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회사 유튜브에 플래시맨이 날뛴다? '유쾌함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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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가 석유·화학·에너지 업계에서도 중심적인 홍보 채널로 부상하고 있다. 정보와 재미를 모두 잡아 대중성과 기업 이미지 제고를 타진한다는 전략이다. 업계 특성상 전문 용어·기술 관련 이야기들이 많아 다소 딱딱해 보였던 석유·화학·에너지 업체들이 이제 트렌디하고 친근한 기업으로 변모하는 모습이다.
개성도 각양각색이다. 일견 난해한 영웅 서사부터 아재 감성과 생활 정보까지, 유튜브 채널을 살펴보면 각 기업들이 추구하는 색깔을 알 수 있다.
그저 원리를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유튜브 개미지옥을 헤매 왔다면, 한 번쯤은 에너지 기업들의 영상을 검색해 보자. 뉴스보다 알기 쉬운 내용에, 재미는 덤이다.
'영웅 판타지'가 홍보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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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B급 감성 등을 홍보 전략으로 삼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날아라, 슈퍼보드' 캐릭터들을 모델로 기용했다. '서유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내용의 '날아라, 슈퍼보드'는 19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가운데 하나다.
약 30년 만에 돌아온 주인공들은 사바 세계를 구할 불전이 아니라 친환경을 위해 모험을 떠난다. 목적지도 더 이상 천축이 아닌 듯하다. 예전에는 요괴를 소탕했다면, 이제는 기후 악당들을 단죄하는 데 나선 것일까.
저팔계는 친환경 돼지가 될 것을 다짐하고, 현재 800세 이상으로 추정되는 손오공은 최고령 친환경 모델이라는 기록을 세우기에 이른다. 다소 근본 없는 세계관에 황당하더라도 SK이노베이션만의 바이브에 몸을 맡길지어다. 이 같은 영웅 서사가 SK이노베이션의 유튜브 전략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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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몇십 년 전에 본 것과 똑같은 똥차가 털털 굴러 가고 있는데, 저팔계는 "스님(삼장법사) 차는 왜 이렇게 조용하고 잘 나가셩?"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삼장법사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 자동차라 그렇다며, "너 같은 돼지를 2마리나 태워도 거뜬히 나아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손오공과 사오정에 따르면 이 차는 SK루브리컨츠의 윤활유를 적용하고, SK에너지 주유소에 들른다.
주인공들이 "앞 광고가 트렌드인 거 몰라?"라고 천진하게 되묻는 것을 끝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반응은 뜨겁다. 해당 영상 조회 수는 무려 1168만회를 돌파했다. '날아라, 슈퍼보드'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의 환호가 잇따랐다. 손오공의 슈퍼보드에도 배터리를 탑재해 달라는 요청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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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레인저'에 대한 오마주도 있다.
어느 날 SK이노베이션 홍보팀 막내들이 유튜브를 통해 회사를 홍보하라는 지령을 받고 전국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들은 각각 SK이노베이션·SK인천석유화학·SK에너지 등을 대표하는 플래시맨, 아니 '스키노맨'(Skinnoman·SKInnovation+man)으로 레드·블루·퍼플·핑크 4명이다.
분홍색 추리닝을 입은 한 남성(스키노맨 핑크)이 서울 종로구 서린동 일대를 배회하자, "어머, 스키노맨!"이라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진다. 연출이 좀 작위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 그는 SK 서린 빌딩의 유명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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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노맨들은 전국 사업장들을 누비며 공장 설비나 복지 시설 등을 소개하고, 정기 보수 현장을 직접 체험하기도 한다. 영상들을 보고 나면 SK 임직원들이 서린 빌딩에서 가상 현실(VR) 기기와 파티룸, 사색의 계단 같은 호사를 누린다거나 공유 오피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매일 업무 볼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선진 시스템을 쓰는 것에 대해 부러움을 느낄 수 있다. SK인천석유화학 직원만 안다는 비밀스러운 벚꽃 명소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SK이노베이션이 후원, 협업하고 있는 우시산 등 소셜 벤처들이 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히 조명되면서 현재 SK이노베이션이 주력하는 사회적 가치 창출이 실체적으로 와닿는다는 호평도 나온다.
또 스키노맨들이 먼저 입사한 선배로서 채용 '족보'를 알려주고, 사업·기업 문화·복리 후생 등에 대해 대담하는 영상은 많은 취업 준비생들의 호응을 사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의 유튜브 활용에는 재기 발랄한 막내 홍보맨들의 활약이 컸다는 평가다. 애초에 스키노맨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안한 주체가 이들이었으며, 유튜브 제작도 외주에 맡기지 않고 이들이 전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들은 사내 홍보 채널 운용을 통해 내부 소통 창구의 역할도 맡고 있다. 실제로 이들 중 한 명은 이 같은 콘텐츠 제작·운영 역량을 인정 받아 조기 진급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혼란한 매력, 삼성S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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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의 유튜브는 개성이 확실한데 다소 혼돈스럽다. 문학과 기술을 종횡무진하고 레트로와 컨템퍼러리 사이를 오가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겠다.
고두현 시인이 삼성SDI의 초격차 기술을 찬사한 시가 중장년층의 단체 채팅방에 공유될 법한 영상으로 공개되는가 하면, 2020년생도 따라잡지 못할 만치 미래적인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이 발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두 영상 모두 삼성SDI의 배터리 기술력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SK이노베이션과는 다른 광기가 있다는 평이다. SDI가 'Special Drug Injection'의 약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는 (장난스러운) 의문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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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개로, 정보 전달과 세대별 공감 코드를 두루 아우르고 있는 조화로운 강점도 있다.
'주모' 시리즈는 배터리와 에너지 저장 장치(ESS)에 대한 기초 지식을 직관적이고 재치 있게 풀어낸다. 다만 보다 보면 "주모, 기술 한 사발 주시오"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삼성SDI가 밀고 있는 이 유행어가 대체 어떻게 탄생했고 무슨 효과를 노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아재 감성'에 입각했으려니 하고 어렴풋이 짐작될 뿐이다.
삼성SDI 유튜브 경우 전체적으로 사람, 즉 임직원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 콘텐츠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실제로 이가 큰 호응을 얻는 모습이다.
경영 지원팀·개발자·엔지니어·전시회 담당자 등 직무별 브이로그 영상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 밖에도 새벽 3시부터 일어나 하루에 5만보를 걷는 기인을 밀착 취재 한 '스디 극장' 등이 주목을 받았다.
조직 내 세대 차이를 조명한 콘텐츠도 공감을 얻고 있다. 삼성SDI가 셋이 합쳐 근속 연수가 65년인 고경력 직원들을 상대로 '꼰대 테스트'를 진행한 영상을 보면, 말과 진심의 괴리로 혼란스러워 하는 시니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후배가 자신보다 늦게 출근하면 불편하세요?" 같은 도발적인 질문들에 대해 극구 본인은 꼰대가 아니라고 부인하다가도,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우리네 상사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유쾌 발랄하게 담아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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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DI 레트로 감성의 화룡점정은 '탑골 영상' 시리즈다. 삼성SDI가 창사 50주년을 맞아 제작한 것으로 유추되는 '탑골 영상' 시리즈에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1990년대 삼성SDI 임직원들의 야유회·체육 대회·휴가 풍속도가 낱낱이 기록돼 있다. 삼성SDI 부장님들의 한창때 춤사위와 당시 체육 대회 종목에 통나무 썰기가 있었던 것 등을 알 수 있다.
모범생의 유튜브, LG화학
SK이노베이션과 삼성SDI가 다소 파격적인 콘셉트로 승부수를 띄웠다면, LG화학 유튜브는 모범생의 답안에 가깝다.
LG화학의 유튜브 콘텐츠는 화학 업계의 'EBS'로 불릴 만큼 정보 전달에 충실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경쟁사 관계자가 "LG화학 유튜브 영상을 보고 LG화학의 배터리 기술을 이해하게 됐다"라고 귀띔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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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배터리부터 폐플라스틱 활용 기술, 미국 환경보호청(EPA)으로부터 친환경을 인정 받은 제초제 '테라도'까지 주력 사업들을 자세히 설명한 영상들이 눈길을 끈다. 뉴스만 봐서는 한번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핵심 기술·의미·맥락 등이 영상에 담겼다. 전체적으로는 친환경 기조를 강조하는 뉘앙스다.
이외 LG화학은 현안 해설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한 배경이나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 법인 설립 등을 다룬 영상들의 경우, 이례적으로 2만~3만대의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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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 대학생 에디터들의 영상은 교육 방송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방불케 한다. 대외 활동에서 마주칠 법한 정갈한 차림새의 대학생들이 청춘의 풋내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달걀 껍데기를 활용해 흰 셔츠를 세척하는 방법과 성인 기준 1일 평균 권장 칼로리만 섭취하고 하루를 버텨 보는 것,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실천, 비건(채식주의) 도전기 등을 소개한다. 알아 두면 쓸모 있는 신비한 생활 화학 콘텐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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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직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도 점잖다. 최고 수위의 '드립'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에 그친다. 게다가 LG화학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클릭했는데 중후반대부터는 기술 관련 내용이 나오는 영상들이 많다.
다른 업체들의 유튜브 댓글 창에 'ㅋ'이 난무했다면, 단언컨대 LG화학 채널에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의 비율이 가장 높다.
LG화학의 유튜브 경우 전반적으로 파격(이라고 쓰고 광기라 읽는다)은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맛이 일품이라는 평가다.
이제 유튜브는 재계에서 홍보의 핵으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더구나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경영에 역점을 두고 그 가치를 인정 받기를 원하는 추세에서, 감성과 정보를 적절히 활용한 홍보는 다양한 세대를 불러들일 전망이다.
일터는 고단한 곳인데, 왜 사람들은 직장인 브이로그를 검색하고 기업의 콘텐츠에서 웃음을 찾으려 할까. 재계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콘텐츠의 매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각 기업의 유튜브 역량에 시선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