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떠났지만 돌산은 남았네
남해 금산 정상부 2km 산행과 설흘산 7km 종주, 일거양득 바다뷰 코스
남해 최고의 비경이라 해도 손색없는 금산 상사바위 일몰. 상사바위는 ‘경치의 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예술적인 전망터다. |
남해 금산은 가고 싶지 않았다. 풋풋하다 못해 어리숙했던 대학시절이 살아날 것 같았다. 당시 금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 단 일곱 줄 시는 금산을 강렬한 낭만의 바위산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처럼 비대면 강의가 아닌 낭만이 있던 시절이고, 연애 시가 가슴에 꽂힐 나이였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드론으로 촬영한 남해 금산 보리암.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위해 기도했던 곳이며, 전국 3대 기도터에 속할 만큼 영험한 곳으로 꼽힌다. |
‘남해 금산’은 실연시失戀詩의 대명사였고, 금산 아래 상주해수욕장은 MT 명소이자, 청춘들의 낭만 여행지로 꼽혔다. 등산 문외한인 대학생들이 즐겨 찾을 수 있었던 건 8부 능선의 보리암까지 도로가 나있어 셔틀버스로 산행을 생략할 수 있는 이점도 한몫했다. 사랑에 실패가 있을까마는 두고두고 이불킥 했던 서툰 풋사랑은 여전히 돌 속에 묻혀 있었다.
다시 찾은 남해 금산은 변해 있었다. 보리암 입구의 리어카 행상이 장사 문구 대신 손님을 끌기 위해 써 놓았을 정도로 유명했던 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깔끔한 전망데크, 바닥엔 벽화가 그려진 세련된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금산은 기기묘묘한 바위의 경연장이라 짧은 산행에 비해 볼거리가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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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산악부 김미진·김지윤씨와 육군 소령 출신의 남해 사람 문부경 해설사와 입산한다. 평일 오후에도 보리암을 찾은 신도와 관광객 수가 적지 않다. 운동화 신은 이들이 중등산화와 등산복에 스틱까지 손에 쥔 우리를 힐끔 쳐다본다.
시야가 깨끗하진 않으나 미모를 숨길 순 없다. 길은 현대적으로 바뀌었으나 산세는 여전했다. 남해 앞 바다는 늘 그렇듯 잔잔하다 못해 적요했다. 검은 능선은 시선을 움켜쥐고 ‘왜 이제 왔냐’며 따라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고도 580m를 공으로 올렸다 하여 산은 면박 주지 않았다.
BAC 인증지점인 금산 정상 봉화대 곁의 표지석. 왼쪽부터 문부경 해설사, 이화여대산악부 김지윤·김미진씨. |
과분한 경치였다. 잠깐 계단을 헐떡이며 오른 것치곤 정상은 지나치게 빼어났다. 대략 1,000년 전부터 망대望臺 역할을 한 봉우리답게 맛깔스런 한정식 같은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 앞에 솟은 금산 (705m)은 압도적이라, 촘촘히 뜬 섬을 꼬맹이 취급하고 있었다. 남해 앞바다 76개의 섬 중 73개가 무인도라는 문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서인지 쓸쓸해 보였다. 섬 하나 골라 한 계절 깊은 숙면 같은 은거를 하고 싶다는 상투적인 생각이 스쳤다.
문 해설사는 시간이 없어도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며 이성계가 기도한 곳이라는 보리암 선은전璿恩殿으로 안내했다. 600년 된 영험한 기도터라 일러 주었으나 그저 흘러가는 능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산 이름도 이성계가 지은 것이다. 원래 보광산普光山이었는데, 이곳에서 기원하고 왕좌에 올랐다 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비단 ‘금錦’ 자를 산 이름으로 하사했다고 한다.
상사바위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암릉이라 압도적인 고도감과 경치를 보여 준다. |
해수관음상을 지나 산길로 들자, 익숙한 산길이 맞아주었다. 신라 원효대사가 쌍무지개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였다는 쌍홍문雙虹門은 기묘한 구멍으로 등산인들의 관문 역할을 한다. 상주해수욕장 방면에서 산길을 올라오면 쌍홍문을 통해 정상부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마라톤 우승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부상품인 그리스 청동 투구를 빼닮아 누구든 사진을 찍게 하는 마력이 있다.
쌍홍문에서 본 남해도 앞 바다. 쌍홍문은 큼직한 바위 굴 아래로 산길이 연결되는 기묘한 기념사진 명소다. |
이윽고 금산산장. 서정인 소설 <산>의 총각 교사 건우가 미인과 하룻밤 묵었던 그곳은 현재 숙박은 받지 않고 컵라면과 파전 맛집이 되었다. 할머니의 걸걸한 목소리는 여전하여 마음 놓인다. 지금은 SNS 촬영 명소가 되어, 젊은 커플 여럿이 절경의 남해를 배경으로 컵라면 먹는 장면을 찍고 있다.
걸음이 빨라진다. 노을 시간에 맞춰 상사바위에 오르려 속력을 낸다. 지금은 독일마을이나 다랭이마을이 가장 인기 있지만, 남해를 대표하는 경치의 왕은 상사바위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벼랑 끝 마당바위에 올라서자 공기가 바뀐다. 산과 바다, 노을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곡 ‘비창’의 멜로디를 하늘에 뿌려 놓은 듯 감미로운 풍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설흘산 암릉줄기를 오르는 김미진씨(오른쪽)와 김지윤씨. 응봉산과 설흘산을 잇는 산행은 바다 경치와 암릉산행의 즐거움을 모두 누릴 수 있다. |
남해의 바위 명산, 설흘산
다음날도 산으로 향했다. 금산에서 맛본 바위산 특유의 재미가 아직 발바닥에 남아 있었다. 남해관광문화재단 윤문기 팀장에게 “산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설흘산을 권했다. 남해는 창선도를 포함하면 거대한 나비 모양인데 오른쪽 날개 끄트머리에 금산이 있고, 왼쪽 날개 끄트머리에 설흘산이 있다. 금산이 국민관광지격 명산이라면, 설흘산은 등산마니아들의 명산인 것.
선구마을에서 응봉산(473m)과 설흘산(482m)을 거쳐 다랭이마을로 내려서는 종주 산행에 나선다. 이화여대 산악부 김미진·김지윤씨의 밝은색 등산복이 앙상한 숲을 화사하게 바꿔놓는다. 아무도 없는 산길의 고요가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전망터 역할을 하는 봉수대가 있는 설흘산 정상. 발 아래로 가천 다랭이마을이 보인다. |
산길이 희미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강직한 선비 심성처럼 능선은 단순하고 길은 올곧았다. 소사나무, 굴참나무가 벗어놓은 낙엽이 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급하게 고도를 높이는 능선을 따라잡느라 신경 쓸 겨를 없었다. 자연 그대로의 산 같은데, 조금만 바위가 거칠어진다 싶으면 계단이 있다.
해발 200m를 넘어서자 칼날 같은 절벽이 서서히 진가를 드러낸다. 뒤돌아보면 145m 높이에 걸맞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진 뾰족한 시루봉이 솟았다. 곁으로 설흘산과 장동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은 임포리 일대가 공중에서 내려다보듯 훤히 드러난다. 맛보기처럼 잔잔한 조망 터가 나오더니 고도 300m를 넘자 설흘산의 명소 칼바위 능선이 예사롭지 않은 검술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거대한 바위 검 위에 서자 와락 덮쳐오는 바닷바람, 단순명료한 푸른색 풍경들. 내 안에 갇힌 무언가가 풀려나듯 응어리가 해소된다. 먼 바다 끝 산에서 맞는 자유로움이 도시인의 내재된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있었다.
설흘산에서 하산하면 관광명소인 가천 다랭이마을에 닿는다. ‘다랭이’는 이곳 사투리로 좁고 긴 계단식 논과 밭을 뜻한다. |
고도 400m를 넘어서자 거대한 절개지의 위용도 서슬 퍼런 100m 직벽으로 치솟는다. 칼날 같은 바위가 하나의 검으로 쭉 뻗었다. 난간이 없는 자연 암릉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도 없는 이 능선을 온전히 맛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칼로 베어낸 듯 계단식 다랭이논이 모자이크 무늬처럼 아름답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날카로운 미학의 바윗길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 이곳에서 그토록 요동치던 마음의 바다는 잠잠해진다. 산행이 가진 육체와 정신을 꿰뚫는 단순한 여정이 정점에 이르면 카타르시스처럼 마음에 꼬인 실타래가 풀려난다.
돌탑이 있는 응봉산 정상에 이르자 맞은편 설흘산 정상이 보인다. 슬쩍 안부로 가라앉았다가 치고 올라 한 마리 향유고래처럼 부드러운 굴곡을 만들어 놓았다. 분위기가 바뀐다. 골산에서 육산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발디딤 푹신한, 시간마저 느리게 흐를 것 같은 푸근한 산길. 긴장이 풀린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 능선을 따라 고도를 오르내린다. 장단이 극에 이를 무렵 비로소 나타나는 정상. 4m 높이의 봉수대가 전망대 역할을 한다. 건너편 금산과 지나온 응봉산 줄기가 우리를 알아본다. 아득한 산만큼, 아득한 시간들이 배꽃 날리듯 허공에 실려 간다. 지체 없이 하산길로 든다. 가보지 않은 바다 쪽으로 능선이 뻗어 있었다.
남해도 가이드
BAC 섬&산 인증지점은 금산이지만, 산행의 즐거움은 설흘산이 크다. 산행의 재미로만 보면 100대 명산 안에 들고도 남는다. 금산은 차로 7부 능선까지 올라 2시간 정도면 빠르게 둘러볼 수 있으므로, 남해를 찾았다면 금산과 설흘산 모두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 구역이라 정해진 코스만 산행 가능한데, 셔틀버스로 올라 둘러보는 것에 비해 산 아래에서부터 산행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가파르고 경치 없는 오르막 숲길이다.
봉수대가 있는 금산 정상의 ‘남해 금산’ 표지석이 인증 장소다. 보리암은 기도발이 좋기로 유명한 경치 좋은 사찰이며, 쌍홍문 기암 동굴이 볼 만하다. 금산산장 우측의 벤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게 컵라면을 먹을 수 있는 비경 맛집이다. 상사바위는 금산의 백미로 일출과 일몰이 특히 아름답다. 이렇게 정상부를 한 바퀴 도는 거리가 2km이며, 사진 찍으며 여유롭게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설흘산과 응봉산 두 개의 산이지만 보통 통틀어서 설흘산이라 부르며 높이도 10m 정도 높다.
능선 서쪽 끝인 선구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해 칼바위와 응봉산을 지나 설흘산 정상에 올랐다가 가천 다랭이마을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7km에 4시간 정도 걸린다. 다랭이마을에 식당과 카페가 많아 하산 후 구경과 식사를 하면 여행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칼바위는 서슬퍼런 직벽이지만 좁은 곳도 2m가량의 폭을 유지하고 있으며 난간이 많아 어렵지 않다.
교통
금산 입구의 복곡1주차장과 해발 580m의 복곡2주차장이 있다. 복곡2주차장은 비교적 협소해 이곳이 만차가 되면 1주차장에서 차량 출입을 통제한다. 셔틀버스가 있어 1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버스를 타고 오르는 것도 합리적인 방법이다. 셔틀버스는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행하며 승객 정원(29명)이 차면 바로 출발한다. 왕복 2,500원. 하행 막차는 오후 5시다. 보리암은 문화재관람료 1,000원을 받는다. 1주차장 주차료는 5,000원.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복곡1주차장까지
버스가 하루 2회(08:00, 17:10) 운행한다. 택시 이용 시 2만 원 정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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