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배경, 물 속에서… 그들은 계속 증명사진을 찍는다
나를 증명하는 2030 증명사진
‘시현하다’는 흰색 배경 대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는다. /시현하다 |
서울 서초구에 사는 임기원(28)씨의 버킷리스트는 '시현하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 것이다. '시현하다'는 '모두가 똑같은 사진이 왜 날 증명할 사진인가?'라는 김시현 대표의 물음 속에 시작된 사진관. 전형적인 흰색 배경 대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는다. 이곳에서 촬영을 하려면, 치열한 예약 경쟁을 거쳐야 한다. 특히 김 대표가 직접 찍는 사진의 경우, 30초 만에 한 달 예약이 다 차기도 한다. 임씨도 예약을 위해 남편·시누이 등 인터넷에 친숙한 가족을 총동원했다. 3명 중 1명이 간신히 예약에 성공,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예약이 치열하기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산호맨숀', 인천 부평구에 있는 '그믐달 사진관'도 못지않다. 산호맨숀에서는 증명사진과 생화를 배경으로 한 프로필 사진을 찍는 구성이 인기다. 가격은 15만원. 지난 16일 산호맨숀에 "9월 중 촬영 가능한 날짜가 있느냐"고 물었다. "9월 예약은 모두 다 찼다"며 "8월 1일에 10월 예약을 받으니 그때 문의해달라"고 했다. 인물의 표정을 잘 담아내는 곳으로 유명한 '그믐달 사진관'도 사정이 비슷하다. 한 달에 한 번 예약이 열리는데, 대부분 당일 예약이 마감된다. 재수, 삼수 끝에 증명사진 예약에 성공했다는 사람도 많다.
아예 물속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딥그랑블루스튜디오는 수중촬영 전문 사진관이다. 지난해 12월 문을 열 때만 해도 서울에 유일했는데, 올해에는 2~3곳 더 늘어났다. 스튜디오를 빌리는 데만 25만~45만원이고 촬영비는 별도로 내야 하지만, 하루 2~3팀이 꾸준히 찾는다.
증명사진의 사전적 의미는 '증명서 따위에 붙이는 작은 규격의 얼굴 사진'이다. 이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위장 여부를 식별해낸다. 주로 상반신까지 담는 프로필 사진은 예전에는 연예인 지망생이나 연주자 등이 찍었다.
2020년의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 중반~2000년대 중반에 태어난 Z 세대를 아울러 일컫는 말)는 다르다. 주민등록증 사진이 있는데도 증명사진을 추가로 찍고, 개인 소장용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 이들이 '자신을 찍는 사진'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프사 필요한 SNS
수중 프로필 촬영도 인기인데 서울 성동구 딥그랑블루스튜디오는 수중 촬영 전문 스튜디오다. /딥그랑블루스튜디오 |
'증명·프로필 사진 열풍'을 일으킨 일등 공신은 SNS다. 사실 증명사진의 주 사용처였던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의 경우 살면서 남들에게 보여줄 일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중장년층의 경우 현재 얼굴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몇십년 전 증명사진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끔 공개되는 신분증 속 오래된 증명사진은 놀림 혹은 추억의 대상이 됐다.
SNS 시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당장 SNS에 가입하면, 처음 요구하는 것이 '프로필 사진(프사)'이다. 대개 5~6가지 SNS를 하는 2030세대들은 여기저기서 '프사'를 게재하라는 요구를 마주한다. 직장인 이모(32)씨는 "이제는 업무용으로도 SNS를 많이 쓰면서 카카오톡 사진을 고를 때도 신중해진다"며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카톡 '프사'로 하고 싶어 얼마 전 15만원을 주고 증명사진을 새로 찍었다"고 했다.
사진 쓸 일이 많아지면서, 이들은 자연히 나를 잘 표현하는 멋진 사진에 공을 들이게 된다. 촬영비가 10만원을 훌쩍 넘는 곳도 적지 않지만, 찍은 이들은 '아깝지 않다'고 한다. 이씨는 "한번 잘 찍은 사진은 다양한 곳에서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2만원을 주고 증명사진을 찍은 임씨 역시 "나한테 가장 어울리는 색은 무엇일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 등을 알고 싶어 사진을 찍게 됐다"며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촬영 준비 등 전 과정이 너무 즐거웠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수중 프로필 사진을 찍는 박상우 딥그랑블루 대표작가는 "가끔 연예인들이 화보나 영화 포스터를 찍으러 오는 경우도 있지만, 80~90%는 일반인 고객이고 그 중에서도 20~40대가 대부분이다"라며 "'서른이 되기 전 나의 모습 남기고 싶다' '나만의 화보를 만들고 싶다' 등 자기만족을 위한 소장용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물속에서 사진을 찍으면, 물이 빛을 여러 각도로 반사해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스튜디오 심도'는 흑백으로만 인물 사진을 촬영하는 곳이다. 사진 촬영 금액은 18만원부터다. 심도 홍리혜 대표는 "흑백은 우리 몸의 선을 더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며 "흑백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심도는 특히 유광 또는 무광만 선택하도록 하는 기존 사진관과 달리, 다양한 용지를 갖추고 있어 인기가 높다. 홍 대표는 "사진의 완성은 인화해서 프린트물을 갖는 것까지라고 생각해 용지에 공을 많이 들였다"며 "같은 사진이라도 용지에 따라 결과물이 전혀 달라진다"고 했다.
매해 사진 새로 찍는 문화도
‘스튜디오 심도’의 흑백사진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이 사진들은 각 사진관이 촬영 당사자에게 초상권 동의를 받아 제공했다. /스튜디오 심도 |
20~30대에게 증명사진은 한번 찍거나 제출한다고 해서 끝나는 사진이 아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는 만큼, 특정 기간을 두고 사진을 새로 찍는 경우도 많다. 주민등록증 사진 한번 바꾸지 않았던 윗세대와 달리, 이들은 신분증 사진을 실제 모습에 맞게 교체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임씨도 '시현하다'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학생 때 만든 주민등록증 사진을 바꿨다. 임씨는 "사진 교체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사진을 새로 찍은 김에 겸사겸사 신분증 사진도 바꿨다"고 했다.
디지털 문화심리학자인 건국대 이승윤 경영학과 교수는 "온라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캐릭터나 이모티콘과 함께 성장한 MZ세대는 사진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는 데 매우 익숙하다"며 "과거 세대가 식별용 사진이나 기껏해야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사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차별성 있고, 사진을 잘 찍고 싶은 욕구가 커지면서 관련 산업들도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가 사진에 과도하게 욕심을 내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진작가들도 있다. 특히 얼굴이 강조되는 증명사진의 경우가 심하다. A 사진작가는 "최근에는 자동으로 사진을 보정해주는 앱 등이 발달하면서, 그렇게 찍은 셀카가 자신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미의 기준을 셀카 사진에 두고, 증명사진이 무조건 그 사진보다 잘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과도한 사진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완성된 사진을 받은 뒤, 포토샵으로 턱을 더 깎는 등 임의로 사진을 수정해 SNS에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남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