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스타 플레이어를 넘어 진짜 예술가
22일 첫 지휘 겸업 무대
21일 역대급 리사이틀···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조성진 주간에 통영 들썩
조성진 22일 협연 & 지휘 ⓒ통영국제음악재단 |
면도날 같은 폭풍우와 바람이 몰아치는 잿빛 하늘로 뒤덮인 통영 앞바다에 무지개색 물감을 풀어놓은 오로라를 띄우는 기적. 22일 오후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빚어낸 마법이다.
조성진이 오케스트라 지휘와 피아노 협연을 겸하는 이색 무대가 펼쳐졌다. 피아니스트가 협연 무대에서 연주와 지휘를 겸하는 것은 드문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조성진이 공식적인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을 하는 동시에 지휘봉까지 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업계의 관심이 컸다.
돌연 찾아온 제17호 태풍 타파(TAPAH)으로 인한 기만적인 날씨에도, 조성진과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평안함과 위로를 안겨줬다.
조성진, 연주의 조형성을 보여주다
조성진은 이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더불어 자신의 대표곡인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는 동시에 지휘했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각 작품의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자신의 해석을 반영했다. 협연하는 오케스트라 색깔에 맞춰 적절하게 다른 정경을 보여줬던 조성진은 지휘까지 맡은 이날 공연에서는 뚝심이 돋보였다.
교향곡의 진중함을 머금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지휘는 박력이 넘쳤다. 지난 20일 오전 통영 초중고 학생들을 초대해 리허설을 겸해 연 '스쿨콘서트' 때만해도 조성진의 지휘 손은 수줍었다.
조성진 22일 협연 & 지휘 ⓒ통영국제음악재단 |
하지만 이날 첫 박자를 주는 순간부터 조성진은 거침이 없었다. 확신이 담긴 손짓에 오케스트라 연주도 막힘이 없었다. 자신의 독주에서는 역시 매끄러운 연주를 들려줬다. 여러 번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는 조성진은 물 흐르듯 연주하고 지휘했다.
도저히 처음 지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호가 분명했고 단원들의 연주에도 믿음이 배어 있었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이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악장을 맡은 스레텐 크르스티치와 눈빛 교환을 자주하는 등 단원들과 호흡도 유기적이었다.
2부에서 들려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더 좋았다. 조성진은 이미 훌륭한 거장이 해석하는 오케스트라와 차진 호흡을 주고 받는 것을 여러번 보여줬다. 그런데 이날 자신이 원하는대로 템포와 리듬을 좀 더 가져오자 그가 원하는 그림의 입체감이 더 분명해졌다.
화려하지만 담백한 터치로, 조성진과 쇼팽의 투명함이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악기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구사하는 음악가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연주와 지휘를 꾸미지 않고 투명하게 병행하는 젊은 연주자는 잘 보지 못했다.
조성진은 두 개의 뇌를, 아니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것이 아닌가. 둘 다 아니다. 조성진은 지휘자를 겸업하고자 한 것이 아닌, 곡에 대한 좀 더 좋은 해석을 직접 찾고자 지휘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음악만을 보고 뛰는 하나의 심장.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 성공적인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조성진 22일 협연 & 지휘 ⓒ통영국제음악재단 |
앙코르 곡은 브람스 인터메조. 우아하면서 감미로운 기품의 음색은, 흥분의 여운을 조용히 간직하는데 최적이었다.
조성진, 캐릭터라이징 일품
전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리사이틀은 조성진 역대 리사이틀 중 손꼽히는 무대였다. 지난 10일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16일 경기 연천군 연천수레울아트홀 대극장에서 '2019 제9회 연천DMZ국제음악제'의 하나로, 연 리사이틀 프로그램과 같았다.
모차르트 피아노 환상곡과 피아노 소나타 3번,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베르크 피아노 소나타,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b단조 등을 연주했다. 특히 이날 화룡점정은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연주하는 곡에 몰입돼, 연주 자체가 그 곡이 돼 버리는 환상을 선사했다.
감성 표현과 기교, 어느 양면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청중을 즉각적으로 무장해제하는 음표의 순례였다. 1부가 끝나고 기립박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성진 22일 협연 & 지휘 ⓒ통영국제음악재단 |
조성진의 공연을 접하면 후유증에 시달린다. 만족도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다. 조성진은 그런데 항상 그 역치를 상회한다. 끊임없이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진화하는 그가 이제 괴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특히 무엇보다 조성진이 쇼팽, 모차르트에만 특화된 연주자가 아니라는 걸 이번 리사이틀은 증명했다. 슈베르트의 숭고함뿐 아니라 리스트의 강렬함도 요동치게 만들었다. 1인 다역의 모노극을 보는 드라마틱한 풍경을 보여줬다. 30분이 넘은 동안 강철 무지개 같은 노동의 심미적 연주의 펼쳤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3악장과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F장조 2악장, 두 개의 앙코르는 황홀경의 눈부신 마침표였다.
조성진, 벼락스타가 아니다
201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조성진은 벼락처럼 스타가 됐지만, 그 성과는 행운이 아니다. 꾸준히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실험과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9월3째주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는 '조성진 주간'으로 통했다.
조성진 21일 리사이틀 ⓒ통영국제음악재단 |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화요일만 제외하고 무대에서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빠듯한 해외 연주 일정으로, 그의 국내 연주가 드물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팬들에게 선물 같은 한 주였다. 특히 19~22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펼쳐진 '조성진과 친구들'이 '조성진 주간' 하이라이트였다.
첫날인 19일에 조성진은 세계 정상급 현악사중주단인 '벨체아 콰르텟'과 브람스 피아노 5중주를 조성진과 협연했다. 독주나 협연이 아닌 실내악에서도 일가견이 있으며 앙상블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연주를 선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15일 경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이어 20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선보인 선보인 독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국내 세 번째 가곡 무대는 극찬을 받았다. 호평이 쏟아진 서울 공연 그 이상이었다는 평이다. 괴르네의 맑은 음색, 그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조성진의 담백함이 눈부셨다는 것이다. 이어 21일 리사이틀, 이날 지휘자 겸업 무대까지 쉬지 않고 다른 형태의 무대를 이어온 것이다.
'조성진과 친구들' 공연을 모두 지켜본 음악 칼럼니스트인 노승림 숙명여대 겸임교수는 "아직 젊은 조성진이 향후 자신의 음악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다른 음악가들과의 소통에도 주력하겠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고 짚었다.
클래식 마니아인 영화 '박쥐' '아가씨'의 박찬욱 영화감독도 이번 조성진의 통영공연(괴르네와 공연은 서울에서 관람)을 다 챙겨봤다. 평소 조성진의 콘서트를 골고루 챙긴 박 감독은 "레퍼토리가 늘어나고 있다. 한 시대의 예술가와 함께 성장하는 한다는 것은, 옛날 거장들의 아무리 명연주 녹음을 듣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라고 말했다.
조성진 &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리허설 ⓒ통영국제음악재단 |
"폭도 넓어지고 성숙해지고, 20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실내악도 같이 하고 가곡 반주도 같이 하고,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를 넘어 진짜 예술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고 있다"고 봤다.
이번 통영의 나흘 공연에서는 여전한 조성진 신드롬도 새삼 확인했다. 티켓 오픈 49초 만에 매진된 이날 공연은 강력한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에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몇몇 암표상이 티켓 박스 앞을 서성거렸고 한 좌석을 두 번 재판매한 사례도 적발됐다.
평소 통영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오후 6시대 버스는 6시40분 시간밖에 없는데 이날 6시35분차가 임시 증차됐다. 조성진 공연이 오픈된 직후 한달여 전부터 6시40분차가 매진, 버스 배차를 문의하는 서울 관객들의 전화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 조성진 갤러리 팬들은 직접 버스 두 대를 대절, 서울에서 통영을 오가기도 했다.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인 통영에서는, 조성진 공연이 있는 날이면 상권도 붐빈다. 2017년 5월 조성진 리사이틀에서도 확인했던 바다. 통영국제음악당 인근 숙소의 객실은 동이 났다. 태풍으로 인해 축제 분위기는 덜했지만 일부 식당과 카페는 평소보다 사람이 늘었다. 조성진이 다녀갔다는 통영 떡볶이 맛집도 관심을 받았다.
【통영=뉴시스】이재훈 기자 =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