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 『검은 고양이』
허연의 트위터처럼 시 읽기
이별은 흔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허연 Retweeted
이별@릴케
이별이란 어떤 것일까
어두운, 상처 입지 않은,
매정한 어떤 것: 아름다울 만한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질질 끌며,
찢어버리는 어떤 것.
어떻게 아무 방어 없이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이별은 흔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기억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떠난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며 우리는 가슴을 두드린다. 루 살로메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여인이다. 릴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르네’라는 이름을 ‘라이너’로 바꿨고, 글씨체까지 루 살로메처럼 고쳤다.
자신의 흔적으로 이름과 필체를 남긴 여인. 평생 릴케는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몇 번이나 이별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흔적의 노예’라는 사실만 다시금 확인될 뿐이었다. 세기말 우울이 유럽을 휩쓸 무렵인 1897년 어느 날 릴케는 루 살로메를 처음 만난다. 사실 만났다기보다는 루 살로메가 강림하셨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릴케는 이때 “우리는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제야 만난 거죠”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쓴 시가 시집 『검은 고양이』에 실려있다.
내 눈빛을 꺼주세요. 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세요.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지 않고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 없이도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섬광 같은 계시를 받았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사실 릴케는 이때부터 시다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창조적 직관만 있던 그에게 사랑이 다가온 것이었다. 사랑은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일. 하지만 릴케에게는 절망이 더 많았다. 루 살로메는 릴케가 가두어 둘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시 「이별」은 그가 이름과 필체를 남겨준 여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얼마나 헤매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름다울 만한 것을 /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질질 끌며 / 찢어버리는 것”이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무릎을 친다.
그렇다. 가장 사악한 이별은 ‘아름다웠던 일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릴케는 아팠지만 우리는 릴케를 기억한다. 사랑을 갖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삶을 얻지 못한 남자. 하지만 그 대가로 시를 남긴 남자. 우리는 그래서 릴케를 기억한다.
윤동주도 자신의 시 「별 헤는 밤」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노래했다. 삶과 사랑에 대해 겸허하게 아파했다는 점에서 둘은 묘하게 닮아 있다.
글 | 허연(시인, 매일경제신문 문화부장)
릴케 저/김주연 역 | 민음사
장미를 좋아했고, 장미를 노래했던 모순에 가득 찬 시인 릴케의 시집. <검은 고양이>,<여름비 앞에서>,<장미의 속> 등 50여편의 시를 한데 묶었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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