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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만난 ‘작은 스페인’… 3㎞ 성벽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났다

16세기 성곽 도시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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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 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카사 마닐라엔 스페인 전통 안뜰 구조인 ‘파티오’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솔레어리조트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고층 빌딩들을 지나 파시그강(江) 남쪽 강변에 다다랐을 때 성인 키의 5~6배에 달하는 성벽과 마주했다. 돌로 쌓은 견고한 성벽이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로 들어서는 길이다. 인트라무로스는 스페인어로 ‘안쪽’이라는 인트라(Intra)와 ‘벽’이라는 무로스(muros)가 합쳐진 말로, ‘성 안에서’라는 뜻이다.


1565년 필리핀을 정복한 스페인은 1571년, 3.4km에 달하는 벽을 세워 20만평 규모의 거대한 성곽 도시를 만들었다. 16~19세기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은 300여 년 동안 인트라무로스는 필리핀의 문화,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다. 스페인 사람과 스페인계 혼혈, 상류층만 살 수 있었다. 아픈 역사이기도 한 스페인의 흔적들을 마닐라는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인트라무로스에서 ‘작은 스페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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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거스틴 성당은 전쟁과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기적의 교회’다. 예배당엔 16세기 샹들리에가 빛나고, 결혼식을 위한 하얀 실크 장식이 너울거리고 있다. /이슬비 기자

◇'기적의 교회’ 성어거스틴 성당

인트라무로스 남쪽에 있는 성어거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은 마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다. 돌로 만든 외벽은 세월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상처가 났지만 그마저도 아름답고 반듯하며 굳건한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이 성당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스페인풍으로 설계된 최초의 바로크 양식 석조 건물이다. 스페인은 1571년 대나무와 야자수로 만든 교회당을 루손섬에 처음 지었지만, 화재로 무너졌고 같은 자리에 지은 두 번째 성당마저도 불에 탔다. 이후 1587년 지금의 자리에 석조로 짓기 시작한 성당은 20년 뒤인 1607년 완공됐다.


성당 내부는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 그 자체였다. 성당 한가운데 서서 고개를 들자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저것이 16세기 샹들리에라니, 믿기지 않았다. 갓 새로 단 듯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둥근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튀어나올 것처럼 살아 있었다. 이 그림들은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이 있는 착시를 일으키는 ‘트롱프뢰유(Trompe-l’oeil)’ 기법으로 그려졌다. 성당을 내부를 보던 관람객들 사이에서 수시로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성어거스틴 성당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단순히 ‘오래됐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인트라무로스 대부분이 파괴됐지만, 이 건물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닐라에 닥친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은 이 성당을 ‘기적의 교회’라고 부른다. 성어거스틴 성당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국민 83%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성어거스틴 성당은 예비 부부들에게 단연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꼽힌다. 지난달 7일 토요일, 마침 이 교회에서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마닐라의 햇살을 받은 흰 실크 장식이 화사하게 반짝이며 신랑 신부를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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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에 지어진 마닐라 대성당은 웅장한 외관을 자랑한다. 성당 정면 벽면에는 6개의 흰색 성인 조각상이, 건물 꼭대기에는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필리핀 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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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 귀족들의 삶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 필리핀 상류층 귀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카사 마닐라(Casa Manila)에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카사 마닐라는 ‘마닐라의 집’이라는 뜻으로, 인트라무로스 안에 있는 16~19세기 필리핀 상류층의 저택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박물관이다.


3층짜리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수백 년 전 유럽의 어느 대저택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응접실에 있는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함께 금박을 입힌 가구들, 장식품들이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짐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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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마닐라의 고풍스러운 가구들은 당시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필리핀 관광부

견고한 목재로 만들어진 식탁은 20명이 앉아도 넉넉할 정도로 길었다. 식탁 위에 달린 고풍스러운 커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커튼에 달린 끈을 당기면 커튼이 앙옆으로 움직이면서 이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선풍기가 없던 시절, 동남아의 열기를 잠시라도 식혀 줄 수 있는 수동 선풍기를 천장에 달아놓은 셈이다.


스페인 전통 안뜰 구조인 ‘파티오’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파티오는 ‘ㅁ’자 형태로 집을 만들고 가운데 정원을 꾸미는 주택의 안뜰을 말한다. 안뜰에 핀 화초들은 흰색 돌벽에 대비돼 더 화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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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old) 마닐라’로도 불리는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는 길, 파란 트램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이슬비 기자

◇산티아고 요새의 독립 영웅

“한국의 독립 영웅은 누구인가요? 필리핀의 독립 영웅은 바로 리살입니다.” 산티아고 요새에 들어서기 전, 안내하던 가이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산티아고 요새는 스페인에 저항했던 필리핀 독립 영웅 호세 리살(Jose Rizal)이 사형 선고를 받기 전까지 수감됐던 곳이다.


리살은 필리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의학을 공부한 인재였다.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가 민중 폭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1896년 공개 처형됐다. 당시 나이는 서른다섯 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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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을 지배한 스페인은 3.4㎞ 성벽을 쌓아 거대한 성곽도시를 만들었다. 1593년 지어진 산티아고 요새에서 필리핀 독립 영웅 호세 리살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청년은 처형장으로 가면서 ‘나의 마지막 작별’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중략) ‘잘 있거라, 서러움 남아 있는 나의 조국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조국을 두고 처형장으로 가는 리잘의 절절한 심경이 전해진다.


산티아고 요새는 스페인 점령 당시 초대 필리핀 총독인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1593년 만들었다. 스페인은 1565년 필리핀을 정복했고 300년 넘게 통치했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으로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후 1943년엔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한다. 1945년이 돼서야 미군이 재탈환했고 비로소 완전히 독립했다.


요새는 전쟁을 겪을 때마다 스페인의 군대 기지, 미 육군 본부, 지하 감옥 등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일본군은 요새 지하 감옥을 포로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장소로 썼다. 300㎡(약 90평) 남짓한 공간에 시신이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산티아고 요새에는 스페인뿐 아니라 미국,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요새 앞에 있는 십자가가 그들의 혼을 위무하고 있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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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솔레어 리조트에서 열린 K치맥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치맥 빨리 먹기 대회’ 장면. 한국 대표도 참가했지만, 필리핀 사람들의 유난한 K치킨 사랑에 우승 자리를 내줘야 했다. /솔레어리조트

◇필리핀의 남다른 한국 사랑

비슷한 아픔이 있어서일까. 필리핀 사람들의 한국 사랑은 남다르다. 한·필리핀 수교 75주년인 올해 수도 마닐라에서는 한국을 테마로 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마닐라베이에 휴양단지에 있는 솔레어리조트는 지난달 K팝과 K푸드를 즐길 수 있는 ‘K위크’ 기간에 리조트를 ‘작은 한국’으로 꾸몄다.


지난달 7일, K위크 시작을 알리는 ‘K치맥 페스티벌’에는 1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한국 치킨과 맥주는 물론 떡볶이, 납작만두, 부침개에 신라면까지…. 이곳은 한국 뒷골목 포차를 방불케 했다. 김치, 감자, 해산물, 애호박, 표고버섯 등 원하는 재료로 만든 한국 부침개와 소면, 당면, 라면 등 3가지 종류의 면과 김치 앞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요? 삼겹살에 소맥!” 마닐라에 사는 조애나(34)씨는 작년 한국 여행 때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소맥’이 자꾸 떠올라 이날 페스티벌에 왔다고 했다. 조애나씨는 이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복숭아 소주, 칠성 깔라만시 소주, 소맥을 연신 섞어 마시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조이 와스머 솔레어리조트 홍보실장은 “아시아권에서 K문화는 트렌디하고 대중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다”면서 “마닐라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으로 알려져 있는 리조트 내 한식 레스토랑 ‘기와’는 주말엔 예약 없이는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했다.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하지만 솔레어 리조트는 사실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Forbes Travel Guide)로부터 8년 연속 5성급으로 선정된 고급 리조트다. 객실엔 마닐라 베이 뷰가 펼쳐지고, 야외 수영장, 바, 스카이라운지, 실탄 사격장도 있다. 4시간의 짧은 비행 시간으로 한국 같은 편안함과 동시에 럭셔리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리조트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라이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필리핀 현지 가수가 바에 들어서는 한국인들을 보고 싱긋 웃더니 나지막이 다음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또박또박 들려오는 한국말, 가수 노사연의 ‘만남’이었다. 현지 가수는 한국 노래가 좋아 발음을 수도 없이 고쳐 가며 연습했다고 한다.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노래가 끝나갈 때쯤에 리조트는 한국인들의 ‘떼창’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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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필리핀 마닐라 솔레어리조트에 있는 ‘깐부치킨’을 찾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다. 깐부치킨이 지난해 10월 낸 첫 해외 매장이다. 그들은 “K치킨은 단순한 닭 튀김 그 이상”이라고 했다. /이슬비 기자

[그 치킨집 해외 1호점은 왜 마닐라에 있을까?]

필리핀 마닐라 솔레어리조트에서 한국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큼직하게 ‘깐부치킨’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말인 지난달 6일 저녁 필리핀 손님들이 이 매장 앞에 200m쯤 줄을 늘어섰다. “한국식 치킨은 단순한 닭튀김 그 이상이에요. 마닐라에서 치킨과 함께 떡볶이와 어묵탕도 맛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죠.” 필리핀 케손시티에서 왔다는 제인(40)씨는 ‘치맥’ 맛에 반해 한 달에 한 번은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한국 치킨 브랜드 깐부치킨은 지난해 10월 해외 첫 지점으로 필리핀 마닐라 솔레어리조트를 선택했다. 깐부치킨은 왜 하필 이곳에 해외 1호점을 냈을까.


솔레어리조트는 마닐라 베이에 조성된 대규모 휴양 단지인 엔터테인먼트 시티에 2013년 3월 처음 문을 열었다. 리조트는 명품 브랜드 41개, 레스토랑 17개가 입점해 ‘핫플레이스(명소)’로 자리 잡았다. 2200명까지 수용 가능한 그랜드볼룸에서는 세미나와 각종 연회가 열리고, 1740석 규모의 ‘더 시어터(The Theatre)’에서는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발레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여의도 공원의 약 40% 크기에 달하는 초대형 리조트에 각종 놀거리가 넘쳐나다 보니, 800객실이 작년 한 해 83% 찼다고 한다. 깐부치킨 측은 마닐라뿐 아니라 아시아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이곳이 한국의 ‘치맥(치킨+맥주) 문화’를 알리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깐부치킨의 대표 프라이드 메뉴인 ‘크리스피 치킨’은 서울 어느 매장에서 갓 튀긴 치킨을 먹듯이 이질감이 없는 맛이었다. 간 마늘을 듬뿍 올린 ‘마늘 전기 구이’는 마닐라에서도 깐부치킨의 베스트 메뉴. 닭은 필리핀산, 소스 등 일부 가공품을 제외하면 모두 필리핀 식재료를 사용한다. 한국 분식 메뉴인 떡볶이, 오뎅탕도 인기다. 깐부치킨 관계자는 “한국 깐부의 맛을 최대한 구현하고 있다”며 “세계적으로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인 만큼 마닐라에서 확실한 K치킨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며 해외 진출의 초석을 다지겠다”고 했다.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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