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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아들은 어쩌다 ‘마약상·친일파’가 됐나

ⓒMBC <선을 넘는 녀석들> 캡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좇는 여러 TV 프로그램(선을 넘는 녀석들, 같이 펀딩 등)들이 연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배우와 스타 역사학자가 나서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이지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한 해 내내 전국 곳곳에서 있었고, 대한민국 독립운동 성지 중 한 곳인 경상남도 밀양시에서도 의열단 창단 100주년 행사가 열리고 기념탑과 공원도 만들어졌습니다. 한 해 전에는 약산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기념관이 개관됐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사이에 조선의열단과 밀양 독립운동사를 강의하고, 100년 전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삶을 잊어버리지 말자며 ‘기억투쟁’ 이끌어가는 최필숙 선생이 쓴 <끝나지 않은 그들의 노래>도 출간됐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는 가장 열정적인 역사 교사이자 역사학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 가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 교류하고 공감하며 ‘기억투쟁’을 함께해 온 동지이기도 합니다.

'밀양을 독립운동 메카로' 교사 최필숙

최필숙이 쓴 <끝나지 않은 그들의 노래> 겉표지

박차정 여사의 묘소를 돌보고 사람들을 이끌고 조선의열단 김원봉 장군의 막내 여동생을 위로하고, 해마다 중국 태항산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소개하러 다니며, 사람들이 부르는 곳마다 달려가 열정적인 강의로 조선의열단과 밀양 독립운동사를 강연하고 있었습니다.


4년 전 그의 첫 번째 강연을 듣고 ‘의열단과 김원봉, 윤세주’를 제대로 알게 됐고, 4년 만에 다시 듣는 그의 두 번째 강연을 통해 조선 최고 부자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가족들은 얼마나 비루한 삶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최필숙이 쓴 <끝나지 않을 그들의 노래>는 ‘약산(김원봉)의 그림자’와 ‘석정(윤세주)의 노래’라는 소설과 시를 통해 김원봉과 윤세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일대기 소개돼 있습니다. 짧은 두 편의 글이지만 고향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두 독립운동가의 우정과 동지적 신뢰 그리고 반일 투쟁에 쏟는 그들의 온 생애를 짐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등골이 오싹했던 것은 대한민국 최고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확인하는 대목들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겁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본문 중에서)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죽음 이후에 중국으로 이주해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지속합니다. 그런데 안중근 가족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준생은 처가의 권유로 헤로인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 방문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서울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가 지어져 있었는데, 안준생은 총독부의 지시대로 박문사를 찾아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장면’을 연출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내선일체를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선전에 놀아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겪게 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죄인’처럼 살다 간 영웅의 아들

남겨진 안중근 가족의 가족 사진 ⓒMBC 캡처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이지요. 안중근의 아들이 마약상으로 살았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아버지가 죽인 원수의 아들을 만나 사죄와 화해의 자리에 섰다는 것은 더욱 기막힌 사건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 아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들의 자식은 성공하고,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가족에게 영웅입니다.” (본문 중에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해방 후 몰래 귀국해 끝내 죄인처럼 지내다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가족 중 11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으나 그의 아들은 죄인처럼 살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의 뜻을 좇아 일본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때, 갓 태어난 핏덩이였던 안준생은 궁핍한 삶을 벗어 던지기 위해 모두가 기대하는 ‘안중근의 아들답게’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선의열단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 무덤에서 답사팀을 안내하는 저자 최필숙

분노보다 슬픔이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건 제가 나이 들어가는 탓일까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영웅의 아들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매헌 윤봉길의 아내 배용순에 관한 이야기도 가슴이 서글픕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 천장절 축하연 현장에 폭탄을 명중시킨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올해만 해도 여러 방송을 통해서 소개됐습니다. 많은 분이 윤봉길 의사가 남긴 편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아실 겁니다. 저도 상해 홍커우 공원 기념관에서 이 편지를 읽으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본문 중에서)

‘윤봉길의 아내가 된 불행’

하지만 저를 비롯한 많은 분이 윤봉길 의사 아내 배봉순 여사가 ‘윤봉길의 아내가 된 불행’이라는 글을 남겼다는 사실은 모를 겁니다. 저는 최필숙 선생의 강연에서 듣고 <끝나지 않은 그들의 노래>에서 처음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 글의 일부가 편집 소개돼 있습니다.

“같은 해 동짓달 중순에 오오사카의 위수 형무소로 이감되었던 남편을 면회해 보겠다는 ‘호사스러운 생각’ 같은 것은 해볼 수조차 없었다. 섣달 열 아흐렛날 베틀에 앉아 명주를 짜고 있으니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와 남편의 처형을 알려주었다. (...) 내 설움이 처음으로 터진 때는 둘째 아들 담이가 죽었을 때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몰랐던 담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복막염으로 죽었다. 온 몸의 피가 모두 눈물이 되어 나온 듯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며칠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이때쯤 남편이 돌아와 주어야 마땅하리란 생각을 하며 울고 또 울었다.” (본문 중에서)

해방되고 윤봉길의 뼈가 일본에서 돌아와 장례를 치르던 날, 화려한 장례식장에서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살아 있음이 욕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합니다.

“봄과 가을이면 학생들이 소풍을 와 남편을 기리는 일을 할 때면 내 남편의 장엄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남편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었다. 남편과 관계된 자리엔 되도록 나서지 않았다. 한 불행한 아낙네의 삶에 씌워지는 가당찮은 비단옷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오늘날 국민들이 윤봉길과 안중근을 제대로 적을 타격한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아내와 자식들이 치른 대가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참혹했던 것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이 저물어 가는 올해 끝자락에 최필숙이 쓴 <끝나지 않은 그들의 노래>를 읽으며 처음으로 그 가족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윤봉길의 의거와 함께 배봉순 여사의 피눈물 나는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강우규 열사의 폭탄투쟁을 비롯해 의열단의 국내 총공격, 박재혁, 김익상, 김상옥, 김시현과 황옥, 나석주의 의거에 대해서도 짧은 단편 영화처럼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고 전홍표, 황상규, 김대지 같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졸업생 시인 이육사와 <중국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률성에 관한 이야기도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직썰 필진 잡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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