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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도 火魔와 18시간 사투' 소방대원들 "이런 큰불은 처음"

"여기 불씨 있다. 소화액 살포 준비해. 잔불 전부 확인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5일 오전 10시 화마(火魔)가 쓸고 지나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리 마을. 고성소방서 소속 박우현(39) 소방관이 잔불을 잡기 위해 약 12kg 무게의 소방 호스를 들고 분주히 뛰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발견하자, 소화액을 뿌려 불씨를 잡았다. 마을에 있던 주택과 창고는 대부분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상황. 불이 붙은 지 7시간이 지났지만 마을에는 역한 유독가스 냄새와 연기가 자욱했다. 박 소방관의 노란 작업복에 묻은 시커먼 재는 전날 밤 화마와 벌인 사투(死鬪)의 흔적이었다.


박 소방관은 전날 저녁 8시쯤 속초에 있는 청대산에 처음 투입됐다. 불길이 더이상 북쪽으로 번지지 않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는 "강한 바람에 불똥이 날아가 새로운 산불을 만드는 ‘비화(飛火)’ 현상 때문에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18시간째 작업 중인데 힘든지도 모르겠다. 오전 내 잔불을 모두 정리하는 게 최우선 목표"라고 했다.


이날 새벽 고성소방서를 비롯한 속초·인제·강릉·동해 지역 소방관은 전원이 투입돼 밤새 산불 진화에 나섰다. 깜깜한 밤에다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헬리콥터가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방관들은 방화복과 방독면에 의지해 1200도의 불길에 맞섰다.


속초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방독면을 쓰고 시뻘건 화마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이 아니었으면, 동네가 통째로 타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라며, 소방관이 지나가자 박수를 쳤다.


속초소방서는 폭발의 위험이 있는 ‘LPG충전소’ 지키기 임무도 맡았다. 충전소가 폭발할 경우 매립된 가스관마저 폭발할 수 있어, 대형 재난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소방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불길을 막는 상황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충전소를 지키기 위해 소방차 2대가 앞뒤로 달라붙어 소화액을 뿌리는 사진이 회자됐다. 네티즌들은 "눈물이 난다" "소방대원들이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오전 재난상황본부가 마련된 고성군 토성면사무소에는 밤새 진화 작업을 한 소방관 열댓 명이 교대 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웅크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상황실 구석에 쪼그린 채 눈을 감고 있던 고성소방서 이현주(32) 소방관은 "소방대원이 된 지 4년째인데, 이렇게 큰 불은 20년 선배들도 처음 본다고 했다"고 했다.


이어 "야지(野地)가 많은 봉포리 근방에서 오후 9시부터 불기둥이 초당 몇 백m씩 아래로 내려왔다"며 "순식간에 불이 마을로 내려왔는데, 무조건 마을은 지켜야겠다는 생각해 소방호스를 잡았다"고 했다. 재가 검게 묻은 방화복을 입고 있는 이씨를 보고 시민들은 ‘수고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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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속초 일대 산불 이틀째인 5일 오전 동해 망상오토캠핑장 인근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소방서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연합뉴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산불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고성소방서·속초소방서 소속 의용소방대 450명도 발 벗고 나섰다. 고성군 토성면에 사는 의용소방대 김중현(47)씨는 지난 4일 오후 7시 19분 처음 화재가 발생하고 채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이 도로변까지 옮겨 붙는 것을 목격했다. 그 순간 고성소방서에서 ‘긴급 투입’ 연락을 받고 불이 난 일성콘도 인근에 배치됐다.


김씨의 코끝은 재 가루가 묻어 거무튀튀했다. 김씨는 이날 오전 6시까지 이곳에서 소방관을 도와 현장 정리와 피해자 파악에 나섰다. 김씨는 이날 오후에도 서울·경기·부산 등 각지에서 모인 소방관에게 주변 지리와 피해 현장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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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새벽 강원 속초 화재를 진화하고 돌아온 속초소방서 대원들이 방화복을 널어놓은 모습. /최지희 기자

소방청은 지난 4일 오후 9시 44분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는 고성 산불에 대해 '최고수준'인 대응 3단계를 발령하고 전국에 소방차 출동을 지시했다. 총 3251명의 소방인력과 872대의 소방장비가 출동했다. 화재 대응 1단계는 국지적 사태, 2단계는 시·도 경계를 넘는 범위, 3단계는 전국적 수준의 사고일 때 발령한다. 소방청 관계자는 "전국 18개 시·도 전체 소방력의 약 30%가 강원 산불 현장에 집결했다. 이는 소방 출동 역사 이래 사상 최대 수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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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전날 강원 강릉시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인근 동해시 망상해수욕장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소방대원과 진화대원들이 화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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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전날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서 시작된 산불이 번진 속초시 장천마을에서 완전히 타버린 가옥들 사이로 화재진압 작업을 마친 소방대원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성·속초=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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