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평창 봉평의 그 밭
여태껏 직접 보지 못한 이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메밀밭이란, 봉평의 그 밭이다.
평창 봉평의 메밀밭, 하얗게 비추는 흐뭇한 그 달 |
정기적 나들이의 목적
메밀꽃 필 무렵. 가산(可山, 이효석 작가)의 글이 달빛처럼 흐뭇하게 스쳐 지나간, 굵은 소금을 흩뿌린 듯 새하얀 그 밭이 지금 만개 후 구수한 메밀 이삭을 맺고 있다. 매년 가을 나는 ‘그 메밀밭’을 찾아 왔다. 이번에도 갔다. 바야흐로 가을의 한복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메밀밭 방문이다. 정확히는 메밀꽃밭이다.
몇 년 전 달이 가득 차올랐을 때 맞춰 평창 봉평을 갔다. 예고대로 달은 휘영청 밝았지만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이듬해 9월 하순 또 한 번 갔다. 꽃은 제법 피었지만 달은 창호처럼 얇은 구름 뒤로 숨고 말았다. 이처럼 자연이란 늘 마음 같지 않다. 코로나로 말썽이던 지난해 기여코 달과 꽃이 함께한 순간과 마주쳤다. 넓은 꽃밭을 하얗게 비추는 ‘흐뭇한’ 그 달을 만나고야 말았다. 메밀꽃은 풀벌레 우는 밤에 봐야 좋다. 고운 달이 부끄러워 숨어들지만 않으면 됐다. 이효석 작가의 소설 속 ‘그 달’과 꽃은 어두운 밤의 터널 속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는, 그 은은한 하얀 마음은 가을밤을 빛내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이다. 하늘에 드리운 하얀 커튼과 땅에 펼쳐진 보료 같은 꽃밭. 메밀꽃잎보다 더 옹색하던 사람의 마음도 이 광경 앞에서 마침내 활짝 피고 말았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을 앞두고 순백의 서막이 열렸다. 갑자기 도망치듯 여름이 사라져 버리고 난 올 가을에도 평창에 젖니처럼 희고 자그마한 메밀꽃이 툭툭 터졌다. 습하고 묵직한 여름을 밀어낸 청량한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봉평 푸른 들을 온통 뒤덮을 기세다. 살짝 귀띔을 하자면 이 꽃이 지고 나면 메밀이 영근다. 아, 결국 내 정기적 나들이의 목적은 메밀이었던가.
메밀막국수, 쌉쌀하고 구수한 향이 좋다 |
평창 vs 팽창
가을 평창엔 먹을 것 천지다. 우선 봉평은 메밀꽃 덕분인지 잘하는 막국숫집이 그리도 많다. 싱그러운 메밀향이 가득한 면발을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양념에 매매 비벼 주루룩 빨아내면 서늘한 날씨와 닮은 그 맛이 아주 좋다. 적당히 먹다가 머릿통까지 ‘쩡’한 육수를 부어 말아 먹으면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배로 든다. 한 번에 두 그릇 먹은 기분이다. 어여쁜 꽃 지고 얻어 낸 메밀일 텐데 어찌 국수만 뽑아 먹을까. 메밀 부꾸미, 메밀 전병(총떡), 메밀묵밥 등 쌉쌀하고 구수한 메밀 향기가 가득한 토속 음식이 식욕을 자극한다.
평창한우마을 봉평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식육식당 |
대관령과 봉평에선 그 유명한 평창 한우도 즐길 수 있다. 숯불 피워 놓고 고기를 구우면 집 나간 식욕이 당장 돌아온다. 등심도 좋고 갈빗살도 맛난다. 평창한우마을 봉평점에서는 저렴한 값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이외에도 민물매운탕과 송어회 등 다른 곳에서 찾아 먹기 어려운 평창의 먹거리가 다양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쯤되면 평창이 아니라 (배가) 팽창이다.
플라이낚시를 하는 모습, 신바람 내며 가을을 낚는다 |
평창의 가을 밤은 에어컨 실외기 투성이 도시보다 차갑다. 습기도 덜해 보송하다. 이때 밤나들이를 나선다. 차가운 평창강에는 기운 센 열목어가 돌아다닌다. 시린 물에서 더욱 힘찬 꼬리짓을 펼치는 열목어를 보고 꾼들이 모인다. 팽팽한 낚싯줄이 가을바람을 가른다. 산 그림자 아래 계곡에 서서 캐스팅(플라이낚시에서 미끼를 원하는 곳으로 던지는 것)을 척척, 신바람 내며 계절을 낚는다. 아, 가을이다.
다른 낚시에 비해 플라이낚시는 조금 낯설다. 국내엔 19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알려지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92년 때마침 개봉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영향도 제법 컸다. 영국의 귀족 낚시 게임에서 시작됐다는 플라이낚시는 영화처럼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노끈과 실을 묶어 직접 만든 미끼를 쓰고 ‘캐치 앤드 릴리즈(잡고 놓아주기)’ 등 친환경 낚시다.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이고 동적이면서 정적인 묘한 매력이 가득하다.
메밀묵은 부드러운 식감에 비해 포만감이 빠르게 차오른다 |
평창강변에는 백일홍도 한가득 피어난다. 가을볕을 받아 현란한 색을 발하는 꽃밭은 가을님이 오시는 길을 환영하는 ‘레드 카펫’이라 할 수 있다. 밤에는 그 어떤 네온보다 화려하다. 꽃만으로는 도저히 엉덩이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시원한 청정 고원에서 놀거리를 찾아보면 된다. 땅이 하도 높아서 ’하늘이 겨우 석 자’라는 북평창 봉평땅은 해발 700m에 가까운 고원으로 1,000m 고산준령이 즐비하다. 각 산의 신령이 모인다는 회령봉(1,324m)에는 모처럼 시원하게 걸어 볼 수 있는 산행로가 있다. 덕거리 연지기 마을로부터 완만한 임도의 오르막길을 서너시간 이상 걸으며 폐부를 씻고 올 수 있다. 그리 덥지 않은 가을이니까.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