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향기 나의 삶이 그 향기를 닮기를 바란다
삶은 때로는 지지부진하게, 또 때로는 너무 갑작스럽게 변한다. 하지만 그 터닝포인트를 흰머리 잡아채듯이 딱 잡기 힘들다. 그래도 '나의 인생은 그 이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지.' 같은 말들을 자꾸 하는 이유는, 말이 많아서, 혹은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거다. 하지만 유치한 것의 매력은 마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나도 살짝 거들어본다.
나의 인생은 을지면옥에 처음 간 날 그 이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라고 해보려 했지만, 냉면 애호가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영국으로 떠나기 이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다,
라고 하기엔 호주에 미안하다.
광석이 형님 따라 나의 인생은 서른 이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다,
라고 하기엔 살 날이 너무 길다.
인생은 사막, 술은 꽃이니까,나의 인생은 소주를 처음 입에 댄 날 이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다,
라고 말하기엔 처음 마셨던 날이 기억 안 난다. 그때도 만취했나?
결국, 이래나 저래나, 나의 인생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한 날로부터 둘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사람이 어딨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걱정마시라, 그런 사람들 의외로 많다. (단지 이런 경우 “너는 좋아하는 일 하니까 돈은 적게 줄게”라는 한국 특유의 이상한 논리에 휘말리기 쉽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니?” 라고 회사를 처음 그만둘 때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지만 그때 난 어머니에게 “그렇다고 엄마가 나 대신 사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요리를 처음 시작할 때 '난 잘 될거야, 괜찮을 거야', 라는 엄청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만, 가끔 잠이 안 오는 밤이 되면, 그러니까 휴무가 지나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밤이 되면, '나 잘 하고 있는 건가'라는 불건전한 생각이 꿈틀댔다. 옆집 애가 더 잘 하는 것 같고, 앞집 애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지평을 넓혀서, 내가 한 번도 못 본 사람까지 끄집어내서 나와 비교를 한다. ‘좋아하는 일 하잖아’ 라고 은근히 뽐내지만, 또 남과 나를 비교한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사는 게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는 건 여전히 어렵다. 집세는 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 좋아하는 일과 밥벌이를 이어붙이려면 남보다 더 고민해야 한다. 고민은 보통 힘들고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남들처럼 산다고 뭐가 문제냐’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무난하고 적당하게 살 길도 있다.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 나를 줄이고 우리를 키우면 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요리를 할 때 생소한 향신료 덕분에 꽤 고생했다. 이름과 종류, 쓰임새가 얼마나 다양한지. 그러나 그 향신료 한 꼬집에 음식의 출신과 성격이 달라졌다. 음식에 파슬리를 넣으면 이탈리안으로, 파를 넣으면 한국산으로, 고수를 넣으면 동남아 어딘가로 국적이 바뀌었다. 이 향신료(spice)의 어원은 ‘약품’이라고 하는데 한약재로 쓰이는 것들의 태반이 향신료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유래가 친숙하다. 어쨌든 이 향신료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꼽자면 그것은 ‘고수’다. 한국에서는 빈대 냄새가 난다 하여 ‘빈대풀’이라고 불렸는데 실제 맛을 보면 이게 빈대 맛인가 아리송하다. 지배적인 향은 레몬과 민트, 거기에 희미한 후추 향이 붙는다. 지중해 원산으로 알려진 고수는 기원전부터 재배된 가장 오래된 향신료 중 하나다.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허브이기도 하다. 용도도 다양하다. 뿌리부터 잎, 그리고 씨앗까지 모두 사용하는 흔치 않은 향신료다. 동남아 요리에서는 줄기와 뿌리를 요리 도중에, 잎은 요리 마지막에 뿌리며 서양 요리에서는 주로 씨앗을 쓴다. 덕분에 이름도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을 위시한 유럽에서는 코리앤더(coriander), 미국을 비롯한 중남미에서는 실란트로(cilantro), 중국에서는 샹차이(香菜), 태국에서는 팍치라고 부른다.
이름도 많고 역사도 깊은 고수는 팬도 많고 안티도 많다. 한국에서는 반대파의 목소리가 조금 더 크다. 동남아 이주민이 많아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숫자도 늘면서 고수에 대한 거부감은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태국에서 고수 빼달라고 주문하는 법’이 팁으로 돌아다니는 나라이며, 동남아 레스토랑에서 주문할라치면 “고수 많이 들어가는데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고수를 빼버리면 안 먹는 것만 못한 맛이 난다. 고수 없는 멕시칸 타코, 베트남 쌀국수, 타이 똠얌꿍을 상상해보자. 그것은 웃기지 않는 코미디언을 만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다. 나의 향기가 없는 나의 삶이 가능할까? ‘나 같지 않은 나’라는 관형어는 가능키나 한 것일까? 결국 엄마 친구 딸은 엄마 친구 딸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엄마 친구 딸은 순댓국을 좋아하고 나는 뼈다귀해장국을 좋아한다. 엄마 친구 딸은 소주 1병, 나는 2병 마신다. 그처럼 모든 사람은 다르고 모든 사람은 각각의 인생을 사는 것인데, 우리는 자주 인생을 돈으로 환산해 버린다. 연봉, 명품백, 자동차, 집, 이런 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물론 그냥 늘 없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다. 돈으로 환산된 인생에는 아무런 향기가 없다.
고수처럼 누군가에게 열렬히 반대당할지라도 어느 곳에는 나의 인생을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다. 최소한 ‘나’는 나의 인생을 지지해야 한다. 고수처럼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할지라도 어디서든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고수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성에 안 찰라치면 “고수 좀 더 주세요.”라고 호기도 부려 본다. 새콤하고 미끈한 고수 향이 나에게 와락 하고 다가오면 나는 절로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난다. 모두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 호불호가 분명한, 덕분에 더 잊히지 않고 더 사랑받는 향기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이 그 향기를 닮기를 바란다. 밤과 구별할 수 없는 새벽 선두에 서서 세상을 낮으로 이끌고, 늦은 저녁 세상을 밤으로 이고 가는, 방향만 달라진 같은 전철 안에서 마주치는 나의 동지들의 삶도 역시.
글ㆍ사진 | 정동현(셰프)
셰프의 빨간 노트
정동현 저 | 엑스오북스(XOBOOKS)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처럼 유럽과 호주 레스토랑의 주방 풍경과 셰프들의 뜨거운 전투를 현장감 있게 속속들이 비춰준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눈과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셰프들의 벌거벗은 조리 과정을 비롯해 음식에 얽혀 있는 역사와 영화, 예술, 여행 이야기, 나아가 러브 스토리까지 버무려 놓기 때문이다. 군침 넘어가는 레시피와 음식에 관한 깨알 같은 상식과 에티켓까지 음미하고 나면 서양 음식 앞에서 생기는 괜한 주눅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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