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는 선망되어선 안 된다
Opinion
나는 전직 ‘국민 프로듀서’이다. 재작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누구보다 열광적으로 시청한 사람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다. 매일 투표를 하고 홍보를 하며 내가 응원하는 연습생이 최종 멤버로 발탁되기를 바랐고, 그는 마침내 데뷔를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나의 노력이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꿈을 좌절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곧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네 번째 시즌, ‘프로듀스 X 101’이 방영된다. 잠잠해졌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열풍을 다시금 몰고 왔던 전작들의 명성 때문인지 이번 시즌에 대한 대중들의 주목도도 역시 크다. 이전 시즌 ‘프로듀스 48’의 우익 논란과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서바이벌 방식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잡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듀스 시리즈는 탄탄한 화제성과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완벽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하게 되었다.
데뷔를 꿈꾸는 연습생들의 간절함에 대한 시청자의 이입이 프로그램의 주된 인기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레드오션이 된 아이돌 산업에 맨땅에 헤딩으로 뛰어들어 데뷔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무모하게 노력하는 청춘들의 모습은 현실과 타협하며 꿈의 의미를 외면하거나 잊어버린 현대인들에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또한 혹독한 트레이닝과 평가를 감당하며 시련을 극복하고 꿈을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카타르시스 서사로 승화되어 마찬가지로 사회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성장통을 겪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더 나아가 방송은 연습생들의 꿈을 이뤄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자극하기 위하여 데뷔에 성공하지 않으면 마치 그들의 인생이 실패할 것처럼 자극적인 편집과 설정을 통해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야 재미있을 것이고, 시청자의 몰입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에는 참가자들을 분류하는 기존의 등급 체계 중 최하위 등급인 F등급보다 한 층위 더 낮은 X등급을 신설한다고 한다. X등급에 속한 연습생들은 지난 시즌 F등급 연습생들이 조명도 없는 무대 아래에서 잿빛 맞춤복을 입고 무대에 선 높은 등급의 연습생들을 올려다보며 춤을 춰야 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열악한 상황에서 꿈을 꿔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잔혹해진 시스템은 ‘헝그리 정신’의 환상을 부풀리며 청춘의 무모한 노력에 감동하게 할 것이며, 현실의 밑바닥을 부딪치는 현대인들을 대리만족시킬 것이고,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이다. X등급은 결론적으로 프로그램의 인기를 위해 제작진이 설정한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잔혹함을 통해 재미를 유발하는 것은 소위 사이코패스나 할 법한 짓이다. 연습생의 꿈을 인질 삼아 흥미를 부추기는 어른들의 무책임함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해당 방송국은 ‘악마의 편집’으로 프로그램에 재미를 더하고 편집의 타깃인 출연자에게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비난에는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쁜 습관에 관해서 이미 전적이 화려하다. 오랜 시간 동안 인권에 대한 일말의 성찰 없이 방송의 화제성과 시청률을 최우선시하는 제작진들의 오만한 태도로 미뤄 보아 그들은 ‘악마’라는 별칭이 내포하는 권위적 의미에 도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을 수단화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악마들에게 이번에도 어린 연습생들의 꿈이 저당 잡히지 않을까 우려된다.
건전함이라는 수식어로 희석될 수 없는
‘프로듀스 101 시즌 1’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후 담당 PD는 남자들을 위한 ‘건전한 야동’을 만들고 싶었다며 제작 의도를 밝혔다. 방송을 언뜻 봐도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 요소를 흔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놀랍지 않은 발언이다. 순위 체계를 형상화한 피라미드에 차례대로 서서 똑같은 교복을 입고 ‘국민 프로듀서님,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외치며 90도로 인사하는 백한 명의 연습생들은 마치 매장에 진열된 인형들처럼 연출된다. 성적인 요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선택받는’ 인간을 ‘선택하는’ 이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상품화로 직결시킨다는 점에서 프로듀스 시리즈는 포르노와 궤를 같이한다.
‘건전’이라는 합리화로 희석될 수 없는 방송국의 저급한 의도는 목표했던 수요를 충족시키며 제대로 효력을 발했다. 그리고 이는 남성 연습생들이 출연한 다음 편에서도 이어지며 더욱 은밀하고 보편적으로 작동했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 아래서 간과되기 쉬운 남성의 성 상품화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시되었고, 나를 포함한 다수의 국민 프로듀서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평가하고 선택할 수 있는 낯선 상황에 놓여 주어진 권리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유의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참가자들은 남성이기도 하지만 방송국이나 기획사나 국민 프로듀서 및 시청자들에 의해 철저히 ‘을’의 위치에 자리하는 일개 연습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성적 대상화 및 상품화를 묵과하는 것은 남성-여성 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척도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의 윤리적 책임을 망각하게 하는 일이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행해진 대상화 및 상품화는 그다음 편인 ‘프로듀스 48’에서 일본의 걸그룹 AKB48과 협업하며 정점을 찍는다. 프로듀스 시리즈의 투표 시스템은 원래 AKB48의 ‘총선거’ 콘텐츠를 차용한 것인데, 팬이 유권자가 되어 치러지는 총선거에서 득표하지 못한 멤버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하에서 일본의 낮은 여성 인권이라는 교집합에 속해진 멤버들은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잡지 화보를 찍거나 팬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등 온갖 여성 혐오의 표적이 된다. 총선거 시스템은 일본의 후진적 인식과 만나 멤버들의 꿈을 이뤄준다는 명목 하에 팬들에게 사랑받아야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공고히 구축하며 멤버들을 여성 혐오의 굴레에 묶어둔다. 프로듀스 시리즈가 총선거 시스템을 차용한 것도 모자라 AKB48이라는 더 큰 범위의 문화적 상징을 편입시킨 것은 시스템에 대한 제작진의 비판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더욱 은밀하고 파괴적으로 발전하는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가 이번 편에서 정점을 찍을지, 미미한 확률로 반성의 과정을 거쳐 사라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의 정당화
앞에서 프로듀스 시리즈의 인기 요인으로 지목했던 시청자들의 몰입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만한 상황이 시종 제시되는 전개를 통해 심화된다. 선택을 받지 못한 연습생들은 직접 다른 연습생을 찾아가 자신을 어필하게 하거나 순위나 등급이 낮으면 높은 순위나 등급에 있는 연습생보다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등의 설정 제시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대신해서 분노하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억울하게 한다. 현실 사회의 잔혹함을 투영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더욱 상황에 잘 몰입하게 되며 연습생을 정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문제는 ‘피라미드’라는 상징물로 대변되는 계급사회구조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부당한 상황들을 프로그램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으로 상정하여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등급과 순위에 따라 차별을 받고, 가감 없는 평가와 혹독한 훈련에 수치스러워하고 힘들어하며, 제작진이 설정한 바쁜 스케줄 아래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수척해진 모습으로 연습을 하는 안쓰러운 참가자들을 보여주며 국민 프로듀서들의 정서적 지지를 유도했다면 종국엔 그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여 모든 연습생이 동등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결말이 해피엔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해피엔딩은 단순히 피라미드에서 높은 등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룹에 선발되는 멤버를 발탁하는 최종회에서는 선발된 멤버들이 등수대로 서서 기뻐하고, 선발되지 못한 연습생들은 그들이 서 있는 피라미드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프로그램의 뒤틀린 지향점은 피라미드 사회 구조를 그대로 답습한다. 피라미드는 선망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타파해야 할 사회악이다.
연습생들이 진열된 피라미드를 관장하는 국민 프로듀서에게는 갑의 위치가 부여된다. 어린 연습생들의 인권을 짓밟고 상품처럼 다루는 반인륜적 아이돌 산업의 이면을 숨기기는커녕 명명백백히 드러내며 이 또한 타파해야 할 악습이 아닌 감내해야 할 현실인 것처럼 보여준다. 상품과 소비자의 관계에서 상품의 위치에 배치되는 아이돌은 물건이 아닌 사람이며 동시에 노동자이다. 대중과 아이돌의 갑을 관계가 사회문화적으로 고착된다면 아이돌에게 향하는 갑질은 곧 노동자에게 행해지는 것이므로 소비자가 노동자에게 갑질을 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될 것이다.
이는 작년께 발생했던 ‘워너원’의 라이브 방송 논란에서 발견되었던 다수의 견해에서 드러난다.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통해 선발된 그룹 ‘워너원’ 멤버들은 라이브 방송이 켜진 줄 모르고 그들을 괴롭히던 '사생팬'과 정산 문제, 부족한 수면 문제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고 그것은 실시간으로 송출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당하는 불이익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 주목하는 여론은 거의 없었던 반면 그들을 비판하는 여론이 강세였는데, 이유인즉슨 ‘국민들에게 뽑혔으면서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뽑아 줬으니 입 다물고 성실하게 일이나 하라는 식의 갑의 협박은 노동자에게 흔히 행해지는 못된 어른들의 인습이다. 그리고 SNS와 연예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10대 청소년들은 이러한 논리 체계를 그대로 흡수하여 갑질 의식을 재생산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문화를 통해 존속되는 고리타분한 인습을 끊임없이 방관하고 유희한 어른들에게 있다.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외에도 앞에서 언급했던 우익 논란이나 CJ라는 대자본이 주도하는 문화의 독과점 등 프로듀스 시리즈는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방송 및 가요계의 메인 스트림에 당당히 자리하게 되어 그 유해함이 광범위하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서도 우려된다. 그러나 프로듀스 시리즈는 지적되는 비판점에 관해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피드백을 내놓은 적이 없다. 성찰의 부재는 문화의 타락을 야기하기에 곧 방영될 프로듀스 X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면 시리즈는 시즌을 오래 이어가지 못할 것으로 예견한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글을 맺으며 재작년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시청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되돌아본다. 모르고 넘어간 점도 있었지만 응원하는 연습생을 데뷔시키기 위해 알면서도 방관한 문제점이 더 많다. 국민 프로듀서로서 행사한 권리를 통해 누군가를 피라미드에 올려놓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은 분명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피라미드 위 칸으로 올라가는 삶에 한정하기엔 청춘들의 가능성은 너무나 무한하다. 어른들은, 그들이 피라미드에 없어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조현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