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값 10배 폭등… 부산은 판자촌 전성시대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이상빈 기자 |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로 올라가는 골목길은 다국적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러시아,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쉴새없이 눌렀다. 산자락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이 스마트폰 렌즈를 사로잡았다. 감천문화마을은 땅값과 집값이 싼 동네를 찾아 산중턱까지 올라온 서민과 피난민들이 만들었다. 전쟁의 고통과 서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이 동네가 부산의 유명 관광지가 된 것이다.
최근 부산의 ‘골목상권’이 뜨고 있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연구원 이사는 “오래된 항구 도시인 부산은 동네 곳곳에 스토리가 있고, 산줄기가 바다로 내려가는 지형이어서 전망이 우수하고 골목상권이 발달하기에도 최적의 도시”라고 말했다.
‘하늘 아래 첫 동네’, 감천문화마을과 초량 이바구길
감천문화마을은 파스텔톤 계단식 주택이 산자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산중턱이어서 교통이 불편하고 큰 집도 짓기 어려워 20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집들이다. 그런데 2009년부터 ‘꿈꾸는 부산 마추픽추’와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 ‘산복도로 르네상스’ 같은 사업이 진행되면서 부산의 대표 관광지 겸 골목상권으로 부상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 외국인 관광객 한무리가 지나간다. /이상빈 기자 |
비어있던 집에 갤러리와 북카페가 들어서고, 아기자기한 상품을 파는 공방과 민박시설이 마을 곳곳에 생겨났다. 입소문이 나자 외국인 관광객도 찾는 명소가 됐다. 지난해에만 관광객 205만여명이 다녀갔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국내 대표 관광지 46곳 중 전남 담양 죽녹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수준이다. 동네에서 만난 에카테리나(28·러시아)씨는 “마을 구석구석 집들이 예뻐서 사진 찍기에 좋다”며 “전망대에서 보면 집들이 형형색색 어우러져 인상적이고 멀리 바다도 보여 아름답다”고 말했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부동산 임대료와 집값도 뛰고 있다. 최근 10여년 1평(3.3㎡)당 100만원이 땅값은 1000만원이 됐다. 10평(33㎡) 짜리 가게 임대료가 400만원을 부르는 곳도 있다. 3.3㎡당 40만원이면 서울 광화문과 압구정동 상권의 임대료보다 높다.
부산역 맞은편 동구 초량동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을 훤히 내려다보는 전경이 일품이다. 이곳 역시 6·25전쟁 때 부산으로 온 피난민들이 살던 판자촌이었다. 1980~1990년대 무렵 마을의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노인들만 남고 빈집도 늘었다.
이바구 캠프에서 바라본 부산시내(왼쪽)와 영도 봉래동 봉산마을에서 바라본 영도. /이상빈 기자 |
부산시와 동구 측은 이곳에 도자(陶瓷)로 만든 공공미술작품 등이 설치된 예술거리를 조성했다. 옛 적산가옥을 카페로 개조한 ‘초량1941’,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개인종합병원 ‘구 백제병원’, 부산 최초의 창고 ‘남선창고 터’, 차이나타운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이 늘고 상권이 형성되자 부동산 가격도 뛰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던 공가가 3.3㎡당 100만~200만원 선에 거래된다. 초량동 A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도로를 접한 공가는 인기가 많아 3.3㎡당 1000만원 이상에도 거래됐다”고 말했다.
초량 이바구길은 곳곳에 도자(陶瓷)로 만들어진 공공예술작품이 설치돼있다. /이상빈 기자 |
서면 ‘전리단길’과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도 인기
부산 대표적 도심인 서면 뒷골목 상권도 새롭게 뜨고 있다. 부산지하철 1·2호선 서면역과 2호선 전포역 사이엔 ‘전포동 카페거리’가 생겼다. NC백화점 뒷편 공구상가를 따라 서점, 술집, 편집샵들이 몰려 있다.
부산 서면 전포동 '전리단길'에는 공업사들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있다. /이상빈 기자 |
전포동 카페거리는 점차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서울 이태원동 경리단길 이름을 따 ‘전리단길’로 불리기도 한다. 상가 권리금도 생겼다. 전포동 H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불과 1년만에 아무것도 없는 공구상가에도 2000만~3000만원씩 권리금이 붙었다”며 “33~40㎡ 짜리 가게가 보증금 1000만~2000만원에 월세는 100만~110만원으로, 3.3㎡당 최고 20만원까지 받는 전포동 카페거리보단 싸다”고 말했다.
낙후 지역이던 ‘영도’ 역시 뜨는 상권 중 하나다. 부산 남포동과 영도를 잇는 영도대교를 건너 바로 나오는 대평동에 조성된 ‘깡깡이 예술마을’이 대표적. ‘깡깡이’는 선박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쇠를 망치로 내려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다. 중소 선박수리업체가 밀집한 이 동네는 선박수리공들이 배를 고치는 산업 현장과 공업사 곳곳에 여러 색채로 그려놓은 따뜻한 느낌의 그림들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깡깡이 예술마을(왼쪽)은 선박수리공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이상빈 기자 |
“집값·월세 폭등 부작용…주민 주도 도심 재생해야”
부산의 골목상권역 주변에는 도심재생 사업도 함께 추진되고 있다. 부산 동구 원도심엔 지난 5년간 500억원의 투입돼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됐다. 2020년까지 영도구 등 4개구, 15개 사업에 481억원이 투자된다. 국토부는 2022년까지 도시재생 뉴딜 사업에 대해 지역별로 50억~25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도시재생 뉴딜 시범사업에 선정된 곳은 북구(중심시가지형) 등 4곳이다.
골목상권이 뜨면서 집값과 임대료가 부쩍 오른 상황에서 도시재생 사업까지 추진되면서 매매가격과 임대료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영도 신기산업. /이상빈 기자 |
전문가들은 골목상권 활성화는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주민들 자산 가치도 오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지나친 가격 상승은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 같은 부작용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당장 집값, 건물값이 오르는 것은 좋지만 과열이 계속되면 경쟁력 있는 세입자들이 빠져나가 상권도 위축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부산 영도구 조선소 단지 내 복합문화공간 '끄티'. /RTBP 제공 |
외지인보다 원주민들이 계속 살면서 마을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복합문화공간 ‘끄티’를 운영하는 RTBP의 김철우 대표는 “부산 영도 같은 지역에선 마을 주민을 협동조합 형태로 모아 도시재생 대상 지역을 ‘지역 자산’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민 스스로 동네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