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이 피어올랐다, 영화 '라스트 나잇'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한번 든 의심이 계속 된다면 진실로 가는 화살표일지도 모른다. 관성에 이끌린 결혼생활은 떠나지 못하고 이어가는 직장생활과 같다. 퇴사보다 이혼은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만두고 떠나는 일 자체가 어렵다. 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면서 멈출 줄 아는 선택은 힘들다. 시간은 어지간한 것을 해결해준다. 배신은 한 순간이고 그간 쌓인 시간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 아무리 내진설계가 단단히 되어있는 관계일지라도. 영화 < 라스트 나잇 >이 끝나면 짧은 덩어리의 문장이 길 잃은 해파리떼처럼 출렁거린다.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3년차 결혼 생활에 편함을 얻은 대신 덜컹거리는 조안나와 마이클. 여자의 촉이라 해도 좋고, 관객인 제3자가 조금만 눈여겨봐도 눈치챌 수 있었다. 마이클과 그의 직장동료 로라의 이상한 느낌. 조안나는 그나마 솔직한지도 모른다. 끌릴 수 있어, 그녀는 끌릴 만한,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그런데 난 창문으로 정말 보지 말하야 할 걸 본 기분이야, 라고 말했다. 로라에게 고정된 눈빛, 절로 지어지는 미소, 그 분위기. 무엇보다 몇 번의 출장에도, 숱한 날에도 로라의 존재조차 이야기하지 않았다. 막상 그 로라는 조안나에 대해서 좀 아는 눈치다. 기분 나쁘다.
남편 마이클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로라와 무슨 관계인지 캐물으며 궁지로 몰고 가놓고 막상 인정하니까 왜 조안나가 화를 내냐고? 그렇게 궁지로 몰아도 아무 감정 없다고, 그에겐 조안나 뿐이라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로라가 매력적인 사람이더라도, 남편의 입으로 끌린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 별개의 문제다. 이제는 싸움의 법칙이라도 아는 양, 마이클은 조안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먼저 밥을 먹자고 한다. 밥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싸운 것을 잊은 것처럼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지?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고, 그는 맹세했다. 거짓말. 처음부터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좋을 뻔했다. 이미 조안나는 의심하고 있다. 마이클을 잘 아니까.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계속 의심했다간 의부증 아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를 믿어본다. 그가 그 로라와 출장을 가는 걸 보면서도.
조안나의 불안한 예상은 맞았다. 그는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녀의 믿음을 저버리고 결국은 아내가 걱정하던대로 로라와 자버리고 말았다. 로라의 수많은 유혹에 매번 그는 몸을 맡겼다. 시시한 배팅을 걸던 로라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그의 말은 그에게 돌아와야 할 말이다. 잠을 못잤다면서 그녀와 술을 마시고, 풀장에 들어가고, 그리곤 그녀의 호텔방으로. 행복해도 유혹당할 수 있지, 라며 합리화하고 밤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 자괴감에 빠진 그의 얼굴, 자신의 의심이 과했다며 남겨놓은 조안나의 편지에 무너지더니 그녀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랑한다면서.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 마이클이 100% 잘못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니 조안나는 울고 있다. 이상하다. 친구네 강아지는 거실 바닥에 있고, 듣자하니 산책을 갔다가 문을 잠그고 와버렸단다. 한두번 간 집도 아닌데. 산책을 갔다더니 옷차림은 또 차려입었던 것도 같고. 조안나도 어젯밤은 이상했다. 남편의 전화를 여러번 받지 않았고, 마음 속에 담아두고 얘기도 꺼내보지 못한 먼 나라의 남자 알렉스가 찾아왔다. 그녀 역시 마이클과 로라처럼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알렉스를 만나 반가운 눈빛.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는 모습. 누구를 만나는 사람 있냐며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 결혼을 했고, 그녀가 먼저 그를 포기했는데도, 그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겨워지지도 않고,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그가 생각난다고.
알렉스도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 그가 정착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 맴도는 건 그의 성격일까 혹은 조안나를 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일까. 막상 그는 그녀가 미국에서 파리로 용기를 내어 왔을 때 책을 마무리한다며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왜 우리가 잘 되지 않았을까? 괴로워하며 묻는 그에게 장거리라서, 타이밍때문이라 답하는 건 그녀의 핑계에 가깝다. 그녀는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2달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만나는 여자가 바뀌는 그, 혼자일 때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그. 몇 년을 만난 마이클에 비해 채 몇 달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알렉스와 함께하는 생활에 확신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사이냐는 질문에 그 둘은 작아지고 만다. 우린 사실 만나다 말다 하는 사이였어요. 거창한 사이도 아니고, 정식으로 사귀지도 않았던 사이 말이에요.
조안나와 알렉스는 잘 뻔 했다. 그녀가 남편 얼굴을 볼 수 없다며 멈췄기 때문이다. 그도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게 이 영화를 다른 막장 아침드라마로부터 다르게 해주는 부분이다. 맞바람이 아니다. 한 명은 상대적으로 육체적인 관계보다 마음으로 아주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한 명은 마음보다는 육체적인 관계로 다른 이와 밤을 지새워버렸다.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는 건 사실상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건 둘 모두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어젯밤의 흔적이 한번의 포옹으로 부부에게 전달된다. 조안나는 향기에 민감하다. 그가 아무리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 로라의 향기를 놓쳤을까? 게다가 이상하게 일찍 돌아왔다는 점도. 마이클은 구석에 널브러진 보라색 구두를 보며 생각할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라 차려입고 나갔을까.
아프다. 놓친 사람과 놓쳐야 하는 사람, 끌림과 믿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조차도. 이 영화에서 가장 나쁜 건 결혼제도일 것이다. 대체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도, 지금의 우리도 어떻게 한 평생을 한 사람과 함께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물론 과거에도 두 사람이 오롯이 함께 하는 결혼생활은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엔 일부다처제 등이 훨씬 성행했고 현재엔 이혼율이 점점 높아진다. 그럼에도 기본값은 두 사람의 결혼이다. 약혼이며, 결혼이며, 서약이며, 온갖 사람들을 초대한 식. 사회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는 것을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금기처럼 만들어둔다. 각종 상징과 의식, 관습은 이미 한 평생의 결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한결같은 마음은 결혼이 아닌 어떤 사이에서조차 어렵다. 참 희한하지. 처음엔 이렇게 될 줄 전혀 생각 못했을 텐데. 결국 변하고, 흔들리고, 상처받고, 헤어지고, 다시 또 호기심에 빛나고.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될까. 알렉스와 로라는 입장이 분명하다. 매어있지 않은 존재라서 그런지 감정에도 막힘이 없다. 그렇다면 마이클과 조안나는? 마이클이야 먼저 조안나를 정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그녀와 하는 생활이 딱 편하니까. 그러나 로라와 완전히 끝낼지는 미지수다. 마이클은 정말 한번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지난 밤의 후회로 얼룩진 아침마저도 그는 여전히 로라의 발목을 어루만졌다. 벗어나지 못했다. 로라는 언제든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유혹할 수 있다.(오, 로라는 정말 보통이 아니다.) 마이클은 결국은 자발적으로 유혹당할 것이다. 그러다 열기가 식어버리면 정리할 수는 있겠지.
슬픔에 잠긴 조안나의 표정. 그녀는 마이클을 떠날 수도 있다. 마이클과 함께 한 3년의 시간을 흔들 만큼 알렉스가 너무나 자주, 많이 떠오른다면. 마이클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보다도 알렉스와의 이별로 이렇게 눈물 흘리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마음을 눈치챌 것이다. 마이클이 하는 달달한 말은 닭살스럽고 알렉스가 하는 말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그러나 그녀는 먼저 알렉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의 어젯밤 외도를 눈치채고 그에게 확답을 받고 나서 가라앉을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내가 바람을 피면 용서하지 못할거라고 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나에게도 신의는 너무나 중요한 거라고. 그녀는 처음 마이클에게 로라 문제로 싸웠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번이라도 당신이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처럼 느끼게 한 적 있었어? 이번엔 다시 말했겠지. 내가 한번이라도 당신이 한 행동처럼 한 적 있었냐고. 나는 똑같은 상황이 주어졌을 때 당신 생각하면서 거절했다고. 당신은 내 생각 전혀 나지 않았냐고. 그와 함께 있는 순간마다 그와 로라가 한 침대에 있는 상상이, 비즈니스로 인한 야근이나 출장조차 이제 그녀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배신은 걷잡을 수 없이 슬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기억이 필름이라면 배신을 입힌 영사기에는 수많은 장면이 끊임없이 돌아가겠지.
다만 마이클을 떠난다 해도 얼마나 오래 떠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안나는 이미 연애할 때도 마이클과 헤어졌을 때 알렉스와 함께 한 적 있으니까. 영화 <비포선셋>이 떠오른다. 마음 속으로 계속 좋아하던 두 사이. 그녀는 제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결혼에 종지부를 찍고 계속 마음에 두던 사람의 곁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알렉스는 믿을 수 있을까? 그를 찾아간다면 그는 '편하게 만나는' 헬렌을 정리하고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필요한 순간에 온전히 시간을 쏟아줄까.
조안나가 의심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의심을 하면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뭔가를 믿고 상처받는다. 사랑도, 결혼도, 믿음도 의심하면 좀 어떤가. 사랑은 깨지고 결혼은 무너지고 믿음은 금이 간다. 사랑한 만큼, 결혼에 충실했던 만큼, 믿음이 단단했던 만큼, 고통스럽고 아프게. 의심이 피어올린 꽃은 매혹스럽다.
조안나의 사랑은 마음 아파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글이 궁금해졌다. 망했다는 첫 책이, 분신같다던 그 책이. 편하게 글을 썼으면 좋겠다. 의심을 담았으면 좋겠다. 모든 믿을 만한 것들에 대한 의심.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재미 없는 주얼리 잡지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을 손대지 못하는 의심에 빠지는 게 아니라, 결혼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를 놓치고,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안고 과거에 하지 못했던 것들에 미련만 갖는 게 아니라, 이 편하고 메마른 삶 자체를 벗어난다면.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그녀가 애당초 두 남자 중에서만 선택할 필요가 있나. 그녀가 선택할 것은 그녀의 마음이다.
* 키이라 나이틀리가 가장 아름답게 나오는 영화라 생각한다. 오만과 편견 속 엘리자베스일 때 청초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면 여기선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매력이 눈빛만으로도 뿜어져 나온다.
장지원 에디터 rhksfl6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