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산·바다·들을 만나다…변산 마실길 1·4코스
걷고 싶은 길
(부안=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걷기 열풍 발원지인 제주 올레길은 바닷길, 지리산 둘레길은 산길이다. 이에 비해 변산 마실길은 걸으면서 산, 바다, 들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바닷가 길을, 때로는 산길을 걷는가 싶으면 어느새 여행자는 너른 들에 나와 있다. 변산 마실길만의 매력이다.
솔섬 [사진/전수영 기자] |
◇ 1코스, 황홀한 바다 바닥 걷기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형 국립공원이다. 반도이기 때문에 바다와 육지가 어우러져 산, 들, 바다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승지, 관광지가 많다. 변산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8경으로 꼽혔다.
마실은 '마을'의 사투리로, 마실길은 옆집 놀러 가듯 걷는 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변산반도 서북쪽인 새만금 방조제 남쪽 끝 지점에서 시작해 변산반도 남동쪽인 줄포만갯벌생태공원까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마실길은 1코스에서 8코스까지 8개 코스로 나눠진다.
총길이는 66㎞ 정도다. 변산 해안의 길이는 약 99㎞이며, 새만금 방조제 길이가 약 33㎞다. 변산 해안의 약 3분의 2, 새만금 방조제 길이의 약 2배가 마실길로 조성된 셈이다.
1코스는 새만금 전시관∼대항리패총∼변산해수욕장∼송포포구로 이어지는 약 5㎞ 길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안 야산 길과 바닷길 중 하나를 선택해 걸을 수 있다.
여기서 바닷길은 물이 빠지고 난 뒤 드러나는 바다 바닥을 말한다. 마실길 코스 중에는 간조 때 이처럼 갯벌을 비롯해 바다 바닥을 걸을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간조 드러난 바닷길 [사진/전수영 기자] |
우리 일행이 방문했을 때 변산의 물때는 사리였다. 전날 저녁의 만조가 오전 10시쯤에는 쭉쭉 빠지고 있었다. 바다 바닥, 갯벌이 드넓게 드러났다.
걷기의 출발점인 전시관 쪽 야산에서 바라보니 새만금 방조제가 북쪽으로 쭉 뻗어있고, 멀리 고군산 열도가 눈에 들어왔다.
방조제 바깥쪽 갯벌은 바다와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끝없이 펼쳐진 듯했다. 바닷물이 빠진 해안가에는 붉은색, 검은빛의 큰 기암괴석들이 흥미를 돋운다.
나지막한 야산 길은 지금이 겨울인가 싶게 잡풀들이 곳곳에 파릇파릇 돋아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 군데군데 군 초소의 흔적이 있고, 오래된 철조망이 남아 있었다.
변산은 바다로 툭 튀어나온 지형으로 인해 1960∼1970년대 북한 간첩들의 침투 지점이 되곤 했다. 그때 만든 시설인데 마실길을 조성하면서 굳이 철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울한 역사도 기억의 가치가 있으리라.
변산에는 소나무가 많다더니 적송과 해송이 섞여 있다. 변산에는 '3변'과 '3락'이 있다. 삼변이란 소나무, 꿀, 난초다. 삼락이란 볼거리, 먹거리, 이야깃거리를 말한다.
자연·기후 환경이 온화하고 육·해산물이 풍부해 문화와 역사가 깊은 변산의 삶을 잘 말해주는 표현들이다.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이라는 말이 있는데, 변산이 속한 부안 지역이 살아서 거주할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간조 때 드러난 갯바위에 붙은 왜홍합, 따개비 [사진/전수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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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걷기를 어느 정도 맛본 뒤 드디어 바닷길로 내려갔다. 발밑의 갯벌 느낌이 단단하다. 조개와 게가 숨어 있는지 바닥에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다.
지금 걷는 길이 어제 저녁에는 바닷속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 '나는 지금 바닷속을 걷고 있다'고.
걷기 열풍이 분 지 20년쯤 됐으려나. 우리나라엔 뚜벅이들이 걷을 수 있는 길이 참으로 다양하다고 새삼 깨닫는다.
작은 섬 위로 올라가 능선을 걸어보라. 좌우 양쪽으로 청정 바다가 펼쳐지고, 뒤에는 숲, 앞에는 푸른 하늘이 걷는 이를 보듬는다.
우리나라 어딘가엔 뚜벅이들이 위태로운 절벽 끝에서 불안은커녕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벼랑길도 있다.
바닷길에 내려와서 보니 육지를 따라 검붉은 화강암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정기영 해설사는 "암석이 어두워 보이는 이유는 철, 마그네슘 같은 중금속이 많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변산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산암, 퇴적암이 많아 2017년 전북 서해안권 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채석강 [사진/전수영 기자] |
마실길 3코스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라는 빼어난 명소가 있다.
채석강은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 채석강에 비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적벽강은 소동파가 놀았다는 중국 적벽강처럼 경치가 뛰어나 지어진 명칭이다.
적벽강과 채석강은 퇴적암 절벽과 바위인데, 변산해수욕장을 품은 1코스 바닷가에 있는 화강암은 적벽강과 채석강보다 생성 연대가 더 오래됐다는 게 지학 교사 출신인 정 해설사의 설명이다.
속살을 드러낸 바다 바닥에 누운 바위들에는 굴, 왜홍합, 따개비 등 작은 조개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아무 움직임이 없지만 모두 살아있는 조개들이다. 물이 들어오면 따개비의 뚜껑이 열린다고 한다.
물결무늬가 난 바다 바닥은 어느새 변산해수욕장 모래밭으로 연결됐다.
1933년에 개장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 중 하나이고, 서해안 대표 해수욕장인 변산해수욕장은 푸른 솔숲이 인상적이다. 변산해수욕장의 또 다른 이름인 '백사청송'이 허명이 아니다.
◇ 4코스, 고품격 항구에서 외로운 소나무 섬까지
4코스는 격포항 해넘이공원에서 시작해 솔섬에서 끝난다. '격포'라는 이름이 관심을 끈다.
격포항 앞바다가 어족자원이 풍부한 칠산어장이다. 칠산어장 덕에 먹거리가 풍부하고, 경관이 뛰어나 품격이 높은 항구라는 뜻에서 격포항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조기, 갑오징어, 주꾸미, 숭어 등 어류와 조개가 풍부하다.
솔섬은 낙조가 아름다운 서해안에서도 저녁노을이 빼어나기로 이름이 높다.
소나무 몇 그루가 있고, 섬이라는 명칭이 무색하리만치 작은 바위에 불과한데 사진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뭍에서 솔섬을 바라보면 떨어지는 해가 소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마치 여의주를 문 용의 형상을 연출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구름이 많아 그런 장관은 상상 속에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궁항 [사진/전수영 기자] |
격포항부터 솔섬까지 걷는 동안 산, 바다, 들판, 마을로 경관이 차례차례 변했다.
산길을 걷는가 싶으면 바다가 나타나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바다인가 싶었더니 어느새 발은 마을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은 골목길에서 다시 해수욕장 길, 항구 길로 바뀌었고, 아스팔트 길은 흙길로, 모랫길로 이어졌다.
4코스는 약 6㎞, 보통 걸음으로 1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이처럼 다채롭다 보니 지루할 새가 없었다. 길도 평탄해 피곤할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춘희 해설사는 "사드락 사드락 걷다 보면 복잡한 삶에서 놓여나게 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사드락 사드락'은 여유로운 걸음을 표현하는 사투리 같은데 마실길에 어울리는 어감을 준다.
격포항과 솔섬 사이에는 격포리 봉수대, 전라좌수영세트장, 요트경기장, 궁항, 상록해수욕장 등이 있다.
공전의 히트를 했던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찍었던 전라좌수영세트장 앞에는 소리섬이라는 작은 섬을 볼 수 있다.
흐리고, 파도가 꽤 높은 날이었는데도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거칠지 않고 차분하다. 바닷소리가 아름다워 소리섬이라고 지었나 보다.
궁항 마을 [사진/전수영 기자] |
작은 어촌인 궁항의 이름은 바다 쪽에서 보았을 때 항구 모양이 활처럼 보이는 데서 연유했다.
어느 멋진 카페 유리창 앞에는 물메기 20여 마리가 줄에 매달려 건조되고 있었다. 부조화의 조화라고나 할까.
궁항 앞에 개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개섬, 소리섬, 솔섬과 마실길 2코스 앞바다에 있는 하섬은 간조 때 바다 밑이 드러나 육지와 이어진다.
바다 바닥이 드러나면 자연산 굴, 조개 등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데 자연산 굴은 크기는 작지만, 맛이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한 게 별미라고 한다.
낙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흐린 날이라고 해서 솔섬이 정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짙은 구름 사이로 얼마 동안 금빛 석양이 빗살처럼 내리쬐더니 마침내 태양의 붉은 빛은 자취를 감추었다. 잔광을 반사해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물결은 더 평화롭고 차분했다.
솔섬 [사진/전수영 기자] |
'매직 아워'의 솔섬은 바다를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석양의 고즈넉함이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 질 녘을 '매직 아워'라고 부른다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솔섬에서 코스가 끝났다. 몸을 돌려 내륙 쪽으로 향하니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갑남산과 마주하게 된다.
바위들 중간에 여름철 비가 많이 올 때만 폭포가 생기는 절벽이 있다. 이름하여 수락폭포다. 번개폭포라는 애교스러운 이름도 갖고 있다니 주민들의 향토 사랑이 느껴진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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