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빠질까봐 울음도 참아”…클럽보다 헬스클럽이 좋은 ‘헬창’ 밈 유행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 방송화면 |
“통장 잔고 빠지는 것보다 근육 빠지는 게 더 무서워요.”
바야흐로 때는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근육을 뽐내던 권상우를 필두로 비, 이효리의 폭발적 인기는 얼짱에 이어 몸짱 열풍을 불러왔다. 너도 나도 몸매 가꾸기에 열을 올리던 몸짱 신드롬은 육체·정신 건강의 조화를 추구한 웰빙, 힐링 바람에 차츰 스러졌다. 수 년 전부터는 건강을 해칠 만큼 체중 감량에 몰입하거나 근육 불리기에만 집착하는 이를 일컬어 ‘헬창(중독 수준으로 헬스에 매달리는 사람)’이란 단어까지 탄생했다.
하지만 최근 ‘헬창’은 하나의 유머코드이자 ‘밈(meme·출처를 알 수 없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나 콘텐츠)’이 되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 스스로 헬창임을 고백하며 라이프스타일을 공개하고 ‘자학 개그’ 소재로 헬창을 활용해 콘텐츠 생산 주체로 나선 것. 한때 비하나 멸시가 강했던 단어의 어감도 긍정적으로 완화돼 일반인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서로 “득근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며 몸을 만드는 헬창들의 철저한 생활수칙과 신념은 때때로 대중이 경탄하는 수준이다.
‘헬창’ 밈의 기원은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 유머 게시물이 시초다. ‘근손실(근육이 빠지는 현상)’을 극도로 경계하고 삶에서 헬스 트레이닝을 최우선하는 ‘헬창 인지감수성’이 주된 유머코드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근손실이 올까봐 울음도 참는다”는 글에 “운구할 때 관을 들어 리프팅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댓글이 달린다. 단순덧셈을 할 때는 운동기구에 있는 쇠 바(Bar)의 무게(약 20kg)를 자동적으로 고려해 “20+20=60”이 된다는 식이다.
‘언더아머 단속반’도 화제였다. 3대 운동(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쿼트)의 중량 총합이 500kg를 넘지 못하는 사람이 언더아머 의류의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으면 이를 단속한다는 개그다. 미국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유행한 ‘1000파운드 클럽(약 450kg)’에서 비롯됐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운동한 적이 있다” “운동하는 꿈을 꾼다” “클럽보다 헬스클럽이 좋다”는 헬창 체크리스트도 인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이 불러온 헬스장 운영 중단은 의도치 않게 헬창들을 유튜브로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 가장 주목받은 이는 스스로 ‘타락 헬창’이라는 구독자 53만 명의 유튜브 채널 ‘핏블리’다. 전형적인 운동 콘텐츠를 소개하던 그는 9월 초부터 헬스장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이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먹방’ 콘텐츠가 대박이 났다. 피자, 치킨, 치즈볼 등 평소에 입에도 안 대던 고열량 음식을 삼키며 “이래서 회원님들이 식단관리를 못했구나” “이런 속세의 맛이 있는 줄 몰랐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타락해버린 그의 모습에 구독자들이 열광했고, 급기야 닭가슴살 치즈볼 등의 광고 촬영까지 이어졌다.
구독자 요청으로 제작한 한 보디빌더의 라면 먹방도 화제다. 스프를 넣지 않은 라면과 삶은 달걀 30개의 흰자를 먹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반인륜적” “식욕이 사라지는 신기한 먹방”이라거나 “존경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회수는 약 120만 회에 달했다. ‘가짜사나이’를 방송한 유튜브 ‘피지컬갤러리’의 김계란도 유명하다. ‘헬창의 삶’ 시리즈는 평균 조회수 200만 회에 육박하며, 웹툰도 제작했다. 실내 헬스장이 문을 닫자 “근손실이 두렵다”며 산, 한강, 공원 운동기구를 찾아 나서 야외 헬스장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다.
방송가에서도 이들은 러브콜을 받는다. 최근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한 김종국, 박준형, 김계란이 시종일관 서로의 운동 얘기에 공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비싼 옷은 필요 없다. 반발, 반바지만 있으면 된다”거나 “디즈니랜드보다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가 좋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헬창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퍼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근육질 몸매 인증 사진을 올리며 ‘근육질=남자’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운동하는여자’ 해쉬태그를 단 게시물은 900만 건이 넘는다.
이 같은 헬창의 트렌드는 운동의 일상화와 밈 놀이문화가 결합된 산물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일상, 패션에도 운동 열풍이 스며들어 ‘헬창’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표준어처럼 쓰이고 있다”고 분석했으며 “유튜브, SNS의 빠른 전파 속도로 인해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하나의 밈으로 몰려갔다가 또 다른 밈으로 향하는 ‘롤코족’이 대세”라고 분석했다.
‘땅끄부부’ ‘말왕’ ‘흑자헬스’ 등 수십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의 성공에 컬트적 밈이 더해진 독특한 인터넷 놀이문화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엔 코로나19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홈트레이닝이 유행이 된 점도 인기에 한몫했다. 실제 네이버, 카카오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헬창 관련 데이터는 단어가 대중에게 쓰이기 시작하던 2018년에 비해 코로나19 이후 3~4배 이상 많이 검색됐다.
헬창 열풍에서 비롯된 ‘덤벨 경제’의 성장에 유통업계도 반응 중이다. 프로틴이 함유된 간식 박스, 프로틴 함유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커피, 베이글 등이 연달아 출시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며 “지난해 500억 원 수준이던 단백질 관련 식품 시장 규모는 올해 1000억 원 수준으로 커질 전망이며 업체 간 신제품 경쟁도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