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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동아일보

‘부어라, 마셔라’ 시대의 종말

집단주의식 폭탄주 문화 저물고

술의 맛-향 즐기며 위스키 인기

소주도 취향껏 즐겨보면 어떨까


이전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위스키를 즐겨 마시고 선호하지만 위스키가 다른 주류들과 비교해 가진 장점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짜릿함을 전해주는 강한 알코올 도수와 반비례하는 그윽한 향이 매력적이며 다른 주류에 비해 증류주라서 숙취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듣게 되는 위스키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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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툴러모어 위스키 숙성 창고.

우리가 가장 많이 마시는 희석식 소주와 비교하면 위스키의 특징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최초로 출시된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35도였으나 최근에 주로 판매되는 소주는 15도 내외의 알코올 도수로 사실상 발효주보다도 낮은 도수이다. 이러한 점에서 위스키는 알코올 도수가 비슷한 보드카나 중국의 바이주, 혹은 일본의 쇼추와 함께 증류주로서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희석식 소주의 완벽한 대체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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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트레이스 숙성 창고. 버팔로트레이스 제공

알코올 도수가 비슷한 대체재 중에서 위스키만이 가진 매력은 바로 오크통에서의 장기 숙성을 통해 만들어진 그윽한 향과 풍부한 맛, 이를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황금빛이다. 사실상 위스키는 장기 숙성을 하는 유일한 증류주이다. 중국의 바이주나 우리나라의 전통식 증류주, 보드카 등 대부분의 다른 증류주는 숙성 자체를 하지 않거나 몇 개월 정도의 단기 숙성으로 만들어진다. 최근에는 장기 숙성 대열에 합류하는 증류주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수백 년 장기 숙성의 전통을 가진 위스키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도성장기 동안 많은 양의 위스키를 빠른 시간 내에 마시는 집단주의식 폭탄주 음주 문화가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개인적 행복추구 의식의 발달로 음주문화도 취향과 주량에 맞춰 즐기는 형태로 많이 변했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확산된 홈술문화로 인해 많은 이가 위스키를 가까이하며 그 맛과 향을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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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사이드의 크레이겔라키다리.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발효주를 만드는 효모는 원재료의 당분을 먹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그 발효가 이뤄지는 알코올 도수 18∼19도가 효모의 생존 상한선으로, 그 이상이 되면 알코올과의 삼투압 작용으로 대부분 사멸한다. 따라서 와인이나 사케 같은 발효주는 17∼18도를 넘지 못하는데 명색이 증류주인 소주가 요즘 15도 이하로까지 내려간 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은 것이다. 다른 증류주는 차치하고 같은 소주가 생산되는 북한을 보면 대표적인 증류주인 평양주가 30도와 40도, 그리고 이를 대중화해 국주로 불리는 25도의 평양소주가 있다. 일본의 소주 역시 대부분 25도 이상의 선을 지키며 그 어느 나라보다도 고도주를 선호하는 중국은 모든 증류주의 출발선이 30도 이상이라 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나라에서나 술꾼들은 술에 대한 각자의 호승심이 있다. 북한, 중국, 일본에서는 그 호승심을 알코올 도수로 표현하려 하는 반면에 우리는 마시는 술의 양으로 그 호승심을 발휘하려 한다. 그러한 이유로 오피스가 밀집한 시내의 저녁 식사 자리 삼겹살 불판 옆에는 예외 없이 빈 소주병 여러 개가 줄 세워져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호승심은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소주의 도수가 25도라 소주 한두 병 정도로도 충분히 채워졌지만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소주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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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파클라스 증류소 전경.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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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증류소의 증류기.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술꾼의 나라다. 술깨나 마신다고 알려진 러시아나 아일랜드, 동유럽 모든 나라보다 우리나라는 증류주의 출하 절대량이 크게 앞선다. 증류주의 출하량은 전 세계 1위가 진로이고 2, 3, 4위인 다른 증류주와는 3배가량의 압도적인 격차를 나타낼 정도로 대단한 물량의 희석식 소주가 출하된다. 물론 알코올 도수를 감안하면 그 차이는 줄어들 것이나 여전히 1위임에는 틀림없다.


진로의 경우 2021년 통계로 약 9억 L를 출하했으니 2홉들이 한 병 기준으로 약 25억 병이 출하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음주 인구를 넉넉하게 약 2500만 명으로 봐도 이 정도면 1인당 연간 100병 수준이다. 물론 여기엔 수출이나 다른 용도까지 포함돼 있지만 진로라는 단일 브랜드가 이 정도이니 그 양이 어찌 됐든 대단히 많은 것이다. 다른 브랜드의 소주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제 우리의 술에 대한 호승심을 다른 방향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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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의 템플바. 박병진 칼럼니스트 제공

술에 대한 이러한 호승심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나는 꼭 위스키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존재하는 한 소주의 존재 이유는 명확하다. 힘든 날, 삶의 애환을 달래는 방식은 개개인마다 다르니 각자 자신이 원하는 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주량에 맞춰 마시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또한 이제는 소득 수준의 상승으로 전통주를 포함한 다양한 술에 대한 발굴과 재인식이 이뤄지고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해외로부터 여러 주종까지 속속 한국 시장으로 진입하고 있으니 선택의 폭 또한 충분히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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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진 칼럼니스트

다행히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음주문화가 형성돼 삼겹살집에서도 하이볼까지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됐고 원하는 술을 가져와 같이 즐기는 콜키지 가능 식당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으니 조금 더 기대를 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술 권하지 않는 사회로의 전환기는 우리 세대의 말미에서 마무리될 것 같다.


영미의 위스키 병에는 대부분 ‘Drink Responsibly(책임질 수 있을 만큼 마셔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예전에는 좀 더 직설적인 ‘Know Your Limits(주량껏 마셔라)’ 문구가 사용됐다. 나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한다.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자신만의 술을 즐기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마시자. Know Thyself! 너 자신을 알라!


박병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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