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너무 쉽게 변해… 내가 '핵인싸' 안쓰는 이유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34]
스타 작사가 김이나의 우리말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했어요. 엄마, 외조부모와 살다 엄마가 일본에서 사업하면서 떨어져 지냈어요. 반년에 한 번씩 한국을 왔다가 가는 엄마의 출국 시간은 오후 네다섯 시쯤. 엄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해가 막 지기 시작하던 그 하늘을 기억해요. 몇 개월마다 반복된 엄마와의 생이별이 무의식에 영향을 남겼는지 그 저녁 하늘이 너무 싫었어요."
작사가 김이나(41)가 밝힌 에일리의 '저녁하늘' 탄생 비화다. 한국인이 한글로 된 노래를 들을 때 팝 음악보다 더 좋은 점 하나는 '공감'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내가 아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 히트곡만 300개가 넘는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작사가인 그의 장점도 공감력이다.
언어는 패션보다 시류를 타
지난 1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김이나는 "우리는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언어를 골라서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낸 책 '나를 숨 쉬게 하는 보통의 언어들'에 나오는 문구다. 사람은 같은 언어를 미세하게 다르게 사용한다. '성공' '예쁘다' 등이 대표적이다. 그 차이는 세대 간 크게 나타난다. 그 오류를 잘 줄여 소통하는 직업이 작사가다. "언어는 패션보다 시류를 더 타요. 그래서 저는 가사를 쓸 때 '핵인싸' 같은 유행어는 안 쓰려고 해요. 어설프게 어른이 아이들을 흉내 내는 '~하삼' 같은 말투도요."
지난 1일 오후 서울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사가 김이나. “작사가는 가사를 보내면 끝이지만, 가수는 그 노래를 수천 번까지 부르게 된다. 내가 쓴 가사가 그 가수의 삶에 힘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
그는 시대에 따라 언어가 가지는 의미도 달라진다고 했다. "'선을 긋다'의 첫인상은 부정적이에요.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선 넘는 사람을 힘들어해요. 전 '성숙한 아이'라는 표현도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순전히 어른 입장에서나 '칭찬'이지요. '외롭다'도 왜 부정적인가 싶어요. 저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채워야 하는 결핍이 아니에요. 오롯이 제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죠."
모바일콘텐츠 회사에 다니다 "음악 일을 하고 싶어" 무작정 작곡가 김형석의 사무실을 찾아간 게 2003년. 이제 마흔한 살인 그는 "나이가 들면서 내 언어의 나이 듦을 인정하던 순간은 유쾌하지 않았다"면서도 "나이가 들었기에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다.
찬란함과 반짝임
김이나는 서울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후 고등학교 때 미국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대학교까지 다녔다. 그는 "이방인 신분으로 한글이 아닌 영어로 생활한다는 것은 내게 극단적인 외로움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낯선 환경에서 새엄마, 이복동생과 산다는 건 인생의 큰 경험이었어요."
그는 이 경험이 가사에서 '어감'을 다룰 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영어 중 '매니퓰레이트(manipulate)'라는 단어가 있어요. 남의 무의식을 컨트롤한다는 뜻인데, 이걸 정확하게 풀어낸 한국말은 없어요. 그래도 제가 영어로 생활한 덕에 이 단어는 제 머릿속에 정리돼 있죠.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해 가사로 쓸 때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작사가에게 한글은 각질 때 각질 수 있고, 리드미컬하게도 표현할 수 있는 이중적 언어예요. 일어는 각이 많고, 영어는 후룩후룩 잘 넘어가기만 하죠."
그는 발라드, 댄스 등 장르별로 어울리는 단어도 다르다고 말했다. "전 '찬란하다'란 표현을 좋아해요. 제게 이 단어는 유리 조각들이 부딪혀 쟁그랑 소리가 나는 공감각적인 것에 가까워요. 반면, '반짝이다'는 주로 시각적인 기억이에요. '짝'이 주는 소리 때문에 발라드에서 쓰기 어려울 수도 있죠."
김이나의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누구나 그렇듯 사랑. 그는 "연애만큼 상투적인 행위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제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개성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했다. "작사가는 가수 입장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제 경험이 묻어나지요. 전 20대 초반에 다채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쓰레기부터 보석까지. 그러나 가사는 쓰레기에서 나와요. 나도 누군가에게 쓰레기였을 수 있지만(웃음)."
[이혜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