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커피 연가(戀歌)
대학생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느 단대의 자판기커피가 가장 맛있을까?” 찾아다닌 일이었다. 수업은 자체휴강을 했어도 자판기 찾기는 게을리하지 않아서, 덕분에 졸업을 할 때까지 마시러 간 단골 커피자판기가 생겼다.
요즘처럼 입김을 내뿜으며 출근을 할 때면 자판기커피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아직 푸른 아침을 밝히는 빨간색 불빛의 ’96’이라는 숫자는 두근거리는 나의 마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계를 본다. 8시 30분. 아직 여유가 있으니 주머니를 뒤져본다. 200원. 200원은 있겠지, 설마.
최초의 커피자판기는 언제 생겼을까?
1981.02.06 매일경제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다방과 스타벅스 사이, 커피자판기의 시대가 있었다. 최초의 커피자판기는 1977년, 롯데산업이 일본 샤프사의 자판기를 400대 구입한 것이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철, 회사복도, 대학교 정원 내에 설치된 커피자판기는 ‘길다방’이라고 불렸다. 다방 아니면 커피를 상상하기 힘든 시대이기도 했지만, 커피자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자리가 좋은 커피자판기에서는 하루에 무려 1,000잔이 팔렸다. 이쯤 되면 동네 카페 부럽지 않은데. 자판기에 재료가 만땅(?)일 때 뽑을 수 있는 커피가 600잔이기에 리필을 위해 관리인을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5년을 팔면 건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커피자판기는 인기였다. 물론 까마득한 옛말이다.
외국인이 더 환호하는 자판기커피
출처 : KBS 30분 다큐, 스콧 버거슨 |
시간을 돌려보자. 교내 최고의 커피 자판기를 찾아다니던 그때로. 나의 열정과 달리 친구들은 크고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원두커피를 다루는 카페가 등장한 이후 자판기커피는 ‘싸구려 커피’로 전락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입맛에는 달랐다. 자판기커피는 싸구려가 아닌 새로운 커피였다.
문화비평가 스콧 버거슨(Scott Burgeson)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맥시멈 코리아』에서 한국의 자판기 커피를 언급했다. 스콧 버거슨은 한국에서 마셨던 커피들이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밝히며, 우연히 마신 지하철의 자판기커피만은 ‘기절할 정도로 맛있었다’라고 찬양했다.
유튜버 ‘영국남자’는 영국 친구들에게 믹스커피를 마시게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물을 그리 타고도 저런 반응을 일으키다니, 마시즘이 탄 믹스커피라면 총리도 노림 직했다. 실제 한국에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차 1위가 ‘인스턴트커피’라고 한다.
이쯤 되면 한류 각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국내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후식으로 자판기커피가 진리인 이유
자판기커피가 가장 맛있는 곳 중 하나는 식당이다(경찰서 자판기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고깃집이나 국밥집에서 식사를 할 때 중요한 점은 계산대 옆의 자판기커피를 마셔야만이 모든 식사가 종료되는 것이다. 딱히 돈이 더 들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분명 보통 때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맛이 난다.
어쩌다가 자판기커피는 달착지근한 맛을 내게 됐을까? 커피의 맛은 그 나라의 음식 문화와 관련 있다. 식후에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문화권에서는 고소하고 쓴 커피가 잘 어울린다. 반면에 우리의 음식은 맵거나 짜거나 기름지다. 입안에 남은 강한 맛을 중화시켜줄 달콤한 자판기커피가 더욱 당기고 어울리는 법이다. 단 게 최고니까.
정말 커피자판기마다 맛이 다를까?
똑같은 원두를 사용해도 바리스타마다 커피의 맛이 다르듯 커피자판기의 세계 역시 맛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대형자판기의 경우 내부에는 커피, 설탕, 프림 등 각 재료별로 통이 나누어져 있으며, 재료가 나오는 시간은 0.2초 단위로 조절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자판기 관리자마다 자신만의 황금비율을 갖고 있다.
100원(이나) 차이가 나는 일반커피와 고급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고급커피는 들어가는 커피의 종류가 다르다. 쉽게 말하면 비싼 브랜드를 쓰는 것이고, 어렵게 말하면 같은 인스턴트커피지만 제조방법이 다르다.
왼쪽이 고급커피, 오른쪽이 일반커피. 이미지 출처: delica.ch |
인스턴트커피는 원두의 원액을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는데, 일반커피는 분무건조하여 가루 모양의 커피를 만든다(향미가 부족하다). 반면 고급커피는 동결건조로 얼음을 만들었다가 열을 가해 수분만 증발시킨다. 자갈밭처럼 생긴 모양으로 우리가 잘 아는 맥심이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여담이지만 커피 대신에 마시는 우유도 특별한 메뉴다. 단순히 따뜻하게 데운 우유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 마치 옥동자 아이스크림을 끓이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판기마다 우유 메뉴가 사라져 아쉬운 상황. 몇몇 덕후들은 자판기우유 재료인 밴딩밀크를 따로 구매해서 마시기도 한다.
커피자판기는 사라지는 것일까, 바뀌는 것일까?
카페의 등장 이후 커피자판기가 매년 줄어가고 있다. 이미 국내에 있는 카페만 9만 개로 포화상태. 자판기보다 카페가 많아 보이는 세상에서 학생도 회사원도 이제는 테이크아웃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실정이다.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은 커피자판기를 찾아 숨바꼭질을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카페에 밀려 화장실 앞이나 건물 구석에 가야 커피자판기를 만날 수 있다. 과거 사무실, 대학교, 유원지가 커피자판기의 주요 수입처였다면 이제는 함바집(건설현장의 식당), 기사 식당에 있다. 진정한 자판기커피가 마시고 싶다면 노동현장에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커피자판기 중 하나가 앞서 말한 나의 대학 단골 자판기다. 찐득한 커피를 내주던 이곳에는 낯선 커피자판기가 등장했다. 광고를 보니 아라비카 원두인지 바리스타인지를 집어넣은 듯한데, 밀크커피가 아닌 아메리카노 메뉴가 있고 동전 대신 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
그런데 아메리카노 1잔에 1,000원. 기계화 덕분에 이렇게 싸진 것인가! 그러나 대학가는 카페에도 1,000원짜리 아메리카노가 넘친다. 마치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 대신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것 같다(죄송한 말씀이지만 맛은 무승부).
“네 놈이 얼마나 맛있나 보겠어!” 커피자판기의 버튼을 누른다. 심심하지 말라고 신나는 노래를 들려주는데, 맛이고 가격이고 내 귀에는 그렇게 슬픈 연가가 따로 없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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