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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책

시인의 저녁편지

신발책

지하철을 타면 책이 잘 읽힌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제법 많은 부분이 지하철을 타고 읽은 것이다. 지하철에서는 집중이 잘 된다. 이따금 가벼운 책 한 권을 들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보다는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가는 동안 책을 읽는 때가 많다. 재미있는 책일 때는 내릴 역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는 왜 책을 더 자주 읽게 되나. 내 경우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해서가 하나의 큰 이유 같다. 멀뚱멀뚱 건너편 좌석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참 머쓱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난감하다. 거기다가 눈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은 정말 처치곤란이다. 그 시간이 몇 초간 지속 되면, 마주 볼 수도 시선을 거둘 수도 없어 속으로 쩔쩔맨다. 먼저 거두자니 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바라볼 수도 없고.

 

우리나라의 도시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인 경우는 별로 없다. 지하철 안에서 만이 아니라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비슷하다. 무심한 시선을 넘어 경계하거나 멸시하거나 슥 훑어보는 시선일 때, 타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삶이 각박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친절한 표정을 짓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일 것이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눈길이라도 만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래로 눈을 내려 책이나 읽는 수 밖에.  무리해서라도 무거운 책을 지고 다니는 이유이기도하다. 

 

어쩌다 책이 없는 날은 난감하다. 그럴 때는 시크한 척 눈을 내리깔고 책 대신 신발을 읽게 된다. 신발책은 종류도 다양하다. 운동화, 하이힐, 구두, 부츠, 군화, 샌들, 슬리퍼. 대충 큰 카테고리로 분류해도 이 정도다. 재질, 높이, 디자인에 따라 세부 카테고리로 분류하면 그 종류는 어마어마하다. 지하철 한 량에 타고 있는 사람 가운데 똑 같은 신발을 신은 사람은 거의 없다. 

 

잘 닦인 구두, 먼지 묻은 구두, 한쪽 굽이 닳은 구두, 굽이 높은 구두, 굽이 낮은 구두가 저마다 입을 연다. 아, 오늘 회의는 길고 지루했어. 많이 걸었지만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못했어. 어떻게든 나를 크게 보이게 하고 싶었지. 조금 높은 곳의 공기는 더 신선할 것이라 기대했지. 내 허영에 생의 발목이 상하는 줄 몰랐어. 레드카펫을 걷고 싶었지만, 오늘도 비포장도로였어. 바르게 걷는 줄만 알았지, 걸음의 방향이 비뚤어진 걸 몰랐어. 내가 걸어온 인생의 방향도 비딱했을까.  출발점에서 조금 어긋난 각도 때문에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서 얼마나 거리가 멀어졌던가.

 

구두는 수다스럽다. 구두는 때로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구두에 실려 오는 것이다. 구두가 책보다 더 많은 페이지를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두꺼운 구두책들을 다 읽지 못하고 목적지 역에서 내리곤 한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으면 타인과 눈길 마주칠 걱정이 없기는 하다. 그래도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 지하철을 탈 때 책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이 남아있다. 구두를 읽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양으로 그 불안이 줄어들어 다행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평일의 중년남자의 등산화다. 조금 기가 죽어있고 침묵한다. 이봐요. 등산화. 입을 열어보시오. 여전히 묵묵부답. 말 안해도 짐작되는 것이 있다. 억, 내릴 역을 놓친다. 남의 신발을 읽다가 약속에 지각하게 생겼다. 음, 아무거나 읽으려드는 것도 병이다. 형광 연두빛 승리의 여신 로고를 양 옆에 달고 있는 내 낡은 자주빛 운동화는 어떻게 읽혔을까. ( the E)

 

글 최정란(시인) :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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