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튽훈’이 되살려낸 김장훈… 환갑 가수에 10대가 열광한다

[아무튼, 주말]

조롱 덕에 제2의 전성기

중고생의 스타 된 김장훈

가수 김장훈(60)은 어느 순간 놀림감이 돼 있었다. ‘기부 천사’였고 ‘독도 지킴이’였으며 그래서 국민훈장까지 받았던 1세대 개념 연예인은 잇단 구설로 곤두박질쳤다. 세월호 단식으로 정부와 대치하고, 기내 흡연으로 벌금을 물고, 노무현 추모제 무대에서 경찰에게 화가 난다며 욕설을 해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다수의 히트곡과 전매특허 ‘발차기’로 관객을 사로잡던 공연의 장인은 몰락하고 있었다. 성대결절로 가창력마저 엉망이었다. 2019년, 이 무렵 등장한 모멸적 별칭이 ‘숲튽훈’이다. 김장훈의 한자 ‘金’과 ‘長’을 모양이 비슷한 한글 ‘숲’과 ‘튽’으로 바꿔 적은 이름. 망가진 김장훈, 그것이 곧 숲튽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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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쁘지 않았나요?

“전혀요. 대중 가수의 운명은 대중이 결정하는 거잖아요. 솔직히 노래 말고 딴 데 정신 팔려 있었어요. 지금은 제 인생 최고의 복이 숲튽훈이라는 생각까지 해요.”

–왜요?

“놀리려고 만든 건데, 이게 온라인에서 ‘밈’이 됐잖아요. 저 기괴하게 노래하는 영상 짜깁기해서 공유하고 손가락질하고. 근데 놀리다가 정들 줄 알았다니까요. 최근에 티켓 예매처(인터파크) 통계 보니까 제 공연 관객 절반이 10대랑 20대가 됐더라고요.”

김장훈은 숲튽훈 덕에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전국적 조롱 대상이 되면서 본의 아니게 세대를 통합(?)하는 온라인 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친근함을 느낀 중·고교생들이 그를 성대모사하고, 대표곡으로 고음 챌린지를 벌이고, 덕분에 2006년 발매한 ‘허니’가 올해 노래방 인기 순위 10위권에 재진입하는 성과까지 냈다. 그러자 김장훈은 지난 4월 아예 버추얼 유튜버 ‘숲튽훈’으로 데뷔해버렸다. “김장훈을 나잇값 못 하는 한심한 노인네로 여기면서도 그의 비범한 행적에 매료된”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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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추얼 유튜버까지 하시다니요.

“매주 두 번 생방송해요. 젊어진 기분이에요. 숲튽훈은 제 두 번째 자아예요. 자유분방하고, 변칙적이고, 얽매이지 않고. 그걸 대놓고 드러내니까 편해요. 숲튽훈으로 살다가도 다시 김장훈으로 돌아올 때에는 나잇값 해야겠다고 다짐하죠. 노래도 더 정성껏 하고, 욕도 끊고.”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9월에 인천에서 버추얼 유튜버 콘서트가 열렸어요. 관객 2만명이 숲튽훈, 아니 제 노래를 떼창하더라니까요. 소름 돋고 무섭기까지 했어요. 이런 세상인가…. 이제는 고등학교 축제 요청이 더 많아요. 두 달 전에는 산본중학교 축제도 다녀왔고요. 광고 요청도 김장훈, 숲튽훈 따로 들어와요. 요새 제 철학이 뭔지 아세요? 어느 구름에서 비 내릴지 모른다. 되도록 구름 많이 띄워놓자.”

◇파란만장… 온 몸으로 소나기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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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이네요.

“인생에서 제일 마음 편한 시기 같아요. 그동안 저한테 사건·사고가 많았잖아요. 노래하는 게 지겨워졌을 정도로요. 지금은 너무 재밌어요.”

가수가 아니라 ‘사회운동가’ 김장훈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독도’가 기점이었다. “2003년에 공연 사기 당하고 다 싫어져서 미국으로 날았잖아요. 거기서 공황장애까지 얻었고. 집 떠나면 애국자 된다는 말이 진짜더라고요. 그즈음 알게 된 단체가 독도 바로 알리기 운동하던 반크(VANK)예요. 제가 먼저 연락해서 홍보 대사도 맡았어요. 애국심이 점점 커지면서, 사회 이슈에 피가 끓어오르게 됐죠.” 관심사는 전 세계로 넓어졌다. 중국에 ‘김장훈숲’을 조성하고, 아프리카 케냐에는 유소년 축구단까지 만들었다.

–행보가 좀 오락가락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위문 공연 열었다가, 세월호 시위했다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 유세 했다가, 또 탄핵 집회 참가했다가…. 안티 생길 만해요. ‘좌빨’인 줄 알았는데 새누리당 정치인(2016년 김찬영 예비 후보) 지지 연설 하고. 사람들은 ‘응?’ 하는 거죠. 제가 아끼는 동생이라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이거든요. 그냥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에 옮겼던 건데, 일관성 없고 이상해 보였을 것 같긴 해요.”

–‘관종’ 얘기도 많이 들으셨죠.

“인간은 누구나 관종 아닌가요. 관심 주면 고맙죠. 나 같은 게 뭐라고. 근데 이젠 뉴스 싹 끊었어요. 정치 얘기도 일절 안 해요. 분란 생길 만한 건 안 하기로 가족 앞에서 맹세했어요.”

–당시를 후회하시나요.

“아뇨.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잖아요. 이제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알아주시잖아요. 인생을 겪으면 그게 노래가 되는 것 같아요. 제 노래 중에 ‘소나기’라고 있는데요, 제가 ‘우산 없이 살다가 아주 흠뻑 젖었네’라고 노래하면 진정성이 있죠. 진짜 소나기 제대로 맞아봤으니까. 제가 ‘괜찮아’라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들릴 거예요. 가수로서는 축복이죠.”

◇기부 천사는 죽지 않는다

기부와 봉사의 아이콘이지만, 조금 과한 설정 탓에 욕을 부른 적도 있었다. 케냐 봉사활동 도중 촬영한 이 사진이 대표적이다. 해당 사진을 본 김장훈은 "사진만 보면 솔직히 가식적으로 보이긴 한다"면서도 "현지인처럼 음식물 쓰레기 같이 주워 먹으면서 사진 속 이 친구랑은 정말로 친해졌다"고 말했다. /공연세상

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없었다. 어려서는 몹시 허약했다. 악성빈혈에 기관지염…. 죽을 고비도 여럿 넘겼다. 도박판을 벌이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노숙에 막노동해가며 1991년 가수로 데뷔했지만 무명 생활은 길었다. 1998년 ‘나와 같다면’ ‘사노라면’ 등으로 대박을 쳤다. 그리고 네 번의 성대결절. “저한테 음악은 ‘절대 행복’이 아니었어요. 반대급부가 크거든요. 고독해요. 근데 ‘나눔’은 달라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돈 줄 때가 제일 행복해요.”

–누적 기부액이 200억원이라고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25년 정도 했네요. 재단 만들자는 제안이 여럿 왔는데 운영하기도 힘들 것 같고…. 그냥 개인적으로 해요.”

–왜 기부하시나요?

“가수는 관객이랑 계속 눈을 맞추는 직업이잖아요. 그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거든요. 어린애 같은 마음이죠. ‘참 잘했어요’ 도장 받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이 ‘저거 이미지 관리용 아냐?’ 의심해도 신경 안 썼어요. 진정성에 대한 대답은 10년은 지나봐야 아니까요.”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 19일, 김장훈은 10년 만에 ‘검은 머리’로 염색한 채 나타났다. 다음 날 ‘천사 무료 급식소’ 공익광고 촬영을 위해서였다. ‘중증 장애인을 위한 누워서 보는 콘서트’ 등 현재 그가 진행 중인 봉사 및 기부 활동만 10개가 넘는다. “연말마다 ‘구세군 자선냄비 콘서트’ 하는데 너무 추워서 헤어드라이어로 입 녹이면서 노래한 적도 있다니까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자기 하나 못 바꾸는 게 사람인데요. 그냥 하는 거예요. 이 일이 괜찮은 것 같으니까. 떠나는 순간에 ‘아 이건 아닌데’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까.”

–지금 월세 사신다고… 기부할 돈은 어디서?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에요. 월세 사는 건 혼자 자주 옮겨다니는 라이프 스타일 때문이고요, 저 마음만 먹으면 많이 벌어요.”

◇33년 차 가수, 이젠 공연으로 기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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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발악을 했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너무 무기력했으니까, 그게 싫어서 늘 세상이랑 싸우려고 덤볐던 것 같아요. 잘 섞이지 못하고, 자꾸 불협화음이 생겼죠. 이젠 울분보다는 감사가 더 많아요.”

–다시 ‘공연쟁이’로 복귀하는 겁니까.

“올해만 공연 50회 정도 했고요, 앞으로 횟수 늘리고 규모도 키울 거예요. 김장훈 콘서트는 ‘연출’이잖아요. 다음 달 공연은 소극장이어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영화관처럼 스피커 빵빵하게 달고, 레이저 현란하게 쏘고, 벽면 전체를 스크린으로 발라버리고. 그래도 중·고교생은 입장료 무조건 2만원. 요새 물가 비싸잖아요. 공연 끝나고 식사도 해야 하는데.”

–적자 안 나나요?

“전석 매진이어도 적자예요. 하도 장비를 때려박으니까. 저는 공연을 취미로 해요. 다른 사람들도 일해서 번 돈 취미에 쓰잖아요. 저한테는 공연이 그런 거예요. 정신은 누구보다 아마추어처럼, 그러나 행동은 프로답게.”

–그럼 기부할 돈은 어떻게….

“사업해야죠. 내년 2월에 화장품 출시합니다. 제가 이 나이에도 피부가 꽤 좋거든요. 조향부터 박스 디자인까지 직접 다 했어요. 브랜드 명칭은 ‘Msitu’. 숲튽훈 앞글자 ‘숲’을 스와힐리어로 바꾼 거예요.”

–숲튽훈도 계속 활동하나요?

“올해 1·2집 냈고, 내년 발매를 목표로 3집 준비 중이에요. 걸그룹 노래 리메이크하려고요. 완전히 헤비메탈로.”

김장훈의 공연 마무리 코멘트는 한결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싶어도 극복합시다.” 이제야 인생의 리허설이 끝났다고 말하는 남자. ‘빵’에만 안 갔을 뿐 바닥을 찍어봤다고,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절대 좌절하지 말라고 외치는 이 환갑의 가수는 다음 달 공연에서도 현란한 ‘발차기’를 준비하고 있다. “저는 같이 늙어가자는 말 안 합니다. 얘들아 같이 젊어지자. 이번엔 3단 앞차기에 2단 돌려차기 들어갈 거니까.”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