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