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엔 삼계탕·장어? "우린 말미잘 먹어요"
아무튼, 주말
부산 기장 보양식 '말미잘탕'
부산 기장 학리항 '해녀집' 말미잘탕.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대표적 하등동물로만 알았던 말미잘, 실제로 보니 무척 아름다웠다. 핑크빛 촉수가 꽃잎처럼 하늘거렸다. 영어 이름이 왜 ‘바다의 아네모네(Sea Anemone)’인지 알듯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맛있다.
초복(初伏)을 하루 앞둔 지난 15일 부산 기장에 있는 학리항을 찾아갔다. 시인이자 부산의 이름난 식객(食客)인 최원준씨에게 “기장에서는 말미잘을 여름 보양식으로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말미잘을 먹는다니. 사실이었다. 학리항 수산물판매센터에 입주한 식당마다 수족관에 말미잘이 들어 있었고, 손님들은 말미잘탕으로 복달임을 하고 있었다. 해녀인 어머니를 이어 ‘해녀집’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오석미씨는 “우리 마을에선 30여 년 전부터 말미잘탕을 끓여 먹었다”고 했다.
최원준씨는 “말미잘탕은 40년쯤 전 학리 지역 한 어부의 아내가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리는 붕장어(아나고)로 이름난 지역입니다. 붕장어 잡으려고 바다에 던져둔 낚싯바늘에 말미잘이 심심찮게 딸려 올라왔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재수 없고 흉측해 버렸지만, 차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처음에는 물메기탕을 끓일 때 말미잘을 넣어보니 맛이 나쁘지 않았대요.”
말미잘이 하등동물로 분류되는 건 몸 구조가 단순하다거나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입과 항문이 하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의 미주알(항문)’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잘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기장과 제주도 등 해안 지역에서는 말미잘을 ‘몰심’이라고도 부르는데, ‘말의 암컷 성기’를 이르는 말이 순화된 것으로 보인다.
수족관 속 말미잘.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말미잘은 원통형 몸에 여러 촉수가 왕관 모양으로 붙어 있다. 아름다우면 위험한 걸까. 촉수에는 독이 있다. 말미잘은 촉수를 흔들어 작은 물고기를 유혹하고, 물고기가 접근하면 총을 쏘듯 촉수로 마비시켜 잡아먹는다.
이처럼 독성을 지닌 말미잘을 먹어도 괜찮을까. 기장 사람들은 말미잘이 위장과 간에 좋다고 말한다. 기장의 한 식당 입구에는 ‘말미잘 십전대보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식당 주인은 “손님들이 말미잘의 효능이 ‘보약 한 재와 같다’며 붙여준 별명”이라고 했다. 최근 과학자들이 말미잘에게서 항균과 마취 효과가 있는 생리활성 물질 ‘크라시코린(Crassicorin)’을 발견했다. 피부 노화 예방과 미백 효과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최씨는 “위험하거나 해로운 수준은 아니지만 말미잘을 너무 많이 먹으면 입술과 혀에서 살짝 얼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학리 일대 식당에서는 말미잘을 매운탕과 수육, 구이 3가지로 요리한다. 매운탕과 숯불구이를 맛보기로 했다. 오씨가 수족관에서 말미잘을 그물로 건져냈다. 물 밖으로 나오자 말미잘은 촉수를 몸 안으로 집어넣어 원뿔형으로 바뀌었다. 지름이 10~20㎝가량으로, 손바닥에 꽉 찰 정도로 크다. 꺼칠한 솔로 말미잘 표면에 묻은 이물질과 점액질을 말끔히 제거한 뒤 한입 크기로 잘라 흐르는 물로 깨끗이 씻었다. 잘라놓은 말미잘은 주홍빛이 선명해 언뜻 멍게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씨는 커다란 냄비에 말미잘과 준비해놓은 붕장어, 양파, 된장, 고춧가루 등을 더하고는 붕장어 뼈 우린 육수를 부어 센 불에 끓였다. 펄펄 끓기 시작하자 송송 썬 파를 넣더니 방아 잎을 툭툭 손으로 끊어 넣었다.
말미잘 매운탕 국물부터 한술 떠서 맛봤다. 시원하고 개운하다. 구수하면서 살짝 칼칼하다. 이어 이 요리의 하이라이트인 말미잘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식감이 경쾌하고 산뜻하다. 전체적으로는 젤리처럼 말랑말랑 쫄깃하면서, 오독오독 씹히는 연골이 살짝 붙어있다. 질기거나 느끼한 부분이 전혀 없다. 일본에서 어묵(오뎅)탕에 반드시 넣는 소 힘줄(스지)와 비슷하지만 훨씬 부드럽다.
말미잘 구이.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해녀집의 말미잘 구이는 끓는 물에 데친 말미잘을 아무 양념 없이 연탄불에 겉이 노릇해지게 굽는다. 일부 식당에서는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굽기도 한다. 매운탕에 들어있는 말미잘보다 더 탱탱하면서 오징어처럼 구수한 맛이 났다.
말미잘을 부산 기장에서만 먹지는 않는다.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은 “이제는 사라진 해녀들의 음식 ‘몰심탕’을 말미잘로 끓였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도 말미잘을 먹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프랑스 레스토랑 중 하나인 부산 ‘메르씨엘’ 윤화영 오너셰프는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있는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르 프티 니스(Le Petit Nice)’ 대표 요리 중 하나가 말미잘 튀김”이라고 했다. 하긴, 맛에 대해서라면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 사람들이 이 기막힌 식감을 알고도 그냥 두지는 않았겠다.
[기장(부산)=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