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백 년의 시간보다 더 고통스러운 하루를 견딘다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고통의 정도를 감히 추측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끔찍한 고통에 관해 쓴 작가가 있다. 바로 세계적인 작가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이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다. 그가 쓴 『백 년보다 긴 하루』는 키르기스스탄의 ‘만쿠르트, 혹은 도넨바이’로 불리는 전설을 토대로 쓴 장편소설이다.
만쿠르트/도넨바이 전설
츄안츄안 부족은 스텝의 다른 부족들을 잔인하게 정복했다. 그들은 전쟁 포로들의 사지를 묶고 머리를 밀고 낙타 가죽을 포로의 머리에 씌웠다. 그다음 사막으로 데려가서 물과 음식을 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낙타 가죽은 뜨거운 햇빛 아래 마르면서 접착제처럼 머리를 옥죄게 된다. 모자를 씌우면 머리카락이 자라다가 가죽에 막혀 거꾸로 머리를 파고든다. 사 나흘간 지속된 고문 속에서 대여섯 명 중에 한둘이 살아남는다. 생존자들은 그 끔찍한 고통 때문에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츄안츄안 부족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전쟁 포로들을 스스로 인간인 줄 자각하지 못하는 노예인 ‘만쿠르트’로 만들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동료가 만쿠르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찾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졸라만의 어머니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다가 마침내 아들 졸라만을 만난다. 그러나 졸라만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들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나 츄안츄안 부족이 나타나 어머니는 도망간다. 츄안츄안 부족은 졸라만에게 여자의 정체를 묻고 졸라만이 모른다고 하자 다시 여자가 찾아오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다음 날 어머니가 졸라만에게 다시 다가가자 졸라만은 어머니에게 활을 겨눈다. 어머니는 졸라만에게 자신이 졸라만의 어머니이며 아버지인 도넨바이는 최고의 명사수였다며 설득한다. 그러나 졸라만은 화살을 쏴 결국 어머니는 죽게 된다. 그때 어머니의 머리에서 떨어진 하얀 스카프가 한 마리 하얀 새가 되어 날아가면서 “네 아버지는 도넨바이였어. 도넨바이, 도넨바이.” 라고 지저귄다. 지금도 사로제끄 사막에서는 나그네들이 나타나면 그 새가 “도넨바이”하고 울며 날아다닌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새를 도넨바이라고 한다.
기억을 말살한 후 노예(만쿠르트)로 만들었던 츄안츄안 부족의 고문은 중앙아시아 튀르크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자신의 뿌리와 근본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7대 조상까지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억해야만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튀르크인은 조상숭배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튀르크인들에게 기억을 빼앗긴 채 만쿠르트로 살아가는 상황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가장 끔찍한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전설은 집단적 기억의 소중함,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백 년보다 긴 하루
『백 년보다 긴 하루』는 '만쿠르트/도넨바이' 전설을 토대로 쓴 장편소설이다. 『백 년보다 긴 하루』 은 카자흐스탄에 있는 초원의 간이역 철도원 예디게이가 그의 오랜 친구였던 카잔갑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30㎞ 떨어진 나이만 부족의 공동묘지로 향하면서 한 세기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하루 동안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에서 우리는 일상과 전설, 현실과 환상, 하루와 세기가 만난다. 작가는 설화를 기반으로 두고 과거의 전통과 도덕적 경험을 제시하여 현대와 대립시킨다. 또한 작품 서사 전개 과정에서 행성과 외계인 같은 공상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어부였던 예디게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뒤 철도 노무자가 되고 카잔갑의 설득으로 부란늬 간이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40년 동안 같이 일해 온 동지 카잔갑이 세상을 떠난다. 카잔갑에게는 자식이 있지만 예디게이만큼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는 없다. 카잔갑의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디게이는 카잔갑이 생전에 원하던 아나-베이잇에 그를 묻기로 한다.
아나-베이잇은 전설적인 묘지다. 츄안츄안 부족은 사르-오젝을 정복하는 과정에 포로가 된 나이만족 전사들에게 모진 고통을 가해 기억을 말살시키고, 그들을 만쿠르트라는 노예로 만들었다. 츄안츄안족은 포로들의 머리를 밀어버린 뒤 낙타의 가죽을 도려내어 수영 모자처럼 자른 모자를 씌우고 족쇄를 채운다. 그리고 땅에 머리를 대지 못 하도록 큰 칼을 채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땡볕 아래 사나흘 동안 내버려 두는데 초원의 뜨거운 햇볕에 가죽이 포로의 머리를 압박하고 자라나는 머리카락이 질긴 시리를 뚫지 못한 채 구부러져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더욱 심한 고통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포로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과거의 삶을 기억할 수 없는 "만쿠르트"라는 노예가 된다.
나이만족 여인은 아들이 츄안츄안 부족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다. 만쿠르트가 되어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물어보며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만 아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주인의 명령을 받은 아들은 끝내 어머니를 화살로 쏘아 죽였는데 그때 어머니의 머리에서 떨어진 흰 수건이 도넨바이라는 새로 변하여 밤이면 아나-베이잇 묘지를 날아다니다가 여행자를 만나면 “네가 누구 자식인 줄 아니? 내 이름이 뭐지? 네 아버지는 도넨바이였어! 도넨바이! 도넨바이!” 하며 운다는 전설이 생겼다.
따가운 햇볕 아래 예디게이는 지친 장례행렬을 인도하며, 부란늬 간이역 철도 노무자로 왔던 아부탈립을 생각한다. 아부탈립은 교사 출신으로 참전 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 부대를 위해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포로라는 오명 등으로 인해 결국 부란늬 간이역까지 오게 되었다. 아부탈립은 이후 예디게이가 들려준 사르-오젝의 전설과 자신의 과거사를 자식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글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검열에서 발각되어 반역자로 몰린 끝에 처형을 당한다.
연정을 품었던 아부탈립의 아내 자리파가 아이들과 함께 도시로 떠나자 예디게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따분해졌다. 사르-오젝에 신물이 났다며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생전의 카잔갑은 “자네는 라이말르-아가가 아니고 나도 압딜한은 아니네.”라며 충고했다. 잔칫집에서 만난 베기마이라는 미녀와 음탕한 노래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그의 부족과 동생에 의해 나무에 묶인 채 죽어가며 부른 유명한 소리꾼의 노래가 장례식 내내 예디게이의 머리를 맴돈다.
검은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내 손을 풀어주렴, 내 동생, 압딜한.
푸른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나를 자유롭게 해 주렴, 내 동생, 압딜한.
짐작도, 생각도 못했지
네가 나의 손과 발을 묶으리라곤.
검은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푸른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내 손을 풀어주렴, 내 동생, 압딜한,
나는 자유로이 하늘로 떠나리…
검은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나는 장터에 없을 것이요, 베기마이.
푸른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그대는 장터에서 나를 기다리지 마오, 베기마이.
그대와 함께 우리는 장터에서 노래할 수 없으리,
내 말이 데려다 주지 않으니, 나 스스로는 못 가리.
검은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푸른 산에서 목자들이 이동할 때,
그대는 장터에서 나를 기다리지 마오, 베기마이,
나는 자유로이 하늘로 떠나리…
힘들게 도착한 묘지 입구에는 우주선 발사기지가 있는 군사시설의 보호를 위해 철조망이 쳐져 있어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하다. 예디게이는 참전 시 받은 훈장을 보이며 부탁하지만 보초는 상관의 명령이라며 끝까지 거부할 뿐이다. 결국 부근의 낭떠러지에 카잔갑을 묻고 기도문을 읽고 예식을 마친다. 예디게이는 동료들에게 자신도 그곳에 묻어달라고 부탁을 하며 사빗잔에게 묘지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지만 우주선 발사기지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어쩔 수 없다는 사빗잔의 말을 들으며, 예디게이는 그를 만쿠르트라고 생각한다.
다른 매체로 각색된 작품들
영화 <만쿠르트>
<만쿠르트>는 (극본: Mariya Urmatova, 감독: Hojakuli Narliyev) 1990년에 러시아에서 개봉한 영화이다. <만쿠르트>는 만쿠르트 설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사람들이 조국을 잊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 언어 및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만쿠르트>는 좀비에 대한 해석이 돋보인다. 좀비는 주술에 걸려 자신의 의지 없이 노예처럼 일만 하는 피지배자, 노동계층을 말한다. 이것이 영화에서는 폭력성을 지닌 현재의 노예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전쟁 포로에게 말머리 가죽을 씌우고 주문을 외워 노예로 만드는 모습이 그려진다. 설화의 끔찍한 고문이 영상화되어 우리에게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이 영화 속의 만쿠르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며 중앙아시아가 소비에트연방에 의해 그들이 가진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상실한 것을 상징한다.
애니매이션으로 각색된 만쿠르트
애니메이션 [Legend of Mankurt] 는 물질문명과 마약에 찌든 현대인을 '만쿠르트'에 비유한 애니메이션이다. 6분 정도 길이의 애니메이션은 섬뜩하고도 기괴한 음악 속에서 반복되는 현대인들의 생활은 우리에게 현대인의 모습이 과거 강제로 노예가 된 '만쿠르트'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만쿠르트'와 고려인-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고려인들은 스탈린 시절에 자신들이 ‘만쿠르트’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만쿠르트는 침략자들이 머리에 가죽을 씌워 기억을 잃어버리게 만든 노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 채 노동만 하고 살아가는 키르기스스탄 전설 속 형상이다. 고려인들은 1860년대부터 두만강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때 이미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민(棄民)이자 굶주린 기민(飢民)이었다.
'만쿠르트'라는 용어는 현대에 자신의 문화적 뿌리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개괄한다. 책에서는 과거 고려인들의 삶을 ‘만쿠르트’ 노예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의 설화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전설은 현대에 영화, 소설, 만화 등 무수한 매체에 여전히 존재한다. 머나먼 나라의 설화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그 수많은 이야기 줄기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고문으로 모든 뿌리를 잃어버린 노예처럼, 소설 속의 끔찍한 하루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살아있는 "만쿠르트"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이승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