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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트래비 매거진

한 번 가거든, 평생 추억하게 될 '가거도'

국토의 서남단 끝 섬 가거도. 목포에서 직선거리 136km, 뱃길로는 무려 약 230km나 떨어진, 그야말로 멀고 먼 섬이다. 그런 가거도를 4년 만에 다시 찾은 이유가 있다.

● 거쳐 가는 섬마다 추억이 주렁주렁

쾌속선의 단점 중 하나는 운항 중 갑판으로의 출입이 통제된다는 점이다. 객실 창 너머 쏜살같이 달리는 바다 풍경만이 유일한 벗이다. 그러다 배가 중간 기착지에 기항할 때는 하선객들 틈에 끼어 잠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된다. 


다물도는 목포항에서 가거도항까지 가는 길의 첫 번째 기항지다. 바다 가운데로 종선을 내보내 사람과 물건을 맞이하고 또 옮겨 태운다. 큰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다물도 앞바다는 양식장이 빼곡하다. 


‘짝지’란 자갈땅을 일컫는 남도 사투리다. 섬 여행을 하며 그런 이름을 봤다면 몽돌이 깔린 해변으로 이해하면 된다. 흑산면에는 다물도에도 만재도에도 짝지 해변이 있다. 다물도 건너편은 대둔도, 역시 종선에 의지하는 섬이다. 노을 뷰가 기가 막힌 터널 바위가 보일 듯 말 듯하다.

4시간의 항해를 마칠 무렵 비로소 만나게 되는 가거도 녹섬과 회룡산

4시간의 항해를 마칠 무렵 비로소 만나게 되는 가거도 녹섬과 회룡산

흑산도를 지나고 얼마 후 또 다른 종선이 다가와 뱃머리를 댔다. 태도 군도의 첫 섬으로 낚시꾼들에게는 여치기 낚시(바다 가운데 솟은 암초 위에서 하는 낚시)의 성지로 불리는 상태도다. 그리고 곧이어 하태도. 2018년 폐교가 되어 버린 초등학교와 길고 아득한 섬 능선이 반갑다. 태도에서 내려지는 물건들은 목포나 흑산에서 실려 온 것들이다. 계란, 화장지, 라면, 육류, 주류 등의 생필품이 주를 이루고 목재, 벽지, 전자제품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서남해 끝 

순둥이 같은 섬

8시10분 목포항을 떠난 배가 12시20분이 되어서야 가거도항에 입항했다. 가장 빠르다는 쾌속선을 타고도 4시간 10분, 백령도나 울릉도보다도 오래 걸린 셈이다. 가거도로 가는 아침 배는 격일제, 오후 배는 매일 운항한다. 목포항을 오후 3시에 출항하는 이 배는 만재도를 거쳐 가거도로 가는 직항 노선(3시간 20분 소요)이다. 


1979년에 착공한 가거도항 시설 공사는 무려 44년째 진행 중이다. 서남해 끝 섬이 가진 숙명 때문이다. 1986년 베라, 2003년 라마순, 2010년 곤파스, 2011년 무이파, 2012년 볼라벤 등 대형 태풍이 닥칠 때마다 큰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가거도 여행은 늘 애처로운 마음으로 시작된다. 부서지고 깨져도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서 있는, 내게 가거도는 순둥이 같은 섬이다.


순둥이 같은 이 섬에, 유독 순하고 따뜻한 기억이 있다. 2019년 봄, 가거도 여행은 무척 힘들었다. 텐트와 캠핑 장비가 들어간 소위 ‘박배낭’을 메고 먹고 자며 도보로 섬을 종주했기 때문이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행동식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 났다.

40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주민과 여행객을 맞이하는 만물슈퍼

40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주민과 여행객을 맞이하는 만물슈퍼

만물슈퍼를 기억한다. 이때 등까지 밀려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찾았던 가게다. 급한 마음에 즉석밥과 냉동 삼겹살 한 덩어리를 샀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김치를 선뜻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공원에 앉아 맛있게 먹으며 내내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만난 만물슈퍼 아주머니는 그때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선의를 베풀었던 손님 중 한 명일 것이라는 데는 공감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까.

● 세상의 모든 바람이 섬등반도로

가거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다. 가거도 관리사무소, 해양파출소, 우체국, 보건지소, 학교 등의 행정시설과 민박, 식당이 밀집해 있는 1구 대리, 섬등반도가 있는 2구 항리, 백년등대 인근의 3구 대풍리가 그것이다. 그중 1구 대리는 이름처럼 가장 큰 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가거도를 찾아온 여행객들은 대리에 머물며 일정을 이어 간다.

일당을 받고 생선 손질을 도와 주는 대리 주민들

일당을 받고 생선 손질을 도와 주는 대리 주민들

1구 대리에서 2구 항리까지는 대략 5km, 3구와의 갈림길인 삿갓재까지만 오르고 나면 길은 섬 허리를 타고 큰 굴곡 없이 이어진다. 가거도는 섬 주민을 위한 승합차 한 대를 제외하면 대중교통이 없다. 여행객의 경우는 숙소의 차량을 빌려 타야 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가거도를 도보로 여행하려면 최소 이틀은 섬에 머물며 2구와 3구 그리고 독실산을 나눠서 돌아보는 것이 좋다. 아직은 여행하기 불편한 섬,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섬등반도는 백령도 두무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진다

섬등반도는 백령도 두무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진다

섬등반도는 백령도 두무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서쪽에 있는 지형이다. 그러다 보니 해도 가장 늦게 진다. 흡사 스테고사우루스의 등줄기를 연상시키는 해안 절벽의 암봉들이 100m 높이로 1km나 뻗어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가 일몰 촬영을 위해 일주일을 머물렀을 만큼 압도적 풍광을 자랑한다.  

이승복 동상에 비해 비교적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책 읽는 소녀상

이승복 동상에 비해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책 읽는 소녀상

또한, 섬등반도는 가거도에서도 가장 거친 바람이 모여드는 곳이다. 탐방로에 설치된 안전 펜스조차 멀쩡한 것이 없을 정도다. 기슭에 있던 가거초등학교 항리분교는 폐교된 후 일찌감치 교사가 철거되었고 수풀 무성한 운동장 터에 덩그러니 남겨진 이승복 동상은 바람에 씻기고 부서져 이제는 하반신만 남았다. 

섬등반도의 오롯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항리 나무계단길

섬등반도의 오롯한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항리 나무계단길

섬등반도 정상에는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있다. 바다에서 해안으로 그리고 독실산을 넘나드는 가거도 최고의 풍광을 품은 절대 스폿이다. 2020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17호로 지정된 이후 섬등반도에서의 야영은 금지된 상태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고 싶은 바람은 꼭 이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비박이다.

막걸리할머니 댁을 찾아와 재롱을 부리던독실산 야생고양이

막걸리 할머니 댁을 찾아와 재롱을 부리던 독실산 야생고양이

배낭을 들쳐 메고 올라가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날씨였다면 비비색과 침낭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결국 쉘터까지 꺼내야 했다. 데크에 손상이 안 가도록 스틱으로 폴을 세우고 로프를 당겨 공간을 만들었다. 가져간 맥주캔을 따고 더 이상의 낭만은 없다며 도도하게 섬과 바다를 응시하던 불과 서너 시간의 일탈, 비로소 여행이 완성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오랜 바람은 지극히 짧은 데이 캠핑으로 마무리됐다. 금지된 장소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비와 바람에 걱정을 담아 내려오기를 권유했던 누군가의 마음도 그랬던 것 같다.

서남해 끝점의 거침없는 바다 뷰를 품고 사는 항리의 가옥들

서남해 끝점의 거침없는 바다 뷰를 품고 사는 항리의 가옥들

● 세월이 흐르고 마을은 비워져도

가라지(전갱이 종류) 파시가 성황을 이뤘던 1950~60년대엔 가거도 주민 수가 1,500명을 넘었다. 당시 항리에도 80여 가구가 살았단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빈집을 남겼다. 현재 10여 가구 남짓한 마을로 들어서면 시간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남겨진 것들은 낡고 헤어졌지만, 마당에서 곧장 섬등반도로 향해 꽂히는 전망만큼은 여전히 최고다. 

7 대풍리에선낚시도구를 옮기는 데도 도르레를사용해야 한다

대풍리에선 낚시도구를 옮기는 데도 도르레를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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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 대풍리는 가거도의 3개 마을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바닷가 급경사를 따라 하나둘씩 내려선 가옥들엔 풍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풍리 사람들은 미역 채취를 주업으로 살아간다. 가파른 지형 탓에 채취된 미역과 배로 들어온 생필품들을 마을까지 옮기려면 선착장에 설치된 도르레를 이용해야 하며, 농사지을 평편한 땅이 부족하다 보니 두어 평이 채 안 되는 조막 밭조차 귀하다. 여행자는 간혹 그곳 주민들의 환경을 걱정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다. 그러고 보면 삶은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며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가거도 주민들의 당당함 속에는 풍파를 견뎌 온 노고와 지혜가 녹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 부른다. 

가거도를 찾아오는 여행객의 절반은 낚시꾼들이다

가거도를 찾아오는 여행객의 절반은 낚시꾼들이다

가거도는 서남해 끝 섬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 더해 자연 그대로의 자연, 독립적 문화, 민낯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특별한 여행지다. 경이로움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섬 가거도. 여유 있는 일정으로 머나먼 섬 여행을 계획한다면, 평생 간직할 추억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흔한 생선도 파도 높은 날에는 귀하신 몸이 된다

평소에는 흔한 생선도 파도 높은 날에는 귀하신 몸이 된다

여객선 

가거도로 향하는 방법

목포항여객선터미널 → 가거도 

08:10(격일), 15:00(매일) 출발


▶STAY

숙소는 거의 모텔식이다. 대부분 식당을 겸하고 있어 여행객은 대개 한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다. 방값은 2인 기준 5만원, 식사는 한 끼에 1만3,000원으로 어느 곳이든 균일하다. 주로 1구 대리마을에 집중되어 있지만 항리와 대풍리에도 시설이 있으며 숙박을 정하면 선착장까지 픽업을 나오므로 교통비를 절약할 수 있다.

항리의 섬누리민박은 가거도를 대표하는 민박이다. 마이클 케냐, 노회찬 의원, 노희경 작가 등 유명인들이 이곳에 묵었다. 창 너머 섬등반도를 조망할 수 있으며 빼어난 일몰 뷰를 자랑한다. 


▶FOOD

가거도는 다양한 어종이 잡히는 낚시의 천국이다. 생선회를 먹기 위해서는 숙소에 미리 부탁해 두는 것이 좋다. 생선구이나 탕은 식사 때마다 빠지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다. 가거도 막걸리는 후박나무껍질을 불린 물에 엉겅퀴, 더덕, 우슬 등을 넣어 만들어 맛이 깊고 진하다. 지금도 2구 항리에는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제조해 파는 할머니가 두 분 사신다. 직접 찾아가 구매해야 하며 가격은 1.8L 한 병에 1만원이다.


▶SPOTS

독실산

독실산(해발 639m)은 신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난대수림이 주류를 이룬다. 정상부는 구름이나 해무에 싸여 있을 때가 많아 1년 중 쾌청일수는 대략 70일에 불과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지만 3구로 이어지는 독실산 삼거리에서 곧장 올라가기가 가장 쉽고 편하다. 이때 정상 부근까지 차량 이동도 가능하다.

가거도등대

가거도 북쪽 끝에 있는 등대로 백년등대라고도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 가거도의 명칭은 소흑산도였다. 가거도등대는 1907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후 흑산도 등대란 이름으로 불리다 2013년, 등록문화재로 등재되면서 비로소 제 이름을 찾았다. 등대는 오래전 항리분교 학생들의 소풍 터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배를 타거나 독실산 자락을 돌아 넘어야 했지만, 2017년 말에 도로가 이어지면서 차량으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김부련하늘공원 & 동개해변

김부련열사는 가거도 출신으로 4·19 때 학생 신분으로 순국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은 가거도항 안쪽에 위치하며 산기슭에 탐방길을 만들어 조성됐다. 동개해변은 가거도 유일의 해수욕장이다. 파도가 센 편이지만 밀물 때에도 몽돌해변이 바닷물에 잠기지 않아 백패킹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선착장 공사로 자재를 쌓아 놓아 주변 환경은 다소 어수선하다.

회룡산

가거도항과 우측에 병풍처럼 우뚝 선 암봉 줄기로 삿갓재에 들머리가 있다. 선녀에게 반한 용왕의 아들이 바위로 굳어졌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등산로 중간지점에서는 가거도의 남쪽 해안과 섬등반도까지 시선이 뻗어나며 정상 선녀봉에 서면 대리와 가거도항을 오롯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영해기점

영해기점은 해양영토를 확정하는 영해기점의 근본이 되는 기준점이다. 표식은 태극기가 선명한 첨성대다. 가거도에는 녹섬, 외간서, 성근여, 소구굴도에 각각 영해기점을 두고 있다. 이중 녹섬은 여객선에서, 나머지는 어선을 빌려 타고 바다로 나가야 관찰할 수 있다.


*김민수 작가의 섬여행기는 대한민국 100개 섬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육지와 섬 사이에 그 어떤 다리보다 튼튼하고 자유로운 길을 놓아 줍니다.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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