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IT역사. 드래곤퀘스트
전화위복이라고나 해야 할까? 한국이 온라인게임 강국이 된 배경에는 그러한 시대 배경이 있다. 소프트웨어란 복사해서 즐기는 것이라는 한국적 상식에 좌절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무료로 즐기기 시작하지만 결국은 돈을 내게 하는 이 기발한 방식의 성공체험은 다양한 산업이 모방해 갔다.
하지만 이 일종의 후불제는 선불제와는 다르다. 영화나 소설처럼 작가가 만든 세계관이 주는 감동에 젖었다가 깨어난다면 후불제를 적용할 수 없다. 정신 차린 뒤, 이미 감정을 추스른 후에 돈을 받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후불제 게임은 궁극적으로 무한궤도를 만들려 한다. 그 안에 내가 살아갈 사회가 있는 듯 게임 자체가 또 하나의 생활인 듯 느끼게 할수록 좋다. 감동은 저 지평선 너머에 있을 것 같이 만드는 ‘감동의 유예’가 바로 온라인 게임의 성공 비결이다.
반면 선불제의 패키지 게임은 편마다 반드시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게임을 ‘클리어’하는 일이란 그 스토리의 감동을 완전히 느끼기 위한 의식(儀式) 같은 것으로, 영화, 드라마, 소설과 같은 수동적 컨텐츠의 마지막 페이지나 엔딩을 보는 일과는 또 다른 감동이 있다. 완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있을지언정, 게임은 무한 반복하지 않는다. 감동을 얻고 일상으로 돌아가, 다음 편을 기다린다.
이 차이는 크다. 게임 유저의 입장도 크지만, 게임을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도 차이가 크다. 만들어내는 세상의 끝을 염두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만드는 일, 즉 크리에이터로서 완전한 창작이란 그 끝에서 완성된다. 어떤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들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상호작용 가능한 픽션은 마지막이 있기에 마무리된다. 현실에선 못 느낀 감정의 고양과 배출, 인사이트의 자극이 엔딩크레딧과 함께 쏟아진다. 크리에이터는 연기를 하고 박수를 받고 그 후련함과 함께 평가를 받는다. 명작이 생길 수 있고 평론이 꽃필 수 있다.
게임의 스토리는 일직선이 아니기에 게임에서는 못다 이야기한 다양한 설정이 활발히 공유된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도 사연과 과거가 있고, 이 설정을 해설하기 위해 소설이나 그림 등 파생상품이 발달하기도 한다.
드래곤 퀘스트의 약체 몬스터 ‘슬라임’ 하나만 하더라도 수도 없는 컨텐츠로 다뤄져 왔다. 이 슬라임은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RPG 캐릭터가 되었을 것이다. 롯데는 드래곤퀘스트 30주년이던 해, 슬라임맛(?) 껌을 일본에서 발매했다.
원래는 끈적한 아메바 느낌의 슬라임을 지금의 양파 같은 물방울 모양으로 만든 것은 이 게임프로젝트에 30년간 참여한 거장 만화가. 드래곤볼, 닥터슬럼프 등을 그린 이다.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 알았다면 처음에 한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 작품의 끝은 ‘에피소드’와 ‘시즌’의 짧은 반복으로 다시 새로운 작품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제 누구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만든 이들은 거장으로 칭송받는다. 그 롤모델을 보고 또 다른 크리에이터 들이 생겨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
IP라는 것이 과거 성공을 재탕하여 리스크를 낮추는 정도의 일로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여겨지고 있는듯한데, 정확히는 이미 느꼈던 감동의 추억을 소환하는 일이다. 마블이나 DC 프렌차이즈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생각하면 에피소드로 이어질 수 있을 수 있는 모든 컨텐츠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거꾸로 에피소드가 있기 힘든 무한궤도의 온라인 게임이 필연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게임이 일본 게임을 넘어섰다고 자신감에 차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 약한 고리를 이제는 돌아 돌아 깨닫게 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