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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입시학원 접고… 그는 왜 대한민국 최북단에 사과밭 일궜나

[아무튼, 주말]

전설의 입시학원 ‘글맥’ 창립자에서

농부로 변신 ‘애플카인드’ 김철호 대표

양구 펀치볼에 청년8명과 6만평 사과농장



강원도 양구 해안분지는 ‘펀치볼(Punchbowl)’로 더 유명하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이곳 지형이 넓고 우묵한 화채 그릇(펀치볼) 같다”며 붙여준 별명이다. 이 화채 그릇에 7년 전 사과 농장 하나가 들어섰다. 휴전선에서 불과 5km 떨어진 북위 38도17분13초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북단 사과밭이자, 축구장 25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6만평(19만8347㎡) 면적에 사과나무 1만5100그루를 심은 국내 최대 규모 단일 사과밭이다.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은 ‘애플카인드(Applekind)’. “사과에 빠진 종족”이란 뜻이다. 이들을 이끄는 ‘족장’ 김철호(67) 애플카인드 대표는 양구 출신은커녕 귀농 전 텃밭에서 상추 한번 키워보지 않았던 서울 토박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전설’이라 불린 고등학교 입시 학원 원장이었다. 그가 1995년 창업한 ‘글맥학원(현 G1230)’은 수도권에 7~8층 높이 캠퍼스 8개를 운영했다. 학생 1만2000여 명, 직원 700여 명에 학생 등·하원을 위해 대형 버스 40대가 매일 동원됐다. 최전성기였던 2006년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목고에 774명을 진학시켰다. 특목고 입학생들이 “너도 글맥 출신이야?”라는 첫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그러나 김 대표는 30여 년 운영해온 학원을 그만두고 귀농을 결심했다. 2012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강원도 인제 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귀농 4년 만에 다시 도전에 나섰다. 애플카인드를 설립하고 양구에서 사과 농사를 시작했다. “건강하고 맛있는 사과를 생산하고, 청년들이 행복을 꿈꿀 수 있는 농촌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비전에 세 아들을 포함해 청년 8명이 동참했다.


김 대표는 왜 잘되던 학원을 접고 사과 농사를 시작했을까. 캐나다, 중국 등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청년들은 양구에서 무슨 가능성을 봤길래 첩첩산중 펀치볼에 정착했을까. ‘사과족’을 만나러 지난달 31일 양구를 찾았다.


◇스트레스 풀기 위해 등산하다 사과 농사까지


김 대표는 “설 연휴 직전까지 정신없이 바빴다”고 했다. 애플카인드는 ‘사과다운 사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사과 상자를 열면 꽃처럼 화사한 향기가 피어 오른다. 과육은 이가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달기만 한 요즘 사과들과 달리, 상쾌한 산미가 단맛을 받쳐줘 맛의 균형이 이상적이다.


애플카인드 단골들은 “어렸을 때 먹었던 사과 같다”고들 한다. 김 대표는 “미리 돈을 내놓고 홍로·감홍·황금사과·후지 등 4가지 다른 품종 사과를 9월부터 12월까지 수확하는 대로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 ‘사과사색’에 가입한 분이 많다”고 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대한민국 대표과일 선발대회’에서 2021년 최우수상(장관상)에 이어 2022년 우수상(농촌진흥청장상)을 연달아 받았다.


-잘되던 학원을 접고 사과 농사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원장실 문을 누가 노크만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누가 그만뒀다’ ‘싸움 붙었다’ ‘학부형 항의 들어왔다’ 등 안 좋은 얘기만 들어왔다. 잊고 있던 등산을 다시 시작했다. 등산을 하다가 자연 속에서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했다. 일요일마다 산에 갔다. 하루 산에 다녀 오면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 됐다. 교직원들 데리고 백두대간 종주도 했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요일만 기다리며 사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가 들더라. 귀농을 결심했다.”


-아내가 반대하진 않았나.


“당연히 반대했다. 학원 정리해서 강남에 빌딩이나 한 채 사자는 아내에게 말했다. ‘월세나 받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 몇 년은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다음은 뭐가 있나. 그건 죽은 삶’이라고 설득했다. 새로 분양받아서 리모델링까지 완료한 은평 뉴타운 아파트를 처분하고 강원도 인제로 들어갔다.”


-인제에 연고가 있었나.


“전혀 없다. 서울 토박이라 농사 지어본 적도 없고, 나무나 꽃, 풀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앞으로 강원도 쪽이 살기 좋을 것 같았다. 특히 ‘해피 700′이라고, 해발 700m 언저리가 사람 살기 쾌적하다고 해서 그런 땅을 찾았다.”


-그리고 바로 사과 농사를 시작한건가.


“3년은 그냥 놀았다. 학원을 30년 운영했더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피폐해 있었다. 놀고 먹고 잠만 잤다. 이따금 지역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사 교육을 받기는 했다. 3년을 그렇게 하니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더라. 이제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농촌에 와 보니, 안전한 먹거리가 정말 없었다. 주변 농가에서 농약, 화학비료를 엄청 사용하는 게 보였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2016년 3월 애플카인드를 설립했다.”


-왜 사과였나. 그것도 대한민국 최북단 양구에서.


“우리나라 사과 주산지는 북상 중이다. 경북에서 강원도로 꾸준히 이동하고 있다. ‘대구 사과’는 옛말이다. 온난화가 지난 100년의 속도로 진행된다면 2060년 무렵 남한에서 사과 재배가 가능한 곳은 강원도 산간뿐이다. 애플카인드 사과밭은 펀치볼 서쪽 산자락 중턱 해발 520~610m에 있다. 일교차와 연교차가 크다. 여름에도 섭씨 30도를 넘는 날이 드물고, 바람이 많아 병충해 발생도 적다. 사과 재배 최적지로 꼽히는 이유다.”


-텃밭도 안 가꿔본 ‘초짜 농부’였는데 농사가 어렵진 않았나.


“시행착오가 엄청 많았다. 처음 심은 사과나무 중 20%, 그러니까 3000그루가 죽어서 파내고 다시 심어야 했다. 묘목을 제대로 심고 키우면 3년 후부터 사과가 열리는데, 비실비실하고 열매가 달리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서 전국 사과 재배 고수들을 찾아가 배웠다.”


-퇴비장이 인상적이다. 규모가 약 1200평(약 4000㎡)으로 엄청나게 크다. 퇴비장을 갖춘 사과 농장이 드물던데.


“사과 품질은 땅심에서 나오고, 땅심을 북돋는 방법은 퇴비가 최선이다. 밭에 깊이·너비 각 1m 고랑을 판 뒤 퇴비를 채우고 사과나무를 심었다. 퇴비장의 60%는 퇴비사, 40%는 후숙실이다. 퇴비사에서는 침엽수 우드칩과 쌀겨, 깻묵 등에 효소를 섞어 퇴비를 만든다. 105~120일 발효한 퇴비를 6개월 후숙해 나무에 뿌린다. 흙에 한약 찌꺼기·골분·어분·콩깻묵·게껍데기 등을 섞어 발효한 유기질비료, 유기오일, 강산성 액비도 생산한다.”


-‘애플카인드’란 이름은 누가 지었나.


“영국 ‘빅피시(Big Fish)’라는 회사에서 지어줬다. BI(브랜드 아이덴티티), CI(기업 아이덴티티) 분야에서 세계적인 회사다.”


-이 회사에 맡긴 이유는?


“국내 업체에 맡겨 보니 뭔가 공장 냄새가 났다. 우리나라 농장은 BI, CI 작업 의뢰가 드물다 보니 작업해본 회사가 없는 것 같았다. 영국에서 ‘리버퍼드 오가닉 팜’이란 곳에 간 적 있는데 거기 로고가 마음에 들어서 찾아보니 빅피시에서 한 거였다. 그래서 의뢰했는데 처음엔 거절당했다.”


-돈 주겠다는데 거절이라니.


“우리 정도 규모로는 안 된다고 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세계 시장에 나갈 꿈을 꾸고 있으니 꼭 도와주면 좋겠다고 매달렸다. 그들은 ‘왜 이걸 하려느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면서 삼성과 애플을 비교했다. 애플은 ‘왜?’가 있지만 삼성은 그저 애플에서 스마트폰이 나오니 따라 해 ‘왜?’가 없다, 그것이 애플과 삼성의 차이를 만든다고 하더라. 그 ‘왜’를 설명하느라 아주 애먹었다(웃음). 그렇게 우리 얘기를 경청하더니 ‘정말 사과에 혼을 바친 사람들이’라면서 맨카인드(mankind)에서 따온 애플카인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거절이란 ‘굴욕’까지 당하면서 브랜딩에 집착한 이유가 있나.


“다이아몬드 반지는 종로에서도 팔고 티파니에서도 판다. 같은 다이아몬드이지만, 가격은 엄청 차이 난다. 원석이 다른 것도 있겠지만, 티파니는 로고·패키지 등 브랜드를 고급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받을 수 있는 거다. 우리는 친환경으로 사과를 생산하기 때문에 싸게 팔 수가 없다. 사과 품질에 걸맞게 고급스럽게 만들어서 제값을 받아야 한다.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도, 수출을 위해서도 세련된 브랜딩이 중요했다.”


◇대학 졸업장 없는 전설의 입시학원 대표


서른 살 때부터 학원 사업을 했다는 김 대표는 “평생 입시 학원을 운영했지만 대학은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달까(웃음). 가정 형편도 그렇고 해서 대학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학원 사업을 시작했을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다녀와 우유 배달 등 별의별 일을 다 했다. 그러다 학원을 운영하던 친척을 도와드렸다. 거기를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공부하기 어려워하는 애들의 심리를 해결해줄 수 있겠다’ 싶어서 학원을 차리고 강사를 고용해 수업을 시작했다. 13평짜리로 시작한 게 그렇게 커졌다.”


-공부 못하는 애들의 심리를 어떻게 해결해주나.


“흔히 ‘일타 강사’다 뭐다 하며 유명 강사들이 강의를 하잖나. 이런 분들이야 화려하게 강의만 하고 나면 끝이지만 학생은 그게 아니다. 강의 내용을 자기 걸로 만들어야 진짜 내 공부가 되는데, 그런 과정이 쉽지 않다. 공부 잘하는 소수는 알아서 하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못 한다. 우리는 ‘자습’을 키워드로 삼았다. 자습을 통해 공부한 것에 대한 자기 내면화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봤다. 공부하는 습관을 형성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1시간 강의를 들으면 1시간은 자습하게 했다.”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기 쉽지 않을 텐데.


“당연히 아이들은 자습을 싫어했다. 몸을 비비 꼬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부모들도 ‘애들 데려다놓고 뭐 하는 거냐’며 항의했다. 하지만 차츰 ‘이 학원에서는 자습해야 돼’라는 소문이 퍼졌다. 3년을 버티니 학원 문화가 됐고, 습관이 되니 아이들도 조용히 자습을 잘하더라. 주말에도 언제든지 학원의 빈 강의실에서 공부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줬다.”


김 대표는 학원을 단순히 공부만 시키는 곳을 넘어 전인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2005년 오페라 ‘투란도트’를 학생 600명에게 무료로 보여준 것도 그래서다. 미국 아티스트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으로 학원 버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왜 오페라를 관람시켰나.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첫 음악 시간인데 선생님이 노래를 하나 불러주셨다.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었을 거다. 처음 듣는 음악인데, 그동안 들었던 트로트나 대중가요와는 완전히 달랐다.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접했고, 좋아하게 됐다. 모두 그 선생님 덕분이다. 그러다 2005년 투란도트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저걸 본다면, 일부라도 어릴 적 나처럼 감흥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겠다.


“전교생을 데려가고 싶었는데, 비용이 너무 컸다. 그런데 포기가 안 되더라. 곰곰이 고민하다가, 정말 원하는 애들만 데려가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꼭 가고 싶은 학생은 시를 쓰든 사진을 찍어 오든 뭐라도 한번 해보라’고 공지했다. 어떤 애는 김밥에 밥알로 ‘투란도트’를 썼고, 10명이 팀을 만들어 ‘우리는 투란도트 가야 한다’는 현수막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별별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 나왔다. 선생님들이 심사해서 600명을 선발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억원 이상 들어갔다. 학원 운영하면서 제일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다.”


-버스에 키스 해링 작품을 붙인 이유는.


“버스 측면 광고는 중요한 홍보 수단이다. 명색이 교육기관인데, 교육적이고 고급스럽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명화(名畵)로 차별화하기로 했다. 학생들이 무심결에라도 보고 창의력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미국 뉴욕 에이전트를 통해 저작권료를 정식으로 지불하고 사용했다.”


◇비전 제시하면 청년들 농촌에 온다


‘청년이 행복을 꿈꿀 수 있는 농촌을 만들고 싶다’. 김 대표가 애플카인드를 설립하고 사과 농사를 시작한 이유다. 그 비전은 애플카인드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 현재 근무 중인 한국인 직원 8명은 모두 20~30대. 이들 중에는 김 대표의 세 아들인 대현(39)·두원(33)·중원(32)씨도 있다.


“아버지의 비전을 듣고 자발적으로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는 삼 형제 중 첫째 대현씨와 막내 중원씨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왔다. 둘째 두원씨는 국내 대학을 졸업하고 신한은행과 새마을금고에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애플카인드에 합류했다. 마케팅을 맡고 있는 박진영(35)씨는 중국 베이징대를 졸업하는 등, 해외 경험이 풍부한 직원이 상당수다. 김 대표는 “이런 직원들과 일하는 나는 지장(智將), 용장(勇將), 덕장(德將)보다 한 수 위라는 복장(福將)”이라며 뿌듯해했다.


-은행은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직장인데 왜 입사를 포기했나.


“은행권 있는 선배들을 만나보니 처음 10년은 재미있고 보수도 좋겠더라. 하지만 10년 지나면 내가 더 이상 쓸모 없어질 것 같았다. 처음에 힘들어도 여기가 더 비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두원)


-아내와 18개월 쌍둥이 등 온 가족이 여기서 함께 살고 있다고.


“아내도 이곳 생활을 반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려 한다. 중학교 때부터는 어찌 할까 고민이긴 하다.”(김두원)


-초등학교때까지는 시골 생활이 자녀 교육에 더 좋다는 뜻인가.


“디자인을 하든 뭘 하든, 자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감수성을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길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학생의 공부 실력은 엄마 실력’이란 말이 있다.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나온다는 얘기잖나. 초등학교 때 엄마가 신경 써서 상위권을 만들었다 치자. 하지만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공부 능력에 따라 떨어질 거면 떨어지고 올라갈 거면 올라간다. 학원을 운영해보니 공부 머리 없이 태어난 아이를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시키면 중고교 올라가면서 점점 공부를 하지 않더라. 어렸을 때는 공부시키지 않고 시골에서 그냥 놀게 하는 게 최고의 교육이다. 충분히 놀게 하고, 자연을 접하거나 책 읽기 같은 걸 풍부하게 해놓으면 초등학교 때 좀 떨어지더라도 중고교 올라가면 앞서갈 수 있다.”(김철호)


-대표님은 자녀를 그렇게 키우셨나.


“그러지 못했다(웃음). 나도 젊었을 때는 깨닫지 못했다. 학원 30년 해보고 나니까 알겠더라.”


-박진영씨는 베이징대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던데.


“청년들이 자유롭게 도전해볼 수 있는 곳이라 판단돼 5년 전 합류했다. 당시 애플카인드 사과가 식품 전시에 나가야 했는데, 준비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하게 됐다. 우리 제품에 대한 고객들 반응을 보면서 여기서 일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마케팅이 상품을 사람들한테 전달하는 것과 비슷하다.”(박진영)


-문화·의료·교육이 아무래도 도시보다 열악할 텐데.


“곧 태어날 둘째까지 포함해 가족 4명이 여기 살고 있다. 교육, 문화 환경이 좋다고 얘기할 순 없다. 다행히 서울과 접근성이 좋다. 한 달에 2번 정도 간다.”(박진영)


“문화 시설이나 교육, 의료 환경은 아쉽지만 도시와 농촌 양쪽을 완벽하게 호환할 방법은 없다. 궁극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다. ‘나는 불편한 것 못 참고 문화 시설도 풍부하고 쇼핑도 할 수 있는 도시가 좋아’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만끽하고 싶다면 시골이 나은 거고.”(김철호)


한겨울의 사과 농장은 한가롭지 않았다. 가지치기 등 올 봄 시작할 새 농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전성기에 도달하려면 7~8년이 걸린다”고 했다. 올해는 그가 애플카인드를 설립한 지 7년이 되는 해. 올가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릴 사과를 떠올리는지 가지치기를 하는 김철호 대표가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


[양구=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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