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의 '레베카'
흥행 뮤지컬에는 공연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흥얼거리는 쇼스타퍼들이 있다. <캣츠>의 ‘메모리(Memory)’나 <미스 사이공>의 ‘아이 스틸 빌리브(I still believe)’, <명성황후>의 ‘백성이여 일어나라’ 같은 뮤지컬 넘버들이다. 미스터리 뮤지컬 <레베카>에도 바로 그런 노래가 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극의 스산한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노래 ‘레베카’가 그렇다.
뮤지컬 <레베카>의 앙코르 무대가 올려졌다. 초연 때부터 소문이 소문을 끌어내며 인기를 누리더니 이번 무대도 화려한 캐스팅을 앞세워 화제가 되고 있다. 모 방송사에서 고양이 가면을 쓰고 다양한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이른바 가왕(?)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배우가 댄버스 부인으로 등장하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거미처럼 긴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으며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텔레비전 속 그 가왕이 무대에 있는 것 같아 신기하고 흥미롭다. 단순한 가창력이 아닌 무대를 지배하고 객석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뮤지컬 배우의 힘이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지 실감할 수 있다. 공연 개막에 즈음해 가면의 정체가 벗겨지지 않아 제작사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뮤지컬 마니아들 입장에서는 나름 재미있는 볼거리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뮤지컬의 원작은 데프니 듀 모리에가 쓴 소설이다. 하지만, 글로벌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서스펜스 스릴러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동명 타이틀 영화 덕분이다. 우리로 치면 땅끝 마을쯤 되는 영국 시골 마을인 콘월지방의 전원 저택 멘덜리를 배경으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안주인 레베카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히치콕의 원작은 흑백 영화라 컬러 동영상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 입장에선 색바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눈길을 떼기 힘들 만큼 흥미진진한 매력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히치콕 감독에게는 첫 오스카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뮤지컬은 소설과 영화를 무대화한 노블컬과 무비컬의 복합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처음 무대가 꾸며진 곳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의 유서 깊은 대형 극장인 라이문드(Raimund) 극장으로 3년여의 장기 흥행을 기록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흥행은 독일어권 시장으로의 진출로 이어졌으며, 핀란드와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등지로 시장 확대가 이뤄졌다. 원작과 작사를 맡은 미하엘 쿤체가 처음 소설을 접한 것은 10대 시절이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미스터리한 스토리 전개는 단번에 그를 매료시켰고, 훗날 다시 소설을 접하며 뮤지컬화의 꿈꾸게 됐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이미 여러 작가로부터 다양한 파생상품화의 제안을 받았던 모리에의 아들이 판권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에 모리에의 아들은 쿤체의 흥행 뮤지컬인 엘리자벳을 비엔나에서 보게 됐고, 결국 뮤지컬화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어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뮤지컬 대본 작업은 거의 2년여의 세월 동안 진행됐고, 실베스터 르베이의 음악 작업도 다시 2년여 동안 전개됐다. 애초에는 영국에서 독회를 여는 등 영미권 시장으로의 초입을 계획했지만, 결국 그들의 본 무대인 독일어권에서의 처음 막을 올리게 됐다. 프란체스카 잡벨로가 연출했던 초연 버전은 버라이어티 잡지로부터 ‘꿈같은 무대’였다는 찬사를 받았고, 결국 뮤지컬 <레베카>의 글로벌 흥행의 첫 단추를 끼우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무대에서는 흑백 스크린으로 구현됐던 히치콕 특유의 알싸한 뒷맛을 남기는 등장인물들과 소설에 등장하는 고즈넉한 저택 풍경은 형형색색의 무대 장치와 감탄을 자아내는 영상 효과로 대체됐다. 오스트리아나 일본에서의 무대를 경험했던 관객이라면 국내로 소개되면서 이 뮤지컬이 얼마나 효과적인 비주얼적 완성도를 이뤄냈는지도 여실히 실감하게 된다. 소극장 뮤지컬이었던 일본은 물론, 화려한 규모와 현실감을 극대화했던 유럽 공연과 비교해봐도 우리 무대가 주는 재미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원작자인 미하일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한국 무대에 대해 큰 만족을 표했다는 후문도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영국 콘월지방을 알고 무대를 만난다면, 이 뮤지컬이 만들어내는 비주얼적인 측면에서의 향취는 더욱 진하게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웨일즈 남단의 콘월 지방은 우리의 강원도 같은 곳으로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청정지역이다. 아더왕 전설의 배경이 됐던 장소이기도 하다. 영국 남부 바닷가의 정취가 매혹적인데, 실제로 별장이나 저택 등 옛 귀족들의 주거지가 많은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극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맨덜리 저택은 이런 풍경 속의 고즈넉한 전원 저택을 떠올리면 감상을 극대화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의 영상은 이런 공간적 배경을 잘 살려주는 효과적인 매개체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아래의 바닷가 모습이나 검푸른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리는 영국 시골의 오후 풍경, 매서운 바닷바람이 들이치는 발코니나 잠깐씩 비추는 햇살 속에서도 빠르게 흐르는 구름의 풍광을 표현한 동영상 등은 영국 전원 마을 특유의 여유와 정취를 제법 그럴싸하게 시각화해낸다. 영상 속의 효과적인 이미지 배열은 원래 뮤지컬 무대에서는 없었던 한국만의 표현기법과 연출이어서 우리나라 스텝들의 창의력과 작품 이해도에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매니아 수준의 뮤지컬 애호가라면 다른 작품도 떠올릴 수 있다. ‘선셋 블러바드’의 노마 데스몬드다. 무대 세트의 구조도 그렇거니와, 불타는 저택에서 레베카를 목 놓아 부르는 댄버스 부인의 손짓과 연기에는 특히 글렌 클로스가 연기했던 노마의 광기가 쉽게 오버랩된다. 두 작품 모두 왕년의 흥행 영화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독한’ 캐릭터를 만나는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엇비슷한 점들이 많다. 미스터리 뮤지컬이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다면 분명 박수받을 일이다. 특히, 국내 무대로 진출하면서 작품의 외형적 완성도가 일취월장한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한 번안이나 카피 수준이 아닌, 작품의 적절한 해체와 재구성으로 예술적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켰기 때문이다.
레베카를 목 놓아 부르는 무대의 강렬함은 관극 후에도 한참이나 머리에 잔상을 남길 정도로 스산하면서도 극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칼럼으로나마 뒷맛 진한 무대의 감동을 되새겨보기 바란다.
뮤지컬에서 단연 압권은 덴버스 부인과 내가 발코니에서 노래하는 2막 앞부분의 장면이다. 원형으로 돌아가며 객석 맨 앞줄 근처까지 밀려나 오는 무대 세트도 그렇거니와, 이중창으로 어우러지는 선율은 말 그대로 강렬하다. 독일어 버전의 동영상을 감상해보자.
국내 무대에서는 옥주현과 신영숙이 초연을 맡아 큰 호평을 받았다. 2013년 더뮤지컬어워즈 수상식에서 하이라이트로 꾸며진 동영상을 검색해볼 수 있다.
올해 새로 앙코르 공연이 꾸며지며 차지연의 ‘영원한 생명’ 뮤직비디오도 공개됐다. 강인한 카리스마의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무대를 상상케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글 원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