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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멋, 통영

3월, 봄 마중하고파 달려 나간 길 끝에 통영이 있었다. 

봄은 남쪽으로부터 온다. 다도해 통영 앞바다는 봄이 오는 노둣돌이다

봄은 남쪽으로부터 온다. 다도해 통영 앞바다는 봄이 오는 노둣돌이다

문필로 묘사할 수 없는 통영

아니나 다를까. 찬바람 머물러 과연 겨울이 가긴 갈까 요원하기만 했지만 결국 봄은 남쪽 바다를 겅중겅중 뛰어 육지에 상륙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봄님이 오시었다. 계절의 미로를 돌고 돌아 옥빛 바닷물로부터 빼꼼히 고개를 내민 봄이다.

 

연둣빛 화장의 봄 바다 바닥엔 뼈 무른 도다리가 돌아다니고 토실한 봄 조개가 물결에 날아다닌다. 봄 바다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 경남 통영(統營). 맛과 멋, 예술혼으로 가득 찬 항구도시다. 벌써 푸른색으로 갈아입은 청라언덕 같은 미륵산에 올라 하루바삐 봄을 마중하고파 달려간 길 끝은 통영이었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정지용 시인의 글이다. 시인의 말처럼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를 빼닮은 통영의 봄 바다가 넉넉잡아 5시간의 노정 끝에 기다리고 있었다. 미륵산(461m)에 올랐다. 금강산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통영에서만큼은 경후식(景後食)이다. 한산과 여수를 잇는 한려수도의 시발점(여수를 시작으로 보면 종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미륵산이다. 


예전 같으면야 미래사 뒤편 편백 숲을 통해 산행했겠지만, 삭도(索道)를 이용하면 편하다. 다리 불편한 필자도 노인도 어린아이도 모두 정상에서 한려수도를 바라볼 수 있는 권한을 준다. 관광의 보편적 복지다.

석양과 일출을 모두 챙겨 볼 수 있는 남해 통영이다

석양과 일출을 모두 챙겨 볼 수 있는 남해 통영이다

봄 바다를 뒤로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케이블카 안에는 성미 급한 상춘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3.3m2(한 평)의 행복한 캐빈은 삭도를 타고 봄 하늘 바로 밑까지 느릿느릿 올라간다. 미륵산 위 역에 내리면 나무 데크가 산정까지 이어진다. 이것저것 구경한대도 20여 분이면 도착한다. 데크길은 고불고불 이어져 여러 각도에서 다도해의 절경을 바라보는 최고의 시닉(scenic point)을 제공한다. 한국전쟁 당시 통영 상륙작전이 이뤄진 원문고개 앞 장평리를 바라보는 곳, 날이 맑으면 일본 쓰시마섬까지 보인다는 곳, 미항 통영 시내를 가르는 운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등 사방팔방 360도 조망이 가능하다. 뭐 과장을 좀 보태자면 날이 아주 좋을 때 하와이나 호주까지 보인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다라이 속 까자미

통영 바다는 온통 둥글둥글한 섬으로 가득하다. 동그란 섬들이 첩첩 겹치며 멀어지는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닮았다. 수묵이 아니라 연두와 노랑을 칠한 채색화에 가깝다. 굽이치는 해안도로도 죄다 곡선이다. 직선, 특히 수직으로 빼곡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는 이 근사한 풍경만 눈에 넣어도 당장 숨통이 트인다. 내려오면 밥맛이 절로 난다. 이제 경후식의 시간이다(사실 통영 하면 이게 본래 목적이 아니었을까).


통영이 맛있는 고장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유래한 통영은 500년 이상 조선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한양과 전주 못지않은 찬란한 도시문화를 꽃피웠다. 판서급인 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부하들, 식솔들 다 데리고 내려왔으니 한양의 최신 문화가 고스란히 통영에 전파됐다. 게다가 다도해에서 나는 다양한 해산물과 육지 농산물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 음식이 맛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3월에도 도다리쑥국을 먹지 않았다면 당신에겐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3월에도 도다리쑥국을 먹지 않았다면 당신에겐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먹거리 가득한 봄날 통영 땅에 가서 감칠맛 나는 도다리쑥국을 먹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춘래불사춘이다. 도다리는 원래 가을이 제철이지만 도다리쑥국은 지금부터다. 해풍을 맞고 자란 섬의 해쑥을 넣고 끓여야 하는 까닭이다. 대보름 무렵부터 먹는다. 도다리가 앞에 붙지만 사실 쑥국이다. 주인공은 향긋한 쑥이다. “까자미(가자미) 사가이소, 아재 이거 한 다라(대야) 가가라, 이만원이다.”

통영 맛있는 밥상의 저력은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으로부터 나온다

통영 맛있는 밥상의 저력은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으로부터 나온다

값싸고 푸짐한 다찌집의 젖줄인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에는 갖은 제철 먹거리가 넘쳐난다. 취재하고자 내려왔다 늘 애꿎은 지갑을 탈탈 털린다. 갖은 생선과 해물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얼마나 싱싱한지 수조가 아닌 ‘고무 다라이’에서도 힘차게 지느러미를 활개 치는 감생이(감성돔), 뽈래기(볼락)를 아쿠아리움처럼 감상한다.


꾸덕꾸덕 말린 가자미와 멍게젓을 샀다. 이제 올라가 번철에 기름을 둘러 가자미를 구워 놓고 갓 지은 밥에 멍게젓 한 숟갈에 김가루, 참기름을 넣고 석석 비벼 먹을 생각에 속이 다 든든하다.

바삭하고 촉촉하게 구워 낸 볼락 구이

바삭하고 촉촉하게 구워 낸 볼락 구이

▶통영, 이것만은 알고 가시오

통영 중앙동 ‘원조밀물식당’은 볼락, 열기 등 생선구이가 맛있는 집이다. 미수동 ‘궁전횟집’은 통영의 바다를 바라보며 맛 좋은 회를 즐기기 좋은 곳. 자연산 도미 등 고급 횟감을 푸짐한 반찬과 함께 차려 준다. 아침은 졸복으로 끓여 낸 복국이나 시락국밥(시래기국밥)이 좋다. ‘만성복집’은 졸복 특유의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이라 간밤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대도 끄떡없게 만들어 준다.


무전동 ‘옥수반다찌’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반다찌 집이다. 정갈하고 다양한 찬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식사를 겸해 푸짐하게 소주 한잔 기울일 수 있다. 예전 같은 정통 다찌를 찾는다면 ‘쌓인정’이 좋다. 테이블이 몇 개 되지 않지만 싱싱한 해산물뿐 아니라 솜씨 좋은 요리까지 곁들여져 더욱 맛이 좋다.

아침에 힘을 주는 시락국밥

아침에 힘을 주는 시락국밥

뜨끈한 시락국

통영에는 값싸고 질 좋은 생선과 해산물이 많아 시장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침부터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꿰고 다닌다. 간밤에 틀어넣은 소주 탓에 속이 시려 시락(시래기) 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붕장어 대가리를 넣고 끓여 낸 육수에 시래기를 듬뿍 넣은 가정식인데 시장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 식사로 시락국을 먹는다. 먹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점심은 멍게 비빔밥

점심은 멍게 비빔밥

출출해지면 충무김밥을 찾는다. 여수에서 부산까지 가던 여객선이 통영 터미널에 잠시 들르면 뱃머리로 달려가 팔던 김밥이 충무김밥이다. 속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무김치와 조린 호래기, 홍합, 오징어가 금방 말아 낸 김밥과 잘 어우러진다.


낮 통영도 좋지만 다찌집이 문을 여는 밤도 기대가 된다. 무심히 내놓는 안줏거리 하나하나가 요리다. 푸짐하고 다양한 안주로 여행객의 허기와 갈증을 채워 주는 다찌집은 통영이 자랑하는 비장의 무기다.

저녁은 갖은 안주가 차려지는 다찌집

저녁은 갖은 안주가 차려지는 다찌집

다찌집은 ‘서서 마신다(다치노미)’는 ‘다치노미야(立飮み屋)’에서 나온 말이다. 선술집이다. 그날그날 장을 봐 안주를 만들었다가 술을 마시러 온 이들에 맞춰 하나씩 내 준다. 상을 눈여겨봤다가 떨어지면 뭔가 만들어 주고 재료를 다 쓰면 내쫓는 형식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아 아예 세트 메뉴로 변질됐다. 선원들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고 안주만 찾으니 예전 식대로 한다면 장사가 될 리 없다. 요새는 저렴한 반다찌도 유행한다. 가격이 저렴한 대신 안주가 조금 떨어진다. 원래 다찌는 온다찌가 됐다. 요즘은 쏙(닭새우), 털게, 생선구이, 붕장어찜, 소라, 문어, 굴 등이 나올 시기다. 운이 좋으면 볼락을 넣고 담근 통영식 김치도 맛볼 수 있다. 

야식으론 우짜. 어느 하나 외면할 수 없는 통영의 맛이다

야식으론 우짜. 어느 하나 외면할 수 없는 통영의 맛이다

다찌집에서 나와 짙어 가는 통영의 밤에 몸을 맡긴다. 어딜 갈까. 해장을 위해 우짜(우동에 짜장을 얹은 통영 별미)로 할까 말까 고민이다. 밤이 깊어 꽤 어둑한 강구안 밤바다는 불콰하게 취한 얼굴을 숨기기에 딱이다. 

굴과 멍게 역시 통영의 봄을 장식하고 있다

굴과 멍게 역시 통영의 봄을 장식하고 있다

▶통영을 배우는 여행

국내 유일 민간이 운영하는 시티투어 서비스인 ‘통영시티투어’는 버스 편의만 제공하는 여느 투어와는 크게 다르다. 이를 이용하면 ‘통영 토박이’ 박정욱 길라잡이가 들려 주는 재미난 역사이야기와 함께 통영 곳곳의 명승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뭔가를 더 많이 본다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배워 간다는 느낌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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