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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기억으로 치유되고 망각으로 병 든다

나치 대학살과 프리모 레비


몇 년 전 여름, 가족과 함께 독일 뮌헨 근처에 자리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찾았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나치스트 정권이 사람을 가두고 목숨을 유린한 곳이다. 대개 아우슈비츠를 떠올리지만, 유럽에는 백 수십 곳의 강제수용소가 있다. 1933년 6월에 지어진 다하우 수용소는 그 가운데 최초이며 조직과 운영, 건물이 이후 다른 수용소 건립의 지침이 됐다. 물론 안에서 벌어진 고통과 질병, 고문, 살해, 시신 유기의 현장도 고스란히 전수됐다. 후덥지근한 오후 햇살 아래 펼쳐진 마당은 드넓었고 한쪽에 자리한 막사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마당에서 밝은 햇살에 절망하고 막사에서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신음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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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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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 인근의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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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독일의 수용소 사진.

독일 나치즘 정권은 유대 민족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 불렀다. ‘왜’ 하나의 민족이 ‘문제’인지 그 물음 자체가 부조리했으나, 따지기는커녕 ‘해결’을 찾아내려 서둘렀다. 제시된 최종 해결은 간단했다. 멸절(滅絶).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인간을 다 죽이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이제 ‘문제’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죽이고 처리하느냐가 됐다. ‘왜’를 생략한 ‘어떻게’의 단계는 가공할 비극을 불러왔다. 고효율의 방법이 고안돼 엄청난 인원을 가두는 대형 수용소가 지어졌고, 그 수용소 마당까지 진입하는 철도가 놓였으며, 청산가리 독가스를 뿜는 샤워장과 굴뚝으로 시체 탄 연기를 뿜어내는 소각장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작동해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美軍의 무지로 어이없이 희생된 나치수용소 생존자의 참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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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휴전’ 표지

자전적 소설 ‘휴전’에서 레비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숱하게 죽어간 사실을 알려준다. 수용소 근처의 마을 주민들은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독일군을 제압하고 진주한 미군은 그게 무슨 시설인지, 어찌하여 야위고 병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유대인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집이 어느 쪽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안내도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몇 달씩 이리저리 헤매는 가운데 그들은 여기저기서 죽어갔다.

레지스탕스 활동하다 아우슈비츠로. 화학기호 빗대 풀어낸 저항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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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잡히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화학자였던 그는 ‘주기율표’ 3장 ‘아연’에서 유대인의 정체성이 이탈리아 파시즘에 불순하게 비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아연이라는 원소는 어떠한 불순물과의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이 무엇을 키워내려면 불순물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불순물이 철저하게 제거된 세상을 꿈꾸는 파시즘의 ‘순수’는 오히려 불모의 땅을 만들어낼 뿐이다. 레비는 탄소의 삶을 권한다. 탄소는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연결한다.

끔찍한 생지옥의 공포 앞에서도 인간의 품위지킨 수용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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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표지.

아우슈비츠는 수수께끼다. 그리스 테베의 바위산을 지나는 행인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아우슈비츠는 레비에게 목숨을 걸고 풀어야 할 숙제 거리로 주어졌다.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죽음과 대결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수용소 생활을 회고한다. 그의 이야기는 나직하지만 우리 심장을 고동치게 할 만큼 끔찍한 정황을 잘 전달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어쩌다 한 컵의 물이 생긴 사람은 목을 축이기보다 얼굴을 씻는다. 갈증 해소는 짐승이라도 달려드는 몸의 욕구인 반면, 존엄의 추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의 조절이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는 인간됨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곳이다. 육체가 쇠진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체성을 부여잡으려 애쓰는 주변 동료들을 보면서 레비는 단테의 오디세우스를 떠올린다. 오디세우스는 거친 대서양으로 나가 몇 달을 항해한다.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은 반란의 조짐을 보이고, 그는 아홉 줄의 간결하고 강렬한 연설을 던진다. ‘태양의 뒤,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 그 경험을 거부하려 들지 마라! 그대들의 씨앗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지옥 26곡 116~120행)’


오디세우스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이 자리하는 씨앗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가능성이며 미래이고 자부심이며 정체성인 씨앗. 그 씨앗이 우리를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게 한다. 이 연설을 들은 선원들은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이 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그 세계에 인간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죽음을 넘어 나아간다.


레비는 고된 하루를 보낸 밤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구절을 암송해주곤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살아남게 해준 것은 단테의 오디세우스였다고 회고한다. 단테는 무엇보다 ‘인간의 길’을 기억하라고 명령한 선배 작가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아우슈비츠의 레비에게 절대 절명의 과제로 닥쳐왔다. 더 이상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 없는, 생명에 직결된 가장 구체적인 물음이었다. 레비는 살아남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여기 들어오는 자는 영원히 희망을 버리라’는 지옥문의 경고를 한시라도 잊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버려야만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희망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지킬 때 솟아났다. 그래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이 됐다.


아우슈비츠의 많은 사람들이 오디세우스의 연설을 마음에 담아 살아남았고 무사히 집으로 귀환한다. 레비도 역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와서도 자신의 귀환을 봉합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아우슈비츠를 기억하고 글로 옮기면서 현재화한다. 레비가 쓴 여러 권의 책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억 자체가 그에게는 고통이지만, 망각은 더 끔찍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30년 지난 뒤에 느닷없는 자살, 마지막까지 물음표 던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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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소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죽음의 수용소에서 벗어난 레비는 30년도 더 지난 다음에 느닷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기, 죽음의 부정이 인간의 길임을 그렇게도 힘주어 얘기하던 그였기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쩌면 수용소의 기억이 그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을 기억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각하거나 침묵하지 않았다. 정신을 추슬러 홀로코스트가 인간의 일반 조건이 아닌가 하는 준엄한 물음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매일 밤 홀로코스트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살과 함께 자신의 삶을 끝없이 문제적으로 만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영원한 기억의 궤도에 올리고자 했던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살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당신은 다만 옷깃을 여밀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의 삶

살아있는 한 우리는 어떤 체험이든 반복해 기억하지만, 죽음과 함께 망각의 영원한 늪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망각은 아무것도 없음, 원래대로 돌아감,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부정적인 것들의 생장으로 연결된다. 아우슈비츠의 망각은 아우슈비츠가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고, 아우슈비츠가 없었던 그 원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리하여 또 다른 아우슈비츠가 생겨날 부정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란 또 다른 아우슈비츠가 생겨날 조건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그 반대편에 있을 법한 무엇을 자라나게 만드는 일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정신을 추슬러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삶은 기억으로 치유되고 망각으로 병 든다고. 그러니 고통스런 기억을 견디는 자체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교수, 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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