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전태일 살아 돌아온다면, 무궁화 훈장 환영할까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시대 수많은 전태일들
오는 11월 13일은 22살이었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붙여 노동조건 개선을 외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입니다. 불꽃에 휩싸인 와중에도 근로기준법 책자를 품고 전태일이 마지막까지 외쳤던 그 구호.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50년이 흐른 지금 '노동법 개정안'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또다시 가로막혀 있습니다.
노동계-정부 평행선 달리는 노동법 개정안
정부와 노동계가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법 개정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노동계는 정부가 '전대미문의 역대급 노동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며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반면 정부는 우리나라의 경제 특수성과 기업 상황을 고려한 개정안이라며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대표적 쟁점 중 하나가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을 규정한 노동조합법 제2조 제4호입니다. 현행 조항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에는 노조로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단서에는 해고된 근로자가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을 한 경우, 중앙노동위 재심판정이 있을 때까지는 근로자로 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이번 정부 개정안에는 이 단서 조항만 삭제됐습니다. 정부는 이 단서 조항의 삭제와 대법원 판례 등에 비춰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노동계는 그간 많은 논란을 낳았던 '해고자, 실업자의 노조 가입'이 결국 명시되지 않아 오히려 갈등의 여지를 남긴 후퇴한 안이라고 비판합니다.
민주노총 비정규 노동자 등이 9일 전태일 3법 입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노동계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로 불리지 못하는 현실은 그대로"
이번 정부 개정안이 그동안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거셉니다. ILO는 지속적으로 우리 정부에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와 간접고용 노동자의 교섭할 권리 보장을 권고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서도 이를 외면한 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는 노조 설립 신고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게 되었고 결국 특고, 간접고용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입법안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노동계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면 만사 해결? 노동을 대하는 정부의 애매한 태도가 문제
이밖에도 복수노조 개별교섭 시 차별대우 금지,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허용 등 쟁점은 한둘이 아닙니다. 국회 입법을 목전에 둔 상황까지도 노동법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계도, 경영계도 반발하는 개정안이 탄생한 배경에는 노동법을 바라보는 정부의 애매한 태도에서 기인한 탓이 큽니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정부가 이행해야 할 의무가 아닌 사회적 타협의 대상으로 포장하면서 문제를 더 키웠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취임 직후부터 강조해 온 ILO의 권고를 결국 통상 문제 등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급하게 준비하게 된 상황에서 정부의 입장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ILO 기본협약 비준에 반대하는 사용자 측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는데도 지나친 눈치보기 탓에 노동계도 경영계도 양측 모두 반대하는 '애매한 개정안'이 탄생했다는 겁니다.
논란이 계속되자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도 적극 해명에 나섰습니다. 해명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 OECD 가입 이후부터 따라다니던 '노동후진국' 꼬리표를 떼려는 정부의 노력을 이해해 달라는 것 2) 대한민국의 특수성과 노사관계를 고려한 최대한의 노력이었다는 것 3)또 이번 입법이 반드시 이뤄져야 노동과 관련한 국제적인 무역 분쟁도 잠재울 수 있다는, 나름의 적극적인 해명입니다. 그러면서 입법 논의 과정에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적절한 대안이 제시된다면 그 내용이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지만, 얼마나 갈등이 좁혀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전태일 3법 입법 촉구" 2020년을 살아가는 전태일들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노동계는 전태일 3법 입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제외되고 있는 5인 미만 작은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특수고용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일하는 사람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원청 등 책임자를 무겁게 처벌하는 내용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그 외침이 무색하게도 2020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가 최소 500만 명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의 외침에 부끄럽지 않게 응답할 수 있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 유서 전문」
정부는 오는 50주기 전태일 열사 추도식을 앞두고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 훈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에 헌신한 전태일의 공로를 정부가 지금에서야 인정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노동권 사각지대에서 2020년을 살아가는 수많은 전태일들은 이 포상을 어떤 표정으로 지켜보게 될까요?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그 훈장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달게 될지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제희원 기자(jessy@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