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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힘 가장 무서워... 놀아본 자가 창조한다" 조선 아이돌 이희문

가발 쓰고 여장하고, 민요 부르는 ‘조선의 헤드윅'

"선 따윈 무시하고 놀아, 내가 즐거우면 남도 반응해"

홍대 클럽 공연... 20대는 민요 가락에 춤추고, 40대는 민요 가사 떼창

미국NPR 출연, 해외서 더 유명 "세상에 없던 밴드"

"당대에 가장 트렌디한 것이 전통… 그래야 보존돼"

조선일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이자 ‘세계적인 난봉꾼’ 이희문(43). 갓을 벗으면 가발에 하이힐을 신는 전통 소리꾼. 제10회 문화소통포럼(CCF)에 한국 측 대표로 선정되어 활동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어조가 어찌나 조용하고 나긋나긋한지, 오래 수련한 청학동 도령을 보는 듯했다. 방전도 충전도 아닌, 에너지를 최소한도로 오래 머금고 있는듯한 태도. 한편으론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 ‘아낌없이 주련다'라는 순복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미국 공영방송 라디오 NPR에 나와 가발 쓰고 하이힐 신고 주술적으로 노래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그 ‘세계적 난봉꾼'이 맞는가. "백발에 드레스 입으면 포효하지만, 갓 쓰고 한복 입으면 차분해져요." 인격은 비주얼을 따라가더라고, 이희문이 무명과 비단을 섞은 듯 중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워싱턴에서 녹화한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동영상이 유튜브 조회 수 370만 뷰가 넘어서면서 이희문은 해외에 먼저 알려졌다. 그가 결성한 민요 록밴드 ‘씽씽'에 대해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SsingSsing isn't like any other band I've ever seen or heard.(우리가 보거나 들은 적 있는 그 어떤 밴드와도 같지 않다).


펑크, 디스코, 레게, 글램록, 테크노와 어우러져 나온,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찔한 민요 사운드에 세계인은 즐거운 충격에 빠졌다. ‘NPR은 저 사람들을 대체 어디에서 찾아냈나?’ ‘쇼킹할 정도로 천재적이다’ ‘국악이 저토록 섹시할 수 있다니' ‘전통의 창조적 파괴자'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민해경과 마돈나를 꿈꾸다 27살 늦깎이로 소리를 시작한 이희문은 짧은 시간에 ‘조선의 헤드윅'으로 세계를 울리는 절창이 됐다. "그 모든 게 노는 힘에서 나왔다"는 소리꾼 이희문을 만났다. 그는 세계 각국의 크리에이터들이 모인 제10회 문화소통포럼(CCF)에 한국 측 대표로 선정되어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여성의 것도 남성의 것도 아닌 참으로 기묘한 음색입니다.


"예전엔 못 들어 줬어요(웃음). 연습하면서 점점 좋아졌지요. 보컬 학원도 다니면서 저만의 발성을 만들어 냈어요."


조선 아이돌, 조선 헤드윅이란 별명은 맘에 드나요?


"감사하죠. 언젠가 국회 앞뜰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한 정치인이 저희를 보고 감탄하면서 "당신이야말로 조선의 아이돌이요!" 그랬거든요. 그때부터 ‘조선 아이돌'이라고, 하하. ‘조선의 헤드윅'은 제가 하이힐 신고 가발 쓰고 난장을 피니까 뮤지컬 ‘헤드윅'에 대입시켜주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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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신고 마돈나를 꿈꿨던 우리 시대의 상남자가 전통의 창조적 파괴자가 됐다.

여장을 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젠더의 문제를 젖혀놓고 제가 여장 비주얼을 가져온 건 어린 시절 경험때문입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어머니(국가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이수자 고주랑 여사)를 통해 소리를 들었어요. 1980년대 초반엔 여자 소리꾼들이 주류였죠. 유년 시절을 할머니 어머니 손에서 자라다 보니 여성적인 게 몸에 배었어요.


한동안 한국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억압이 있고, 특히나 전통문화를 하는 사람이 ‘여성스러우면’ 경을 칠 일이라 한동안 저는 이런 기질을 숨기고 살았어요. 그래도 가끔은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어요. "왜 남자 소리꾼은 드물까?" 여성의 소리는 고음이라 남자가 도달 못 하는 지점이 분명 있거든요."


남자 소리꾼은 왜 드물지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오류가 생겼어요. 한국 문화는 대개 외국 문화와 섞이면서 발달했어요. 한국인은 변화 흡수가 빠르고 콜라보레이션이 체질화된 민족이죠. 그런데 구한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의 장인 문화를 우리나라에 제도화하면서 ‘소리'가 보존 중심으로 바뀌었어요. 문화재 선생님들만 공경받고, 결과적으로 생활 속에서 남자들의 ‘소리 놀음'이 사라졌죠. 그런데 사실 당시에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장르가 민요였거든요."


이를테면 민요가 지금의 ‘랩’ 같았다는 거지요?


"그렇죠. 힙합 뮤지션이 랩 하듯 당대의 인기 가수가 민요를 부른 거죠. 그 힘이 막강했으니까 지금도 그 장르가 보존된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100년 전 조선에 분명 저 같은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예술인들은 주로 비주류 문화에서 에너지를 받잖아요. 100년 전이라고 뭐 달랐겠어요? 당시 소리꾼들도 동아리처럼 서로 모여서 홍대 밴드처럼 놀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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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문의 시그니처 복장. 산만한 가발에 킬힐을 신고 재즈 연주에 맞춰 민요를 부른다.

조선 시대에도 지금의 홍대 인디 문화가 있었다?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게 제가 얼마 전 공연으로 재현한 ‘깊은 사랑'이에요. 땅 깊숙이 만든 사랑방이라는 뜻인데요. 농한기 때 노는 땅을 깊이 파서 동아리방을 만든 거예요. 거기서 남자들끼리 소리하고 놀았어요. 지금의 홍대 지하 벙커 같은 거죠.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양반들도 사랑방에 명창을 불러다 판소리를 청해 들었는데 그것과는 다릅니까?


"제가 하는 민요는 양반들이 향유하던 판소리와는 달라요. 사대문 밖의 중인 계급이 즐기던 노래예요. 폼 잡고 그런 게 없죠. 중인들이 가내수공업으로 돈이 좀 생기면서 사대부의 여유를 따라 취미생활을 한 거예요. 그런데 당시에도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영혼이라 자기 스타일대로 놀았죠. 제가 하는 민요도 몇백 년 이어진 게 아니라 100년 내외의 소리예요. 그게 지금 경기 민요를 내 맘대로 비트는 명분이고요(웃음)."


전통은 시대에 맞게 더 트렌디해져야 보존된다는 역설이네요.


"제 생각은 그래요. 저는 민요도 좋아하지만, 잡가도 좋아해요. 잡가는 소리꾼들이 자기 목청을 뽐내려고 만들어 부른 노래에요. 더 자유롭죠. 박자, 리듬 다 자기 멋대로예요. 그런데 일본 강점기에 권번이 생기고 게이샤 문화가 들어오면서 달라졌어요. 게이샤는 엄격하게 훈련된 상품이잖아요. 권번이 일종의 아이돌 기획사 역할을 하고, 남자 소리꾼들이 권번에 가서 소리를 가르친 거죠. 그때부터 우리 소리가 규격화되면서 자유로움이 사라졌어요. 저는 그 자유로움을 다시 살려내려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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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록밴드 씽씽의 전 멤버들. 이희문을 프런트맨으로 타악 전공 출신의 남자 소리꾼 신승태, 전통뮤지컬을 전공한 소리꾼 추다혜, 기타 이태원, 드러머 이철희, 어어부 밴드 멤버이자 영화 음악 감독인 베이시스트 장영규가 모였다. 최고의 프로페셔널.

그래서 민요와 록과 막춤, 퀴어 코드로 무장하고 홍대 클럽으로 갔습니까? 요즘엔 관객들이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하면서 민요를 떼창으로 따라 한다고 들었어요.


"하하하. 좀 민망해요. 갑자기 왜들 이러시지?(웃음). 40대 중반 여성이 가장 열광하고, 30대나 50~60대분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지난주 홍대 라이브 홀에서 공연했는데 중년분들로 꽉 찼어요. 본인들도 ‘와! 우리가 홍대 와서 놀고 있네' 놀라면서요."


무엇보다 미국의 공영라디오방송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나왔던 민요록밴드 씽씽의 시너지가 대단했어요. 세상에 없던 ‘미친 흥'이었죠. 드럼, 일렉 기타… 세션도 좋았지만 3명의 소리꾼의 ‘야릇한 끼'에 감전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하. 추다혜, 신승태 씨랑 같이 노래하다 보면 다들 ‘핀이 나간 것처럼' 놀아요. 제가 오더메이드레파토리 시리즈 중 ‘쾌'를 공연할 때 씽씽밴드를 구성했어요. 남녀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잠재된 발칙하고 야릇한 ‘쾌'의 감각을 일깨워보자, 그런 의도였어요. 춤추며 흔들고 사는 게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거든요. 씽씽밴드는 2014년 12월부터 홍대 클럽에서 4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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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음악 마니아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미국 공영라디오 NPR의 ‘Tiny Desk Concert’에 출연했을 때의 섹시하고 아방가르드한 ‘씽씽밴드'. 가장 오른쪽 붉은 가발이 이희문.

처음엔 홍대 인디 밴드들도 충격 꽤나 받았겠습니다.


"어어부밴드의 장영규 씨(‘부산행’ ‘곡성' 등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가 씽씽과 함께 했는데, 일단 장영규가 홍대 밴드의 조상 격이니까요(웃음). 전통과 록이 충돌 없이 어울려 노니까 순식간에 밴드가 좋아하는 밴드로 유명해졌어요."


‘밴드들의 밴드’였다가 2017년 미국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으로 ‘잭팟'이 터졌죠.


"그것도 우연이었죠. 뉴욕에 놀러 갔다가 글로벌 페스티벌의 아트 마켓에 쇼케이스 공연을 했어요. 그걸 계기로 미국 투어를 하게 됐는데 ‘타이니 데스크' PD가 또 그걸 보고 출연 요청을 했어요. 딱 하루 쉬는 날 무슨 방송인지도 잘 모르고, 15분 녹화하러 워싱턴까지 4시간 기차 타고 갔잖아요(웃음)."


유튜브에선 조회 수가 370만 뷰가 넘었어요. 씽씽밴드는 지금 해체됐는데, 재결합해달라는 운동이 일어날 정도예요.


"씽씽은 어딜 가도 잘 노는 무적함대 같았어요. 미국 공연할 때도 그랬죠. 미국인들이 민요를 어떻게 알겠어요. 저희도 그쪽 분위기 잘 모르고요. 그런데 일단 우리가 좋아 난리 부르스를 추면 관객이 어느 순간 따라와요. 잘 노는 놈을 당할 사람은 없거든요. 씽씽으로 클럽에서 몇 년 간 놀아본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지요. 끝까지 놀 수 있는 마음… 저희한텐 그런 노는 힘이 있어요.


노는 힘이라…


"네. 저는 사람들이 저한테 B급 소리꾼이라고 할 때가 참 좋아요. 두려움 없이 놀 수 있으니까. "틀려도 돼, 망해도 돼, 놀려고 하는 거야" 이런 태도가 홍대에서 자연스레 훈련이 됐어요. 그런데 민요의 전통이 그래요. 잔칫집에서 메들리로 많이 불렀거든요. 잔칫집은 극장이나 무대 개념이 없어요. 문턱도 없고 경계도 없고 선을 막 넘어서 노는 거예요. 즉흥성이 난무하죠."


일단 선을 넘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기세죠.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나요?


"없어요. 원칙은 하나예요. 내가 즐거워야 보는 사람이 즐겁다. 남이 뭐라든 내가 재밌는 게 먼저예요. 그렇게 노는 힘이 가장 무서워요. 놀아본 사람이 창조도 할 수 있죠. 딱히 뭘 이뤄야겠다는 각오도 없어요. 야생의 잡초처럼, 외인구단처럼 살아요(웃음). 하지만 저도 조직에 있었다면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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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생활 사나이 이희문. 공연 레파토리를 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사진=이태경 기자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이 ‘선을 넘을 때'의 불쾌감을 환기했다면, 이희문의 소리는 ‘선이 허물어질 때’의 쾌감을 느끼게 해줬어요. 하지만 선을 마구 넘으면서도 지키는 어떤 룰이 있지 않을까요?


"있어요. 가발 쓰고 여장하고 놀아도 소리는 올곧게 하려고 해요. 저는 창작도 안 해요. ‘긴난봉가' ‘베틀가' ‘청춘가'... 다 원래대로 하고 있어요. 레게, 록, 재즈와 콜라보레이션을 해도 리듬의 변주를 줄 뿐, 소리는 제대로 해요. 아는 분들은 그걸 알아요."


올곧은 민요 소리가 펑크, 테크노비트, 디스코, 글램록과도 잘 붙는다는 게 신기했어요. 혹시 안 맞는 장르도 있나요?


"헤비메탈은 안 맞아요. 그 장르엔 키치한 멋이 없어요."


좋아하는 악기는 뭐죠?


"드럼하고 장구요. 소리꾼은 멜로디가 없으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초집중을 해야 하거든요. 수명이 단축될 정도죠. 그런데 관객은 오히려 리듬 악기랑 할 때 목 울림이 공간을 채워서 감동이 더 크게 온대요."


과거에 타악기 주자 김대환 선생의 상가에서 장사익 선생이 부르는 ‘대전 부르스'를 들었어요.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때 잔칫집과 상갓집, 슬픔과 기쁨이 뒤섞이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게 한국적인 정서일까요?


"저는 그렇게 느껴요. 제가 하는 경기 민요도 딱 그래요. 멜로디는 경쾌한데, 그 안의 텍스트는 절절하죠. 말을 어떻게 씹느냐에 따라 감정이 확확 달라져요. 입은 웃는 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요."


이희문이 처음부터 소리꾼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27살 다소 늦은 나이에 경기 민요를 시작했다. 어머니인 고주랑 여사는 아들이 소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민해경과 마돈나를 좋아했던 그는 댄스 가수가 되고도 싶었다. 2000년에 일본에 가서 3년간 뮤직비디오 공부를 했고, 돌아와서는 한동안 ‘강남스타일'로 B급 유행을 일으킨 김수현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소리꾼의 길을 권한 건 어머니의 친구인 이춘희 선생(경기민요 인간문화재)이다. 우연히 이희문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들은 이춘희 선생은 그의 독특한 음색과 흥을 알아차렸다. "너 소리 해라!" 그 소리를 27년 만에 처음 들었다. 운명에 이끌리듯 사사했다. 27년간 억압됐던 소리의 물꼬가 샘물 터지듯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드디어 남자 소리꾼이 하나 나왔네." 친구의 찬사에 어머니도 더는 그 길을 막지 않았다. 혹여 ‘기생오라비' 소리 들을까 오래도록 저어하던 길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 그 한 줄만 있으면 전통과 현대가 충돌 없이 풀린다고 했어요. 스스로 무엇을 한다고 생각했나요?


"저는 제 결핍되고 뒤틀린 자아를 그대로 표현했어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일종의 자기 선언이고 치료 과정이었어요. 신기한 건 내가 나를 위로하는 모습에 다른 사람도 위로를 받더라고요. 이젠 대중에게 즐거움과 힐링을 주는 단계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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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아방가르드인 이희문./사진=이태경 기자

노들강변을 가장 좋아한다지요?


"저는…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 스타일을 좋아해요. 어머니가 노들강변을 잘 부르세요. 소리는 그 사람의 성품과 닮았어요. 어머니가 여자지만 굉장히 강하고 또 남한테 베풀기를 좋아했어요. 어쩌면 당신이 받지 못한 영광을 제가 누리는가 싶기도 해요. 고백하자면 제 결핍의 실체는 어머니예요. 어렸을 때 느낀 결핍이 평생을 가더라고요."


성년도 유년의 연장이니까요.


"미해결 과제를 그냥 가슴에 품고 가는 거죠. 아버지는 일찍 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가장 역할을 하느라 늘 바쁘셨어요. 저는 외할머니 손에 컸어요. 어머니를 많이 탓하고 미워했죠(웃음). 그런데도 전 어머니가 부르는 노들강변이 참 좋아요. 어머니처럼 부르고 싶어요. 애증의 관계지요."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이희문이 부르는 노들강변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낭창하게 휘어지는 소리가 봄버들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민해경과 마돈나를 좋아하던 소년이 어느덧 경기 명창이 됐습니다. 생각할수록 희한한 조합이에요.


"어릴 땐 어머니를 좋아했고 그 마음이 민해경에서 마돈나로 갔죠. 그다음엔 이춘희, 그다음엔 무용가 안은미 선생으로 이어졌어요. 어떻게 된 게 제 인생은 다 센 여자들이 흔들었어요."


그 센 조합이 무대에서 하이브리드 비주얼로 표현되는 거죠(웃음). 단발머리 가발에 갓 쓰고, 더블 수트 위에 페티코트를 겹쳐 입은 모습은 마치 장 폴 고티에 꾸뛰르 쇼에서 걸어 나온 것 같더군요.


"그렇게 차려입으면 인격도 말투도 제스처도 다 변해요. 어머니도 처음엔 엄청 싫어하셨는데 관객들이 좋아하니까 괜찮다고 하세요. 남들 이목이 중요한 분이라. 하하. 저요? 다행히 저는 남의 이목보다 스스로 좋아하는 걸 하도록 타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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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씽밴드 공연장면.

어머니 고주랑 선생과 이춘희 선생에겐 무엇을 배웠습니까?


"어머니에겐 흥과 정서를 배웠어요. 74살이신데도 감성적이세요. 이춘희 선생은 교육적으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오전에 청와대 초청으로 ‘맹꽁이 타령'을 공연하고 왔는데, 선생님이 다 듣고는 그러셨어요. "잘했다. 가사 전달이 참 좋더라." ‘맹꽁이 타령'은 신진사대부들이 양반을 비꼬고 풍자한 노래거든요. 그 시대의 랩이라 가사가 정확히 꽂혀야 했어요."


현대 무용가 안은미 선생에겐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그분이야말로 자신을 불태우는 보살이에요. 진정한 아티스트죠. 안은미 선생은 항상 매를 먼저 맞아야 된다고 하셨어요. 무조건 먼저 해라, 남이 하기 전에 먼저 손들고 해라."


이희문은 2007년부터 안은미 작품 ‘프린세스 바리'에 바리공주로 캐스팅돼서 7년간 유럽 무대에 섰다. 샤머니즘이라는 컨셉 아래, 역경을 딛고 일어선 바리공주 캐릭터에 그의 몸을 겹쳐 숨겨왔던 모든 끼를 터뜨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요 판에서는 튄다고 혼이 났어요. 그런데 안은미 선생님은 "네가 하니까 뭐든 좋다"고 오직 칭찬만 하셨어요. 그분은 누가 잘하는 걸 찾아서 정확히 배치하는데 능하셨어요. 저도 배워서 씽씽밴드 할 때 신승태와 추다혜의 장점을 잘 뽑아냈죠. 제가 만든 이희문컴퍼니도 알고 보면 안은미컴퍼니 ‘짝퉁'이고요. 하하."


그런데 알고 보면 이희문은 상남자라는 평도 있습니다.


"아! 그건 국악방송 라디오 심야 라이브 할 때 담당 PD가 그랬어요. "형, 알고 보니 상남자야." 사람들을 끌고 가는 배포가 크다는 거죠(웃음)."


오랫동안 함께 공연한 재즈 밴드 프렐류드와 만든 공연 프로젝트도 ‘한국남자' 잖아요. ‘창부 타령' 부르면서 남자들이 고생한 여자를 위무하고 속을 터놓는다는 컨셉이 신선했습니다. 진정한 ‘상남자'지요.


"민요가 원래 여자를 위한 가사가 많아요. 재즈랑 잘 붙어서 저답게 재밌게 놀아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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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부타령’ ‘청춘가' ‘정선아리랑’ ‘사설난봉가’ ‘흥타령’... 민요 레파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재즈 선율에 얹히는 이희문의 칼칼한 보컬이 일품.

인생에서 몇 번의 극적인 반전이 있었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까?


"제 팔자가 그런 거 같아요. 소리하게 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소리를 할 팔자였던 거죠. 어린 시절 재밌는 이모로만 알던 이춘희 선생을 다시 만나 소릿길로 들어온 것도. 안은미라는 스승을 만나 퍼포머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은 것도. 얼마 전 문화소통 포럼 CCF에서 한국 문화 세미나를 했는데 외국인들이 다들 BTS 얘기를 하더군요. 그들의 노래, 움직임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고. 그 얘기를 듣는데 저는 씽씽밴드가 생각났어요."


씽씽은 BTS와는 다른 컬러로 세계인의 열광을 끌어냈죠. 밴드가 재결합될 가능성은 없나요?


"씽씽이 좀 더 일찍 좋은 에이전시를 만났다면 해체가 안됐을 텐데요. 저희는 생각이 달랐어요. 다들 상처가 있겠지요."


평범한 인생과 쇼킹한 인생 중 어떤 것을 원했나요?


"(담담하게)개인의 행복으로는 평범한 인생이 낫겠지만 그게 안 되면 튀는 쪽으로 살아야죠. 그게 팔자예요. 내 운명이 이런 거로구나, 긍정하면서 살아요."


평소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산책하거나 집에서 TV 보면서 있어요. 친구들 만나도 술은 못해요. 맛있는 거 먹으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줘요. 전 약간 할아버지 같아요. 쓸데없이 이해하려고만 하죠(웃음)."


이젠 어떤 소리를 합니까?


"저 자신에게 떳떳한 소리를 찾고 있어요. 무당이 굿하듯 제 안에 숨어있던 목소리를 꺼내서 달래주고 싶어요. 일종의 나를 위한 ‘굿’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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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을 파고 사랑방을 지어 깊은 놀음에 심취한 조선 시대 중인들의 문화를 재현한 ‘깊은 사랑' 시리즈에서 장구만 놓고 간결하게 소리를 뽑는 이희문.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키워드가 ‘나다움'이에요. 당신은 그걸 찾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쉽지는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건 두렵거든요. 양손에 두 개를 쥐고 있어서 그래요. 한 손을 풀어서 쥔 걸 놓아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들어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자기를 모른 체하고 사는 거죠. 저도 처음 그물 스타킹에 하이힐 신고 노래하면서 몸에 심하게 병이 왔어요. 거부반응이었죠. 그런데 홍역을 크게 앓고 나니 면역력도 생기고 이젠 맷집도 생겼어요. 지금은 정말 행복합니다."


앞으로 계속 어떻게 존재하고 싶은가요?


"안은미 선생이 그러셨어요. 우린 잠깐 지구에 놀러 온 외계인이라고. 저는 계속 외계인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사는 게 재밌어요. 아랫배에 힘 빼고, 기운이 없는 듯 나긋나긋 놀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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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리의 목적은 단순해요. 노는 거죠.” 한복을 입어도 드레스를 입어도 훌훌 자유롭다는 이희문./사진=이태경 기자

돈과 지식만 추구하는 삶은 생명력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강렬한 영감의 아이디어를 끌어내려면 뜬구름 잡는 사람들과 놀고 또 놀라고, 이희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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