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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좇아 계속 하며 산다" 김완선의 인생 그루브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결혼하지 않은 것,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몸 움직이지 않으면 불행… 행복 멀리 있지 않아"

"정보 줄여야 평상심 유지, 뇌 청순한 게 행복 비결"

"시장 반응 없어도, 10년 간 신곡 발표하는 이유"

"인생은 춤… 할머니 돼도 춤추고 노래할 것"


김완선이 외계인처럼 등장하는 1980년대를 생각해본다. 이지연과 강수지가 버들가지처럼 얇은 허리로 스윙하고, 댄스 머신 박남정이 로봇처럼 꺾기춤을 뽐내던 시절. 고압 전류 같은 목소리를 하늘 높이 쏘아 올린 채, 예열도 없이 무대에 뛰어들어 춤추고 노래하던 김완선.


들판을 뛰는 야생마이자 동시에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 같았던 여자. 80년대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김완선의 눈빛과 춤을 어찌 잊을까.


김완선은 대한민국 가요사에서 너무 일찍 도착한 ‘선물’ 같았다. 글래머러스했던 80년대, 테크노와 미니멀이 융성했던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자 김완선은 서서히 잊혀 갔다. 몇 년 전부터 레트로 열풍이 일고, 김완선이 ‘왕년의 댄싱퀸'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소환될 때마다, 나는 아쉬움이 들고는 했다.


‘과거로만 소비될 사람이 아닌데.'


그러던 어느 날, ‘Here I am(나 여기 있어요)'이라는 김완선의 자작곡을 들었다. 정식 공연 스테이지도 아니었고, 어느 예능 프로그램의 틈새에 주어진, 허름한 국밥집 앞이 무대였다. 눈을 감고 한 음절씩 짚어 부르던 노래 ‘...숨이 멎을 듯이 힘들다 해도, 잊지 마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만든 깊고 청아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노래와 삶이 함께 흘러간다는 게 저런 거로구나.’


김완선을 만났다. 정규 앨범 ‘2020 김완선’을 발표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방송사들이 밀집한 상암동 미디어센터는 때 이른 무더위로 바닥부터 열기가 피어올랐다. 조각 광장 앞으로 진 재킷에 레이스 원피스, 스니커즈를 신은 김완선이 걸어왔다. 더할 나위 없이 쿨한 모습이었다.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와 즉흥과 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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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분들은 제 노래에서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니 반갑고요. 젊은 친구들은 저를 처음 보고, 음악을 찾아듣는 거잖아요. 희망이 보여요.”/사진=김지호 기자

-86년, 17살 첫 데뷔 무대 ‘오늘 밤'을 기억해요? 발레리나 튀튀 복장에 운동화를 신고 뛰어들어서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잖아요.


"그럼요. 지금도 어제 같아요. 생생하죠.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3년 동안 그 무대를 위해 연습했었어요. 하하. 그런데 눈 깜짝할 새 30년도 더 흘렀어."


거리낄 게 없는 사람 특유의 맑은 주파수가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만지면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무지개처럼... 아하하하, 공중을 울리는 웃음소리는 너무 높고 청량해서, 인터뷰 내내 테이블 위로 스파클링 워터가 분무 되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엔 에스트로젠으로 꽉 찬 야릇한 고음이라 느꼈는데, 요즘엔 가벼운 공기방울 같더군요.


"하하, 예전만큼 높지는 않아요. 원래 저는 저음인데 제작자가 고음을 내야 주의를 끌 수 있다고 한 키를 높여버렸어요. 그래서 그때는 노래 못하는 애가 돼버렸잖아. 라이브 할 때 곧잘 삑사리가 나고는 했죠. ‘한 키만 낮춰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웃음). 이젠 자연스럽게 고음이 내 키에 맞게 됐어요."


-노래방에서 김완선 노래 불러본 사람은 알죠, 얼마나 진땀이 나는지(웃음). 작년에 촬영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2019)' 동영상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느낌이 나더군요. 좀비와 삐에로가 어우러진 모습이 굉장히 현대적이었어요.


"할로윈에 맞춰서 에버랜드와 콜라보했어요. 그쪽에서 리서치했는데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삐에로는 날 보고 웃지' 뮤직비디오가 없었던 거예요. 서로 좋았어요."


-세련된 곡이 많아 지금 리메이크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반색하며)그게 다음 목표예요. 알려진 곡도 알려지지 않은 곡도 제가 다시 부르면 더 좋겠다 싶어요."


-어떤 곡을 특별히 더 좋아하죠?


"좋아하는 곡 많죠.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날 보고 웃지’ ‘이젠 잊기로 해요' ‘기분 좋은 날'도 좋아요."


-이번에 발표한 싱글 앨범 중에서 ‘옐로우'와 ‘하이 힐스’ 공식 영상을 봤어요. 김완선은 과거의 레전드가 아니라 당대의 톱 아티스트더군요.


"우와!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그렇게 당도하기까지 걸린 세월이 10년이야. 제가 2011년부터 계속 싱글을 냈어요. 그런데 반응이 없었어(웃음). 현재도 활동하는 가수라는 느낌을 주는 데 10년이 걸린 거예요. 하하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10년 동안 제 손바닥으로 모스부호 치듯 음악 시장을 두드리던 사람이, 갈채에 휩싸여 사는 젊은 스타들보다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반응 없이 무언가를 하기에, 10년은 너무 긴 세월인데요.


"계속 물었죠. ‘내가 하는 이 행위가 뭘까?’ 나 스스로 명분이 필요했나봐요.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쉬지 않고 신곡 내는 가수’라는 명분. 그러다 최근 만난 어떤 분에게 해답을 얻었어요. "당신이 하는 그 행위가 아티스트"라는 거죠.


남들이 보든 안 보든, 어떤 식으로든 자기표현을 하고 사는 사람이 아티스트래요. 그런데 제 기질이 딱 그래요. 동년배 가수들은 묻죠. ‘아무도 모르는 걸 왜 계속해?’ 음… 저는 ‘이상하다, 좋은 데 왜 반응이 없지?’ 궁금해서 또 하게 돼요. 하하. 그렇게 타고났나봐요."


하고 싶은 걸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것, 그 자체로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 귓가에 쨍하게 꽂혔다.


-낙천적이죠?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내 걱정 하는 건 다 남들이야, 하하하. 왜 내 걱정을 그렇게들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반응 없으면 저도 지치죠. 그즈음에 분장실 같이 쓰던 한 탤런트분이 그러셨어요. "가수들은 좋겠다. 한 곡만 히트하면 평생 활동할 수 있잖아." 저는 오히려 그 얘기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히트곡 한 곡 나오기쉽지 않죠. 그런데 또 그 한곡에만 안주하는 건 나하고는 안 맞아요. 저도 방송이나 행사에 가면 히트곡을 부르잖아요. 대중이 원하니까. 그런데 같은 노래를 한 30년 부르면, 저는 얼마나 지겹겠어요(웃음). 그때 생각하죠. 괜찮아, 난 싱글 내는 가수잖아. 그게 큰 위로가 돼요."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죠?


"나와 닮은 곡을 만드는 거예요. 비슷한 유행가를 만들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젊은 시절 활동할 때도 저는 당대 유명 작곡가와는 일을 안 했어요."


-대신 당대 최고의 록 뮤지션들이 곡을 쓰고 사운드 믹싱을 한 거로 알고 있어요. 신중현, 이장희, 김창훈(산울림 멤버), 손무현… 분위기가 그렇게 전위적일 수 없었죠.


"그분들은 다 자기 음악을 했던 뮤지션들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전문 작곡가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개인 활동을 많이 안 하셨었죠. 저는 4집, 5집 내고는 신인들과 많이 작업했어요. 최근 10년 동안도 인디 뮤지션들과 일했고요. 곡도 다 제가 프로듀싱을 했어요. 이유는… 글쎄요, 당대 잘 나가시는 분들은 저 말고도 작업할 사람이 줄 서 있잖아(웃음). 남들 하지 않은 것, 내 색깔이 들어간 걸 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눌수록 김완선에 대한 편견이 하나씩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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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2019)'. 에버랜드와 할로윈 기념으로 만든 세련된 뮤직비디오.

80년대의 김완선은 존재 자체가 센세이셔널이었다. 지치지 않고 춤을 춰서 TV가 가장 사랑했던 가수, 단일 앨범 100만 장 기록을 세운 독보적인 여성 솔로. 한국의 댄스 뮤직을 눈부시게 도약시킨 K팝의 시조이자, ‘마돈나'와 비견할만한 동시대의 퍼포머였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손무현)’ ‘오늘밤(김창훈)' ‘리듬 속의 그 춤을(신중현)’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이장희)... 고압 전류가 흐르는 현대적인 록 사운드, 디스코 비트를 유유히 빠져나가며 펌핑하던 김완선의 몸짓은 고양잇과 동물의 비약처럼 날렵하고 자기충족적이었다.


그리고 2020년, 캡 모자에 노린 트레이닝 수트(일명 ‘조교 룩')를 입고 최소한의 몸놀림으로 비트를 타는 댄스곡 ‘하이 힐즈' 동영상의 김완선을 보면 ‘왕년’이나 ‘한때' ‘방부제 미모'라는 말이 얼마나 낡은 언어인 줄 알게 된다. 몽환적인 EDM 댄스곡 ‘하이 힐즈’는 김완선 31주년 기념 앨범 '디 오리지널'(The Original) 타이틀곡에 참여한 작곡가 나심이, 그녀의 몸에 꼭 맞는 사운드 테일러링으로 완성했다.


귀에 레몬즙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 같은 노래 ‘옐로우'는 밝은 멜로디로 산들거린다.


-과거보다 지금이 더 발전했다고 느끼나요?


"그럼요. 발전했어요. 발전이 여러 의미가 있잖아요. 혼자서 하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이 겪지만 쌓여가는 게 분명 있어요. 댄스도 그래요. 예전 영상 보면 ‘저러다 팔 하나 부러지겠다' 싶어. 하하. 그래도 힘든 줄 몰랐으니 신기하죠. 지금은 그만큼 몸이 안 따라 주지만, 또 느낌은 더 잘 표현해요. 내 나이에 맞게, 조금만 움직여도 그루브가 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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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김완선의 외증조부 한성준(오른쪽 1875~1941). 왕실과 민간·권번에서 행해지던 전통 춤을 체계화시킨 장본인. 최승희에게도 전퉁춤을 가르쳤다.


김완선의 춤의 뿌리는 깊다. 최승희에게 무용을 가르치고, 학춤, 태평무, 한량무 등을 창시하고 정리한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한성준이 김완선의 외증조부. 88올림픽 살풀이춤으로 유명한 무형문화재 한영숙은 김완선의 이모다.


조선의 춤꾼 한성준 선생이 정리한 학춤, 한량무, 태평무를 무대 위에서 본 적이 있다. 버선발 하나, 어깨 한쪽만 슬쩍 들어도 지구의 자전축이 툭 하고 이동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이 이미 알고 있는 춤을, 내 몸이 기억하는 즐거움에 따라 저항 없이 이동시키는 그 충만한 동작들.


그렇게 구한말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그루브와 소울이 김완선의 피를 타고 흐르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요즘의 ‘칼군무'와는 다른 지점에서 해방감을 선물하며.


-댄스 전문가가 당신 춤을 분석하면서 ‘음악의 바다에서 노는 100% 자연산 몸놀림'이라고 하더군요(웃음). 요즘 같은 트레이닝으로는 탄생할 수 없는 동작들이라고. 리듬감은 유전이라고 느끼죠?


"그 부분에서 감사하죠. 당시에도 그렇게 추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이모(매니저였던 고 한백희)의 트레이닝은 혹독했지만, 실상 별것 없었어요. 그냥 음악 틀고 ‘춰봐라'였죠(웃음). 대부분 즉흥적이었어요."


무대에서 김완선의 즉흥은 무질서가 아니라 자족의 극치처럼 보였다.


춤이 그러하듯 삶도 즉흥적이라고 했다.


"즉흥적인 게 가장 나다운 거예요. 나답게 살아야 행복하잖아요. 난 기질상 계산이나 계획을 몰라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거죠. 마음이 가는 대로. 저도 과거엔 ‘왜 나는 남들처럼 못살지?’ 흉내 내려고 했어요. 비슷하게 살아보려고. 그런데 안 돼. 안 되는 걸 어떡해(웃음). 40대 초반에서야 그걸 깨달았어요."


-2006년에 하와이에 간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었나요?


"그날 밤, 가방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하와이에서 보낸 첫날 밤이 잊히지 않아요. 친구 집에 일주일 동안 있다가 방을 구해서 나왔어요. 그때 하와이에서 보낸 시간에 제 인생의 황금기였어요. 2006년 가을부터 2년 동안."


-갑자기 훌쩍 떠난 이유가...


"번아웃이 된 거죠. 그해 초, 그러니까 2006년 1월에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미8군에서 공연한 가수이기도 했던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 한국 최초의 여성 매니저였던 그는 인순이를 가수로 발굴했으며, 후에 조카인 김완선을 데뷔 시켜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인 음악 신을 만들어낸 여걸이다. 김완선의 모든 것을 지휘했지만, 함께하는 13년 동안 조카에게 활동의 대가를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후에 그 자신도 빈털터리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한백희에게 김완선이 갖는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만감이 교차했군요.


"저와 업계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투두둑 끊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해가 또 제가 데뷔한 지 20년이 되던 해였어요. 내가 헤매고 있구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구나, 이러다 이 바닥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발이 묶인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떠났고, 그래서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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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연산 몸놀림을 자랑하는 김완선의 춤.

-어떤 시간을 보냈지요?


"나와 내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 생각해도 답은 없고, 뭐가 맞고 틀린 지도 모르겠고… 문제의 답을 찾은 게 아니라, 문제로부터 그냥 해방이 됐어요. 착지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던 제가 드디어 땅에 뿌리가 박혔어요. 앵커(anchor 닻)가 내려진 느낌이랄까."


-자립이자 자유군요!


"네. 이모와 헤어지고 나서 제가 영화 ‘쇼생크 탈출'을 앉은 자리에서 5번을 봤어요. 그 주인공이 보낸 세월이 남의 인생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 그 끝에 맡은 자유의 냄새…"


-이모의 분신으로 살았다지만, 그래도 당시 김완선 씨 무대에선 자유로움이 느껴졌어요.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저는 100% 이모가 싫지 않았어요. 저와 생각도 느낌도 비슷했어요. 내 자아가 생기고 나란 사람이 내 것으로 안을 채우고 싶은데, 그걸 억누르니까 답답했던 것뿐이죠. 기가 센 애가 눌려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이러다 바보 되면 어떡하지?’ 한 거죠. 이모에게 10년간 복종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나였어요. 그런데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 또 짜증이 났던 거죠(웃음)."


바보로 살까, 걱정했다던 그가 지금은 바보로 살아서 좋다고 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지요?


"어릴 때부터 홀딱 빠졌죠. 친가 쪽에서 그림의 유전자를, 외가 쪽에서 춤의 유전자를 받았는데, 음악이 이겼어요. 팝 음악에 푹 빠져 살았죠. 그 뒤로도 음악 말고는 생활 지수가 다 깡통이에요. 이렇게 바보로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하.


그래도 비 오면 피할 곳 있고, 고양이들과 안 굶고 사니 감사하죠. 몇 번 경험하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게 있어요. ‘산입에 절대 거미줄 안 친다'는 거(웃음)."


-뇌가 정말 청순하군요!


"맞아요. 저는 뇌가 정말 깨끗해요. MRI 결과를 보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세요. "이렇게 깨끗한 뇌는 처음 봅니다! 30대도 이런 뇌는 없어요!" 뇌를 피곤하게 안 하니 혈관도 깨끗하대요. 뇌가 청순한 게 얼마나 좋은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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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청순하고 더 깊어진 김완선./사진=김지호 기자

-언젠가 관객도 몇 명 없는 지방의 허름한 무대에서 당신이 춤추고 노래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좀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활짝 웃으며)그게 행사예요. 할아버지, 할머니들 앉아 계셨죠? 전 노래할 수 있다면 어떤 무대라도 좋아요. 어릴 때부터 이모한테 그 교육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받았어요. ‘돈 받고 노래하는 게 프로다, 프로 가수는 좋은 무대 나쁜 무대 가리지 않고 최고로 불러야 한다’고요.


한창 잘 나갈 때도 지방의 나이트클럽, 스탠드바를 뛰었어요. 차 타고 다니는 게 좀 힘들어서 그렇지, 불러주면 감사히 달려갔어요. 쓸쓸할 일도 아닌 게 그걸로 또 한 계절 먹고 살 수 있었어요(웃음)."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순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감사를 많이 해요. 순간순간 감사를 잊지 않으려고 해요. 가장 좋은 친구는 자연이에요. (바깥을 쳐다보며)저렇게 싱그런 나무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지, 구름은 또 얼마나 어여쁘게 흘러가는지… 내야 될 세금 때문에 얼굴에 빗살무늬가 그려졌다가도, 자연을 보면 금세 펴져요. 하하."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죠?


"엄마요. 낙천적이고 착한 분이세요. 왜 저렇게 바보처럼 살까, 싶을 만큼.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젤 속 편한 거야. 하하. 편안한 마음이 행복의 주춧돌이죠.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맘 편한 게 최고예요."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해요.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하면 저는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결혼 안 한 상태로 30대를 맞았을 때는, 저도 불안하고 미래가 기약 없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외로울 틈도 없어요. 그래서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주눅 들지 말라'고. 살아보니 꽤 괜찮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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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과 함께 사는 그녀는 반려묘의 생활 패턴에 맞춰 집 안의 문을 다 없앴다./사진=김지호 기자

-자신이 언제 자랑스러운가요?


"어릴 때는 자존감이 바닥이었어요. 이모에게 ‘왜 더 잘하지 못하느냐'고 꾸중을 많이 들었죠. 그래서 ‘안 되겠다, 못하겠다' 항상 나를 괴롭혔어요. 이젠 안 그래요.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어떻게 다 잘해?" "이만하면 됐지"예요.


지금 내가 행복한 게 중요해요.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인생이 되는 거잖아요. 미래에 행복해지겠다? 말도 안 돼요. 저는 엉뚱한 곳에서 발버둥 치지 않고, 지금 행복해지기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결심한 내가 자랑스러워요."


그 깨달음을 하와이에서 얻었다고 했다. 그 이후 삶을 다르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이후의 삶은 방황이 없다고.


-평상심이 잘 유지되나요?


"일상에서 정보를 줄이려고 노력해요. 마음 같아선 스마트폰도 없애버리고 싶어. 정보를 차단해야 나한테 집중할 수 있어요. 자극이 많으면 산만해서 내 인생, 내 시간에 집중을 못해요. (잠시 침묵하다)전 늘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가까이 하니 평소에 어디에 가치를 둘까가 선명해져요. 다른 정보에 휘둘리지 말고, 내 인생을 재밌게 살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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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글래머러스한 시절을 관통한 김완선.

-17살 시절로 돌아가도 가수로 살고 싶은가요?


"그럼요. 다만 스타일은 좀 다르게. 가수라는 직업이 정말 행복한 직업이에요. 노래할 때도 행복하고, 내 노래 들으면서도 행복하고 관객과 교감하면 또 행복해요."


-한편 연습 과정은 또 얼마나 치열하고 힘들어요.


"어휴~. 어떻게 공짜로 그 행복을 누리겠어요(웃음)."


-공짜는 없죠. 조용필이 모든 생활을 절제해서 오직 음악에만 몰입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자기 관리를 위해 다른 욕망을 포기하는 편인가요?


"(고개를 흔들며)아니요. 음악을 사랑하지만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니에요. 저는 제 생활과 행복도 소중해요. 일이 있으면 하고, 없을 땐 마음껏 일상을 즐겨요. 스트레스가 몰려와도 빨리 포기하고 잊으려고 노력하면서요."


-변화무쌍한 가요계에서 오랫동안 완성도를 유지하며 커리어를 이어간 비결은 뭐죠?


"(골똘히 생각하다)일찍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14살짜리 아이가 뭘 안다고 "이 길이 내 길이야" 결심을 했을까요? 이모가 "너는 가수가 천직이다" 할 땐 반항도 했지만… 사실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반응 없어도 남 눈치 안 보고, 1인 기획사 만들어서 계속 가는 거죠. 하하하."


늘 깨어있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주로 어떤 음악을 듣나요?


"어린 시절엔 퀸, 이글스, 킹크림슨을 좋아했어요. 지금 들어도 너무 좋죠. 요즘엔 아침에 눈 뜨면 제 노래 ‘옐로우'를 들어요. 30년 넘게 노래했지만, 눈뜨자마자 내 노래 듣는 건 처음이야. 하하. 요 며칠간은 정미조의 ‘귀로'라는 곡도 듣고, 빌리 아일리시도 듣고, 스웨덴 가수 닐스 란드그렌이 리메이크한 ‘I will survive’도 들어요. 경계 없이 모든 장르의 곡을 다 들어요"


-문득 궁금해져요. 김완선에게 최고의 가수는 누구지요?


"김추자 선배님이에요. 그분은 자유 그 자체죠. 그렇게 표현하는 가수는 우리나라에 없었어요. 최근엔 제일 많이 듣는 가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예요. 그 친구도 그 자유로움이 정말 멋있어요."


-자유가 가장 중요하군요!


"자유는 제게 가장 소중한 가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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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이 궁금하면 ‘김완선 오피셜’ 유튜브를 봐달라고 했다. 그곳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사진=김지호 기자

-마지막으로 묻지요. 춤 추는게 여전히 행복한가요?


"한번 춰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음악 틀어놓고 혼자 눈감고 춰보세요. 공간 속에서 움직임이 나오면 그게 춤이에요. 사람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불행해져요. 행복이 먼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음악 속에 푹 잠겨 있으면 그게 행복인 거죠."


한번 사는 인생, 자기를 들들 볶지 말고 춤추듯 살라고 했다. 스파클링 워터 같은 웃음이 분무 되고 또 한 번 김완선이라는 무지개가 떠올랐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이 톤의 성량을 고압 송출하던 소녀도 좋았지만, 33년 동안 자유로운 톤 앤 매너로 무르익은 50대의 김완선은 더욱 좋았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춤추며 콘서트를 하겠다는 김완선. 구름 속의 뼈처럼, 나무를 흔드는 바람처럼, 은발의 댄싱퀸은 얼마나 더 청순할까.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춤’이라는 사실을 그녀를 보며 즐겁게 깨닫는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kimjis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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