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왕의 노래
배순탁의 끄적끄적 뮤직
여름이 다가온다. 열혈불꽃남자로 태어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름에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워낙 열이 많아서 인삼도 못 먹는 내가 한 여름을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방송국 장비 덕분이다. 방송 장비들의 경우 워낙 고가라 온도에 신경을 써줘야 되는데, 이를 위해 빵빵한 냉방은 필수인 까닭이다. 하아. 이런 방송 장비만도 못한 인생 같으니라구. 갑자기 설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문제는 방송국 냉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따라서 식단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몸에 열이 많아 찬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잘 나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한번 추억을 되새겨볼까. 몇 년 전 여름, 배철수의 음악캠프 팀 전체가 점심에 물회를 먹었던 적이 있다. 시원하게 물회를 한사발하고 생방 준비를 하는데, 피디님과 배철수 선배님의 표정이 영 이상한게 아닌가. 여기에 우리 막내작가까지 3명이 모두 배탈이 난 관계로 그날 생방에서 큰 난관에 봉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어땠냐고? 멀쩡했다. 놀라울 정도로.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철(iron)장(腸) 배순탁 선생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찬 음식에 강한 내가 가장 자주 찾는 메뉴는 다름아닌 평양냉면이다. 내가 어느 정도로 평양냉면을 좋아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단 서울 시내에서는 안 가본 평양냉면 전문점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생긴지 얼마 안된 곳도 분점들까지 다 체크해서 반드시 먹어보고는, 그 후기를 페이스북에 올리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냉면들을 낮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분식집 냉면이나 함흥 냉면도 촵촵하면서 잘 먹는다. 다만 비율 면에서 평양냉면이 압도적으로 높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냉면은 인간 앞에서 평등하다는 진리를 잊지 말자.
그런데 위의 글을 한번 잘 살펴보라. 나는 평양냉면을 자주 찾는다고는 했지 ‘여름에’ 자주 찾는다고는 쓰지 않았다. 기실 나는 여름에 평양냉면을 거의 안 먹는 편이다. 일단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더위를 참느라 짜증이 나고, 여름 평양냉면의 경우 손님이 워낙 많기에 완성도가 자주, 그것도 현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으면서 짜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머리 끝까지 치솟고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굳이 여름에 평양냉면을 고집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굳이 추천을 부탁한다면 주교동에 위치한 우래옥 본점을 추천하고 싶다. 내 지인이 페이스북에 남긴, 불평과 유머가 뒤섞인 표현을 빌리자면 여름에도 동일한 맛을 제공하는 건 이 세상에 두 곳밖에 없다. 우래옥과 맥도날드.
평양냉면하면 곧장 떠오르는 노래는 역시 이 곡이다. 씨없는 수박 김대중이라는 뮤지션이 부른 ‘300/30’. 블루스를 기조로 한 이 곡에서 씨없는 수박 김대중은 월셋방을 전전하는 우리 시대 청춘들의 비참한 현실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노래한다. 노래 속 주인공은 신월동, 녹번동, 이태원 등으로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는데, 아뿔싸 300에 30으로 구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은 옥탑이거나, 방공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지하 단칸방 뿐이다.
그 와중에 씨없는 수박 김대중은 각 단락의 마지막에 “평양냉면 먹고 싶네”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집어넣어 듣는 이들을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이게 바로 이 곡이 지닌 매력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에 서서, 그러니까, 찬가와 비가 사이의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위치하면서, 그 모호함을 통해 도리어 인상적인 페이소스를 퍼올리는, 그런 곡 말이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이라는 건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한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 직선으로 내달리는 음악이 있는가 하면 ‘300/30’처럼 자신이 창조한 사운드 속에서 갈짓자로 방황하고 고뇌하고, 심지어는 뭔가 주춤하는 듯 들리는 음악도 있다. 어린 시절에는 전자에 열광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후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이런 방향으로 ‘잘 나이 먹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어느 40세 (동안) 아저씨의 일기. 오늘은 여기까지.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청춘을 달리다’ 저자, SNS 자칭 냉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