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도 아름다운 우리들의 K-아일랜드
우리의 근원을 떠올리게 하는 곳, 홍도. 여행자의 심금 울리는 흑산도 홍탁.
K-정신의 산물을 탐하러 쾌속선에 몸을 싣는다.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천연기념물이다 |
우리가 떠나온 곳은 어디일까? 어디에서 밀려와 먹구름을 헤치고 들쑥날쑥 파도를 넘어 부유하듯 살아가는 걸까?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해진 것도 없고, 정답도 모른 채 살아가는 존재지만, 어쩌면 우리는 신일지도 모른다. 길을 잃은 개와 고양이, 수족관의 물고기, 담벼락에 핀 민들레, 손톱만한 개미에게 이토록 크나큰 인간이 어찌 신이 아닐 수 있을까? 삶의 태도로 제 삶을 구원하고 때론 파괴할 수도 있는 인간이 어찌 신이 아니란 말인가.
바위섬에 뚫린 커다란 석문 |
태곳적 심연을 유람하는 홍도
출렁출렁, 출렁이는 홍도 유람선에 바짝 몸을 의지한 채 태곳적 심연 속에 뿌리내린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듯 바위섬에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은 연신 푸른 숨을 토해 뱉는다. 생물, 사물, 현상에서 끌어온 기암괴석의 이름은 어울렁더울렁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읽게 한다. 유람선 안의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홍도의 비경에서 눈 을 떼지 못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떠나왔지만 애초에 떠나온 곳은 마냥 여기인 것만 같다. 우리 신들의 고향, 기억나지 않는 애틋한 시간, 그리운 사람을 다시 재회할 그곳을 얼결에 본 듯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다시 또 오면 되지, 금방 또 만나면 되지. 그런 약속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휴대전화에 풍경과 풍경 속의 자신을 남기고, 또 남기느라 유람선의 열기는 2시간여 동안 쉬 가라앉지 않는다.
하루 2차례 운항하는 홍도 유람선 |
“홍도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참 운이 좋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홍도로 가자고 일정 세운 분들한테 꼭 맛있는 거 사주세요. 왜냐면 홍도에 사는 현지인들도 섬 날씨는 쉬이 알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참 좋거든요. 그분이 날짜를 기가 막히게 정했으니 맛있는 거 사줘야죠. 홍도에 와서 유람선을 타지 않으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안 본 거랑 다름없답니다. 그런데 홍도까지 오는 동안 뱃멀미를 심하게 한 분 중에는 유람선도 타지 않고 ‘ 다시는 홍도 오나 봐라’ 했던 분도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여러분 보세요. 직접 눈으로 보니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합니까. 오길 참 잘했지요?” “네~!!”
홍도 유람선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
홍도 유람선을 타고 무려 33가지 비경을 만나는 동안 승무원의 구수한 설명은 적재적소에서 이뤄진다. 직접 이 풍경을 만난 기자는 홍도까지 와서 유람선을 못 탄(안 탄) 그분에게 다시 한 번 홍도를 경험할 기회가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랐다.
“홍도가 목포에서는 133.2km, 흑산도에서는 22km 떨어져 있고, 해안선의 길이는 20.8km에 이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섬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천연기념물이지요. 해가 질 때 홍도는 섬 전체가 붉게 보인다고 해서 붉을 홍(紅), 섬 도(島) 자를 써서 홍도라고 한답니 다. 홍도는 1구, 2구 마을이 있는데 서로는 산을 넘어 왕래하거나 배를 이용해야 하지요. 유람선을 타면 자연스럽게 두 개 마을을 다 둘러보게 된답니다. 자, 홍도 10경 중 첫 번째인 남문바위가 나타납니다. TV에서 애국가를 들려줄 때 나오는 첫 장면에도 등장한 비경이랍니다. 여기서는 기념사진 촬영 시간을 넉넉히 드리니까 멋진 사진들 남기세요.”
유람선에서 즐기는 싱싱한 회 |
지상파 방송이 끝나면 TV에서는 애국가가 흘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정연한 서체의 노랫말 위로 금수강산을 수놓는 자연경관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의 흔적과 함께. 그럼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은 시청자들은 꿈결에서도 애국심이 타오르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말 아름답네. 이러한 선조가 있어 참 자랑스럽다.’ 가히 K-국민정신 노래인 애국가를 상기하며 기자 역시 가장 기대했던 남문바위의 앞태를 보고, 놓칠세라 뒤태도 탐한다.
남문바위 |
처음에는 하나의 바위였을 거대한 암석은 무수한 시간과 파도에 쪼개져 작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홍도 남쪽의 문이라 불릴 만한 남문바위, 작은 배가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커다란 석문을 통과하면 소원성취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어서 실금리굴, 석화굴, 탑섬, 만 물상, 슬픈여(일곱형제바위), 부부탑, 독립문, 거북바위, 공작새바위의 홍도 10경 안에는 탕건바위, 병풍바위, 원숭이바위, 종바위라 불리는 암석들이 중간중간 포개어 있다. 홍도 유람선은 짧지 않은 2시간 30분 동안 33경의 비경을 여유롭게 만나게 해준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2구마을, 가까이 홍도등대가 보인다 |
깃대봉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7월에는 홍도원추리꽃 축제(7월 7~16일)가 열린다. 그때가 되면 바닷물은 더욱 투명하고 파란색이 되는데, 바위섬 위로 노란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그 모습 또한 장관이다. 원추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크고 탐스러운 원뿔 모양으로 굵어지다가 나팔꽃처럼 팡 하고 꽃봉오리를 연다. ‘홍도원추리’는 ‘Hemerocallis hongdoensis’란 학명을 지닌 홍도 자생식물로서 일찍이 홍도에서는 원추리 잎을 따서 나물로 먹고, 꽃이 진 뒤에는 그 잎으로 새끼를 꼬아 배 밧줄이며 광주리를 만들어 생활에 요긴하게 쓰였단다.
홍도원추리 |
여객선터미널이 자리한 1구마을에는 깃대봉에 오르는 일몰전망대부터 원추리가 꽃 무리를 이루고, 2구마을로 넘어가면 홍도등대에 오르는 산줄기에 주민들이 손수 가꾼 원추리 군락지가 있어 또 다른 분위기로 꽃 축제의 낭만에 젖는다. 여기서 잠깐, 홍도에서 유람선 다음으로 경험할 것이 등장하니 바로 깃대봉이다. 배가 없던 섬 주민들이 마을에서 마을을 오갈 때 이 깃대봉을 넘나들었는데 오늘날은 여행객들의 트레킹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깃대봉에 바라본 일대 풍경 |
평지가 없는 홍도는 지형적으로 오르막을 오르거나 내리막길을 내려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은 섬 주민들에게 배와 오토바이가 흔한 이동수단이 되었지만, 여느 지역보다 다리품이 더 드 는 건 어쩔 수 없다. 여행객도 홍도를 여행할 땐 편한 운동화가 필수고, 깃대봉을 오를 때 는 등산화를 챙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해발 365m의 깃대봉은 1구마을에 자리한 일몰전망대를 들머리로 정상까지 1시간가량 소요된다. 산행이 익숙하지 않다면 덱이 설치된 일몰전망대까지만 올라도 홍도 천연보호구역의 면면을 감상하는 데 모자라지 않다.
깃대봉 초입의 덱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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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의 식물은 545종에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나도풍란, 신안새우난초, 홍도원추리, 흰동백등 의 희귀식물이 자생해 더욱 특별하다. 행여 여행자가 포기라도 할까, 산 아래 바다에서는 연신 해풍을 쏘아 올린다. 검푸른 오솔길에 번지는 하얀 포말을 들이마시며 쉼 없이 걷다 보니 깃대봉 정상까지 1.1km가 남았단다. 이정표는 후박나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등의 상록 활엽수가 오솔길을 수놓아 ‘연인의 길’로 불리는 숲길로 객을 인도한다. 이윽고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원형을 잘 간직한 숯 가마터를 만난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숯을 만들어 판 섬 주민들의 땀방울과 일제강점기 숯을 공출했던 서글픈 시간이 오버랩된다.
깃대봉 정상에서 만난 하얀 꽃무더기 |
돌무더기를 반듯이 쌓아 올린 깃대봉 표지석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기념사진을 하나 남겼다. 다음에 또 오라는 뜻인지 홍도의 주변 섬들은 해무에 숨어 제 얼굴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오를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내리막길에 놓인 기자는 정상에 오르는 여행객들에게 ‘조금만 힘내시라’ 여유로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해풍에 젖은 낙엽을 조심조심 밟고 내려와야 한다. 깃대봉 너머 2구마을에 1931년 세워진 홍도등대도 명소다. 목포항과 서해안의 남북항로를 오가는 선박의 뱃길을 안내하는 등대는 해발 89m에 위치해 이곳에서 바 라보는 석양을 으뜸으로 친다.
왕복 2시간 코스의 깃대봉 |
홍도와 필수코스, 흑산도
기자는 홍도와 흑산도에서 하루씩 총 2박 3일을 머물렀다. 어딜 먼저 여행할지는 크게 중요치 않으나 홍도 여행 시 빼놓을 수 없는 유람선이 오전 7시 30분, 오후 12시 30분 하루 2회 운항하니 계획을 잘 세워야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이다.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홍도로 가는 배는 하루 2회, 2시간 30분 걸린다. 홍도에서 흑산도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 목포에서 떠나온 배가 홍도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자 모여 있던 주민들과 여행객들이 줄을 서 쾌속선에 몸을 싣는다. 30분이 지나자 대다수의 승객이 흑산도에서 내리고, 또 그에 못지않은 승객들이 목포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해안선의 길이가 59.2km에 이르는 흑산도 |
뱃길 따라 반 시간이지만 흑산도와 홍도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흑산도 권역에 홍도를 비롯해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가거도가 흑산군도를 이루니 홍도에게 흑산도는 어버이 같은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승선표를 끊을 때도 흑산도는 대흑산도로 표기된다. 해안선의 길이가 59.2km에 이르는 흑산도 여행의 백미는 섬을 한 바퀴 에워싼 일주도로에서 경험할 수 있다. 1984년 착공을 시작한 일주도로는 무려 27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흑산도의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여행지로서도 그 매력을 온전히 담아야 하니 공사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흑산도 새공예박물관 |
흑산도와 홍도는 여행사를 통해 단체 여행에 나서는 이들이 많은데, 한적하게 개별 여행을 하고 싶다면 관광택시를 눈여겨보자. 흑산도항여객터미널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택시가 상시 대기 중이다. 기사님은 그 누구보다 흑산도에 정통한 현지인이자 최고의 여행가이드다. 25.4km에 이르는 일주도로는 흑산도 핫스폿들이 길과 길, 마을과 마을사이에 자리해 흑산도 여행의 처음이자 끝이 된다.
흑산도 고래공원 |
흑산도항 인근에는 고래공원, 흑산도아가씨 동상이 자리한다. 흑산도하면 누구나 홍어를 떠올릴 테지만 한때는 고래로 명성이 자자했다. 고래공원이 조성된 예리마을은 고래해체작업장이 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흑산도는 포경 근거지로서 굴곡진 역사가 서려 있다. 2026년에는 일대 흑산공항이 조성될 예정이니 흑산도가 써내려갈 새 역사가 멀지 않았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 버린 /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조형물 |
쾌속선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도, 일주대로 높다란 12굽이길 언덕에도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엘리제의 여왕, 가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다. 1965년 영화 <흑산도 아가씨>의 배경 음악으로 흑산도가 인구에 회자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덕분에 흑산도에서 이미자 선생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용고개에 이르는 12굽이길 |
홍도가 자연경관을 탐하는 여행이라면 흑산도는 역사와 문화 산책에 걸맞은 여행지다. 흑산문화관광호텔을 지나면 신안철새박물관, 진리당, 배낭기미해수욕장이 차례로 나타난다.
철새박물관의 흰꼬리수리 |
흑산도는 봄, 가을철 한반도를 거쳐가는 철새들이 에너지를 보충하는 주요 이동 골목으로 2003년부터 2021년까지 국내에 한 번도 기록이 없던 집참새, 파랑딱새 등 25종의 미기록 종이 관찰되었다. 겨울 철새인 흰꼬리수리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흑산도에서 번식해 더욱 특별한데, 날개를 편 길이가 2m가 넘는 역동적인 모습이 철새박물관 안팎을 장식해 시선을 사로 잡는다.
정약전 선생을 기리며, 유배문화공원 |
절해고도인 흑산도의 역사는 유배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리마을에 조성된 유배문화공원은 흑산도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손암 정약전을 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바다생물에 대한 <자산어보>를 집필했으니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전문서적이다.
흑산도에서 만난 소 |
상라봉 전망대 일대 풍경 |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위풍당당히 세워진 상라봉 전망대에서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는 흑산도의 비경이 감탄을 일으킨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장도, 소장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내영산도, 외영산도가 해무 속에 그림처럼 너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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