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해외 출장이 20년 열대 탐험으로…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았죠”
[아무튼, 주말]
솔로몬 벌목 사업의 신화
권주혁 전 이건산업 사장
솔로몬 제도. 우리에겐 두 어머니 사이에서 친모를 알아낸 ‘지혜의 솔로몬’보다 낯설고, 지구 온난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정도로 알고 있는 곳.
43년 전인 1980년, 국내 한 합판 회사의 말단 신입사원이 혈혈단신 이곳으로 향했다. ‘원목을 수입할 곳을 찾아내라’는 사장의 지시로 떠난 1주일 예정의 솔로몬 제도 출장은, 예상과 달리 20여 년이 훌쩍 넘는 초장기 프로젝트, 아니 초장기 열대 정글 탐험이 됐다.
솔로몬 제도를 둘러본 말단 사원은 당돌하게 “여기 외딴섬 한 곳을 사들여 우리가 직접 원목을 수출해야 한다”고 회사에 보고했다. 그리고 9년 뒤, 이 합판가공 회사는 솔로몬 제도 초이셸 섬에서 일본 등 선진국으로 원목을 수출하는 기업이 됐다. 말단 사원은 나중에 솔로몬 제도의 정부 관계자와 현지인들 추천으로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았다. ‘열대 자원 개척의 신화’로 불리는 권주혁(70) 전 이건산업 사장의 인생 스토리다.
권주혁 전 이건산업 사장이 영국 왕실에서 받은 대영제국 훈장(가슴)과 솔로몬 제도 정부가 수여한 십자 훈장(목)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20여 년간 열대를 탐험하며 벌목 사업을 개척한 그는 솔로몬 제도에 광범위한 조림 사업과 도로·병원을 개설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인터뷰 전 권 전 사장에게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으로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로 흐르는 해군가가 박력있게 들려왔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저서 10여권이 든 백팩을 매고 나타나 “서대문에 있는 집에서 걸어 왔다”고 말했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선 그에게 가방이 무겁지 않느냐고 묻자 “지금도 매일 2km를 달립니다. 허벅지 만큼은 20대 못지 않아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지인들은 “그는 3명 몫을 사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솔로몬 제도의 목재 자원을 개척한 전 기업가이자, 군사·국방계에서는 굵직한 전쟁사 책을 펴낸 군사학·전쟁학자로 불린다. 퇴직 후에는 세계 140국을 돈 여행가이자 시인,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권 전 사장이 솔로몬 제도에서 남태평양의 2차 세계대전 주요 전적지를 돌며 쓴 2차 대전사 서적 ‘헨더슨 비행장’은 2001년 해군사관학교 부교재로 채택됐다. 군인들 사이에선 필독서. 전쟁 관련 서적만 10여 종을 낸 그는 작년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정리한 ‘이것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를 출간했고, 지난 3월에는 개인 시집을 펴냈다. “기업가보다는 박사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그에게 칠순에도 쉼 없이 사는 이유를 묻자 “종교적 소명과 함께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주일엔 못 합니다” MZ도 울고 갈 쇠고집
-어릴 적 꿈이 기업인이었나요.
“아니에요. 남극점에 처음 도달한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 책을 읽은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탐험가가 되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부터는 군인에 더 끌렸고요. 월간지에서 ‘피에 젖은 과달카날’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기사를 보고는 ‘꼭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죠.”
-그런데 군인이 되진 않았군요.
“육군사관학교 입시 요강을 보니 2㎞ 달리기 테스트가 있었어요.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2㎞를 달리고, 집이 이태원이었는데 학교(용산고)까지 매일 걸어갈 정도로 준비를 했죠. 그런데 육사 시험이 하필 일요일인 거야. 제가 기독교인이라 주일에는 회사일을 포함해 사사로운 일은 하지 않는 게 성경 말씀이고, 지금도 그걸 지키거든요. 그래서 육사 시험을 포기했어요. 대신 서울대 건축과를 가려고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농대 임산가공학과를 가라’고 하시는 거야. 거기서 건축과로 전과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말 믿고 서울대 임산가공학과에 들어간 거예요.”
-이건산업에 입사한 것도 주일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군대 제대 후 대기업들 입사 시험을 보려니까 다 주일에 하는 거야. 그런데 신기하게 합판 목재 회사들은 평일에 입사 시험을 보더라고요. 운명이라는 느낌이 왔어요. 그런데 면접관이 ‘우리는 수출 기업이기 때문에 급하게 배가 들어와서 선적을 한다거나 하면 일요일에도 나와야 되는데 할 수 있냐’고 그래서 ‘나는 안 나갑니다’ 했어요. 그래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출근하라고 하더라고. 하하.”
-1978년에 입사하자마자 신혼이었는데 파푸아뉴기니로 유학을 갔더군요.
“돌아가신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은 미래를 내다보는 분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합판을 엄청나게 수출했는데, 원목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꽉 쥐고 있는 일본종합상사를 통해 들여왔어요. 당시 박 회장께서 ‘언젠가 목재 자원이 모자라면 일본 상사들이 파푸아뉴기니로도 갈 거다. 그걸 선점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알고 보니 제가 입사하기 전 이미 파푸아뉴기니 산림대학이 있는 불로로 마을을 찾아가 ‘우리 회사 사람람들 보내도 되냐’ 묻고 확답까지 받아놓으셨더라고요. 그곳에 사원들을 보내 공부시키면 파푸아뉴기니 산림청 공무원들이랑 같은 학교 출신이 될 테니까. 거기에 제가 가게 된 거예요.”
-열악하고 낯선 땅인데 두렵지 않으셨어요?
“제가 한때 탐험가를 꿈꾼 사람이잖아요. 하하.”
권주혁 전 이건산업 사장이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하는 도중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열대우림을 개척하고 대영제국 훈장까지
1년간 파푸아뉴기니 불로로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80년에 귀국하자마자 다시 출장길에 올라야 했다. 제2차 오일쇼크 여파로 원목값이 폭등하면서 국내 합판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생존 활로는 더 저렴한 원목을 구하는 것. 박 전 회장은 그에게 “당장 보따리 싸서 말레이시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에서 새 거래처를 찾으라”며 7000달러를 줬다. 그렇게 시작된 출장길은 20여 년이 넘는 열대 우림 자원 개척의 신화가 됐다.
-솔로몬 제도까지 가신 이유가 있나요?
“출장 지시 받고 나가려는데 회장님이 다시 불러세우더니 ‘파푸아뉴기니 옆에 솔로몬 제도도 한번 살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임야 자원이 풍부한 곳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지. 그런데 현지에 가보니 이미 비행기나 배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영국·호주 회사들이 다 선점을 했더라고. 우리한테는 직접 못 팔고 무조건 일본 종합상사를 거쳐서 사라는 거야.”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
“하늘의 뜻인지 솔로몬 제도 산림청장이 나랑 같은 불로로 산림대학 출신이더라고요. 같이 상의하다 보니 ‘직접 임야를 확보해서 원목 수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청장이 다른 나라는 들어가지 않은 초이셀 섬을 추천하더라고요. 직접 가보니 엄청 비싼 나무가 많은데, 영국인이나 외국인은 절대 못 올 거 같더라고. 도로가 1m도 없는 야생이니까(웃음). 그래서 벌목 사업을 하자고 본사에 강력하게 요청했는데, 신입사원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투자하자고 했으니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웃음). 다행히 박 회장이 저한테 ‘자신 있냐?’ 묻기에 ‘그렇습니다’ 답했더니 ‘그럼 해보라’며 단번에 허락하시더라고요.”
그래픽=송윤혜 |
-호언장담하셨지만 막막하셨을 것 같아요.
“초이셀 섬은 제주도보다 약 2배 넓은 섬인데, 150여 개 부족이 있었어요. 석기시대처럼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원주민들이 나뭇가지를 문질러 불을 피우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불로로 대학 다닐 때 ‘피진 잉글리시(남태평양 현지어와 영어가 섞인 독특한 현지어)’를 배웠어요. 통역 없이 부족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죠. 카누를 타고 섬을 돌면서 부족들을 찾아가 일일이 수출 계약을 맺은 거예요. 쌀이 없으니까 섬에서 나는 고구마를 구워 먹고, 카누에서 낚시를 해 물고기 먹고. 그렇게 계속 초이셀 섬을 돌면서 50여 개 부족을 설득하고 계약하는 데 5년 정도 걸렸습니다. 말라리아에 두 번이나 걸리고, 폭포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어요.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는 살이 20kg이나 빠지더라고요. ”
-초이셀 섬에 생선구이를 처음 전파했다고요?
“그곳 원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코코넛 물에 섞어 대충 끓여 먹더라고요. 내 입맛에는 영 비려서, 내장을 제거하고 장작불에 구워 소금을 뿌려먹는 생선 구이를 해줬더니 엄청 좋아하더라고(웃음).”
권주혁 전 이건산업 사장이 솔로몬 제도에서 벌목 사업을 개척한 초이셀 섬 원주민들과 2009년 2월에 촬영한 기념사진. 권 전 사장은 “나무만 베어 떠나는 외국 회사들과 달리 현지인의 마음을 얻고 지속 가능한 사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권주혁 제공 |
-당시에는 인터넷도 전화도 없었을 텐데요.
“서울로 편지를 보내면 한 달 걸렸죠. 수도 호니아라에서 초이셀 섬으로는 10명쯤 타는 경비행기로 오가는데, 중간에 경유하는 조그마한 섬에 우체국이 있어 간단한 메시지는 거기서 전보로 보냈어요. 보고서는 호니아라로 나와서 텔렉스로 보내야 했지요. 당시는 호니아라에도 전화가 수백 대밖에 없었어요. 내 숙소 전화번호가 123이었어. 전화가 몇 대 없으니까 가능한 번호인데,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받은 대영제국 훈장도 받으셨다고요?
“1989년부터 원목 수출을 하면서 외국 회사와 다르게 지속 가능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섬에 도로도 내고, 병원도 짓고. 나무를 베는 만큼 촘촘히 다시 심었습니다. 그렇게 사업을 하니 다른 섬인 뉴조지아섬에 솔로몬 제도 정부가 소유한 여의도 90배 면적의 조림지를 불하 받아 벌목·조림 사업을 더 확장할 수 있었죠. 제가 솔로몬 제도를 떠날 때쯤엔 1년에 나무를 100만 그루씩 심었어요. 거기 머물던 정부 관계자들이 감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영제국 훈장과 솔로몬 제도 십자 훈장을 받았지요. 저는 순수하게 회사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솔로몬 정치권에서는 저한테 ‘정계로 진출하라’는 제안까지 했었습니다(웃음).”
권주혁 전 사장은 지난 2015년 4월 솔로몬 제도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고생한 만큼 사장까지 승진하신 거네요.
“30년 넘게 회사를 다녀 보니 결국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학벌도 풍채도 아니고 ‘돈 많이 벌어오는 직원’이더라고요. 1995년부터 IMF 외환 위기까지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는데, 그때 솔로몬 제도 벌목 사업으로 정말 많이 벌었어요. 현지인들에게 소문날까 직원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킬 정도로요(웃음). 제가 주일에도 일을 안 하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아서 회사 상사들한테 훈계를 많이 받았어요. ‘과장 이상 가려면 술도 마시고 사회생활도 좀 해야 한다’고. 그때 저는 ‘저는 평생 사원이어도 괜찮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진급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사장까지 됐지요. 하지만 사장일 때도 ‘나는 영원한 과장’이라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탐험 중에도 쉬지 않고 읽고 쓰다
그는 솔로몬 제도에 머무는 동안에도 쉼 없이 책을 읽고 썼다. 호니아라에 있는 현지 서점과 헌책방 등 남태평양 일대를 돌며 3000여 권의 서적을 수집하고 10여 권의 전쟁사 서적을 썼다. 퇴직 후에는 경기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만 20권이다.
-일만 해도 바쁘셨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목사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 4시에 기도를 하게 했지요. 그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밤 10시 전에 자고 4시에 일어나요. 새벽에 달리고 2시간 정도 책을 쓰고, 퇴근하고 다시 2시간 정도 책을 쓰고. 기록하는 걸 워낙 좋아해 회사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써왔어요. 그렇게 40년 넘게 하니 책을 낼 수 있었지요. 남들은 TV도 없고 지루하다는 솔로몬 제도가 나는 오히려 좋더라고. 초이셀 섬 들어갈 때도 항상 책을 가지고 가서 손님들 묵는 풀잎으로 엮은 집에 텐트를 치고 석유 램프 2개를 켜놓고 읽었어요. 남태평양 일대 2차 대전 전적지를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좋았어요.”
-소장하신 책이 6000여 권이라고 들었습니다.
“솔로몬 제도에 있던 3000권은 도저히 한국에 둘 곳이 없어서 중요한 300권만 챙기고 나머지는 친하게 지낸 현지 장관에게 도서관에 기증하라고 줬습니다. 지금은 집에 3000권 정도 있는데 2000여권은 군사 분야 책이에요.”
권주혁 전 사장은 세계 140국의 전적지를 여행했다. 사진은 이스라엘 공군 박물관. /권주혁 제공 |
2019년 우크라이나 여행 때 촬영한 구소련 군함인데 제2 연평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과 동일한 포와 포탑이 장착돼 있다. /권주혁 제공 |
-퇴직 후에도 여전히 바쁘신 듯합니다.
“2009년 퇴직할 때도 사실 마음만 먹으면 10년 정도 더 있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평생 군인이 되지 못한 한에다 군사학과 전쟁학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 갈급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퇴직하고 야간 대학으로 경기대 대학원에 들어가서 군사학을 배운 거예요. 석사 2년, 박사 4년, 총 6년이 걸렸습니다.”
-주변에서 독특하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죠?
“주일 때문에 육사도 입사 시험도 포기하니까 친구들이 ‘융통성이 없다’ ‘또라이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마흔 살쯤 만나서 ‘아직도 주일 지키며 산다’고 하니 다들 ‘대단하다’고 평가가 바뀌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주일에는 절대 일을 안 했지만, 공휴일이나 심지어 추석·명절에는 회사에 나갔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쟤는 놀려고 주일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정말 독실한 신자라 그렇다’고 알아봐주더라고요.”
-죽기 전까지 200국을 여행하는 게 꿈이시라고요.
“지금까지 136국을 경험했어요. 대부분 보고 싶은 전적지들 보러 가는 거죠. 마음 같아선 유엔 가입국 193곳을 다 가보고 싶은데, 아마 150국쯤 여행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도 청년처럼 사시는 듯합니다.
“요즘 청년 세대가 힘든 건 잘 알지만, 보면 안타깝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편하고 안정적이고 돈 많이 주는 곳만 찾는 듯해서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열심히 좇아가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어려움을 극복해내겠다는 의지, ‘손에 흙 묻힐 각오’만 있다면 성공은 도처에 있습니다.”
작별 인사를 나누며 그는 “곧 손자와 함께 아라비아 반도 4국을 여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눈동자는 20대 청년처럼 반짝거렸다.
[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