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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맞닿은 거대 습지…4500살 '용늪' 속으로

대암산 용늪 10.6㎞…해발 1280m '안개 자욱', 승천 용 쉬어가던 곳

어두운 숲길 밝히는 금강초롱꽃·작은별 반짝 각시서덜취…야생화 보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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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늪 트레킹. 해발 1280m의 고지에 이렇게 푸르른 초원이 있다니! 안개 자욱한 습지 풀밭에서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

이름이 큼지막한 대암산(1312m) 용늪을 간다. 커다란 바위산(大岩山)이라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흙산이고, 정상에만 '그리 커다랗지 않은' 바위무더기가 있다. 정상에서 금강산과 설악산이 잘 보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전망이 좋다'라는 뜻의 대암산(臺岩山)으로 불렸다. 대암산 정상 밑에 평편한 늪지가 있으니 바로 용늪이다. 용늪은 '용이 하늘로 오르기 전에 쉬었다 간 늪'이라는 뜻이다.


해발 1280m의 고지대에 축구장 2개 크기의 늪이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탄층(泥炭層/peat)이다. 이 곳은 물이 모이는 움푹한 지형으로 연중 안개일수가 170일이 넘어 항상 축축한 상태다. 그런데 일년 중 5개월 이상이 영하의 기온이고 봄, 가을도 서늘해서 죽은 식물이 잘 분해되지 않는다. 즉 완전히 썪지 않은 식물이 진흙과 함께 퇴적된 이탄층을 형성하게 되고, 이탄층은 스폰지처럼 많은 물을 머금어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늪지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용늪의 이탄층은 매년 1㎜가 쌓여, 전체적으로 평균 1m, 가장 깊은 곳은 1.8m가 쌓여 있고, 그 역사는 4천5백 년에 이른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매년 1개 층의 아파트가 생기므로, 각 층에 담긴 성분을 분석하면 4천5백 년에 걸친 생태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용늪을 보호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용늪 탐방은 까다롭다. 환경부, 산림청, 문화재청에서 각각 보호지역으로 지정했고, 군부대가 있어서 4개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인제군과 양구군의 예약싸이트에 신청하면 허가 절차를 대신 해준다. 5월 중순~10월 말에 인제 150 명, 양구 100 명 이내에서 허가를 해준다. 20명 당 1명의 가이더(주민)가 반드시 동행하고, 1명의 가이더 당 10만원의 비용을 분담해서 내야 한다. 인원을 제한해서 자연을 보호하고, 지역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하는 생태관광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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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 서흥리 탐방안내소-용늪 4.9㎞ "안개 자욱한 용늪에 사초류 풀밭과 야생화들이 바람에 일렁여"

휴전선과 가까운 이곳에 배치된 군인들이 너무 오지라서 "원통하다!" 했던 원통읍은, 이제 산뜻한 소도시로 변신해서 군사도시의 긴장감은 없다. 산악회 버스가 읍내에서 내륙방향으로 언덕에 오르자 멀리 설악산의 서북능선 산자락이 바라보인다. "저기도 가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든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통과해 서흥1리의 용늪자연생태학교에서 인원 확인을 받고, 가이더 차량을 따라 산골짜기 좁은 길로 들어선다. 꼬불꼬불 굽은 길을 올라갈수록 나무가 굵어지고 높아지는 깊은 산이다. 20분 넘어서 도착한 탐방안내소에서 차를 내려, 출입허가표식을 목에 걸은 후, 가이더 선생으로부터 이 지역의 특징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듣는다. 소중한 보호지역이고 군사지역이지만, 예외적으로 출입을 허용하는 것이니, 조심해서 탐방하고 대열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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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끝의 너래바위 밑 폭포. 용늪에서 내려오는 물길답게 물소리가 우렁차다

얌전히 주의사항을 들은 일행들이 가이더 뒤를 따라 출발한다. 길의 처음은 넓은 임도다. 적당한 경사지만 10분쯤 지나니 앞서 가는 사람과 뒤로 쳐지는 행렬이 길어진다. 길 가운데에선 질경이가 사람들의 발길을 묵묵히 받아내고, 가장자리에서는 단풍취와 물봉선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25분쯤 걸려 도착한 임도의 끝에 '나뭇꾼도 쉬어 갔다'는 넓은 너래바위가 있고 그 밑에는 물소리 우렁찬 폭포가, 위에는 출렁다리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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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끝에서 등산로로 접어드는 출렁다리. 용늪까지 1시간쯤의 숲길 오르막이 시작된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니 좁은 등산로가 시작되고, 칙칙한 흙냄새와 낙엽 썩는 냄새가 이곳이 깊은 숲임을 알려준다. 어두운 숲길 가장자리에 동자꽃, 짚신나물, 금강초롱꽃이 드문드문 나타나자, 야생화 전문가들이 걸음을 늦추고 카메라에 불을 켠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면서 갈수록 길이 질퍽하고, 등산로가 물길이 된 곳이 많아진다. 습지에 다가선다는 실감을 한다. 출발해서 1시간 반이 지나 도착한 넓은 공터에서 딱 20분의 점심시간을 준다. 시간이 되어 가이더 선생이 출발하자고 하니, 멍석을 피고 잔치를 하던 분들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용늪도 식후경인데.


평평한 길을 15분쯤 걸어 용늪에 가까워지자, 멀쩡했던 공중에 스멀스멀 안개가 퍼지더니 어느새 자욱해진다. 용늪 해설을 담당하는 자연환경해설사의 인솔에 따라 입구에 설치된 신발털이개에 신발 바닥을 빡빡 문지르고 들어간다. 밑창에 붙어있을지 모를 외래종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다. 고산지대에서는 산 밑의 식물도 외래종이다.


노란색 마타리와 보랏빛 참당귀, 연보라색 솔체꽃과 분홍색 둥근이질풀이 환영하는 풀밭을 통과하자 용늪 전경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멀리 백두대간의 향로봉도 보인다 하던데, 오늘은 안개가 짙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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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늪의 야생화들. 왼쪽부터 마타리, 참당귀, 솔체꽃. 마타리는 어린 잎이 맛이 있어 예전에 맛타리로 불렀다고 한다. 솔체꽃은 잎이 솔잎처럼 가늘고, 꽃이 가루를 거르는 체처럼 생겼다는 이름이다

멋진 풍경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실망하자, 해설사는 "바람에 따라 안개가 몰려오고 몰려간다, 이렇다가 갑자기 안개가 벗겨져 초원이 짱하고 나타난다!" 고 사람들을 위로한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안개 낀 용늪이 진짜 용늪이라느니, 용이 숨어서 쉬도록 안개가 뒤덮는 것이라고 셀프해설을 한다.


데크 계단을 내려서니 안개가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습지 풍경이 서서히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노루다!" 하는 곳을 쳐다보니, 안개가 걷혀 몸이 노출된 고라니가 살찐 허벅지로 한껏 도약하더니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송아지만한 야생동물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으니 오늘 산행은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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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늪의 물웅덩이와 사초류 식물들. 습지 바닥은 4천5백 년 간 쌓인 이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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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중간중간에 물웅덩이와 물길이 보인다. 50㎝ 정도의 물이 채워진 웅덩이가 40개쯤 있고, 이탄층의 초지도 다 물을 머금고 있으니, 데크를 벗어나 이탄층을 밟으면 안 된다는 해설이 이어진다. 이탄층이 1년에 겨우 1㎜ 쌓인다 하니, 만일 이탄층을 밟아 1㎝의 자국이 나면 10년 간의 역사가 망가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데크 옆의 사초 뿌리를 밟고 "정말 물컹하네!" 하는 장난을 친다. 용늪의 입장에서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용늪을 유지시키는 또 하나의 힘은 사초(莎草)다. 길고 촘촘한 풀이다. 이곳에서만 사는 대암사초도 있다. 사초의 뿌리들이 수분을 흠뻑 머금었다가 천천히 내뿜으면서 습지가 유지되고, 죽은 사초들이 완전히 썪지않고 퇴적되면서 이탄층이 생기는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사초들 사이로 보랏빛 숫잔대가 보였다 말았다 한다. 그 사이에 남한에서는 이곳에만 있다는 비로용담도 있을 것인데, 오늘의 날씨에서는 찾아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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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늪의 야생화. 왼쪽은 제비의 꼬리처럼 꽃잎이 갈라진 제비동자꽃. 오른쪽은 비로용담. 용담(龍膽)은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쓰다는 뜻이고, 비로용담은 금강산 비로봉에서 자라는 용담이라는 이름이다. 사진 장금만

◇ 용늪-대암산-서흥리 탐방안내소 5.5㎞ "거친 바위 끝 정상에 안개 가득, 하산길엔 야생화 가득"

용늪에서 대암산으로 나가는 통로에도 야생화 잔치가 펼쳐져 발걸음이 늦는다. 동자꽃, 곰취, 이질풀, 개당귀 꽃 등이 한데 어우러졌다. 습지는 야생화의 보물창고다. 큰 나무가 적어서 다양한 풀들이 햇빛을 흠뻑 받을 수 있고, 물과 친한 종류, 땅과 친한 종류가 모두 자란다.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도 많다. 특히 이곳은 휴전선 인근으로 북쪽 식물과 남쪽 식물이 함께 자라서 식물다양성이 더욱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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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늪의 야생화. 왼쪽부터 곰취, 이질풀, 숫잔대. 곰취는 넓은 잎이 곰의 발자국을 닮아서, 또는 곰이 잘 먹는 나물(취)이라는 이름이다. 이질풀은 이질의 치료에 쓰이는 풀이라는 뜻으로, 잎 모양이 쥐의 손처럼 생겨서 쥐손이풀이라고도 한다. 숫잔대는 잔대보다 거칠게 보인다는 뜻, 또는 습지에 사는 습잔대가 변화된 이름이다

대암산 가는 길은 좁고 험하다. 길 옆 철조망에 계속 지뢰표지판이 나타나, 철조망을 넘으면 정밀 지뢰가 터질 것이라는 기분이 든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간인통제구역이었고, 6.25 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으며, 휴전을 앞두고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전투가 치열했던 장소다.


정상에 다가서는 바위길은 더욱 험하다. 바위무더기의 끝에서 쇠 발판을 딛고, 쇠난간과 쇠줄을 부여잡고 올라, 사각형 바위가 덩그러니 얹혀진 정상에 도착한다. 용늪에서 40분쯤 걸렸다. 여기서 바라보는 금강산과 펀치볼(punch bowl/그릇처럼 움푹한 지형) 풍경이 멋지다 했는데, 오늘은 안개정국에 곰탕이다. 그래도 인증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의 표정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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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가는 길의 장사바위. 힘 센 장사가 작은 바위 위에 큰 바위를 올린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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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정상의 풍경. 금강산과 설악산 조망이 좋은 곳이지만, 오늘은 안개 너머로 상상만 한다

그런데 지적할 것이 있다. 대암산의 높이가 정상석의 표지판에는 1312m인데, 용늪 입구의 산림청 안내판에는 1314m로 되어 있다. 네이버를 검색하면 1310m다. 동물의 숫자도 환경부(600종)와 산림청(300종) 안내판이 다르다. 2배의 차이가 있다.


하산길은 급경사 계단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깊은 산에서 사는 야생화들이 문득문득 나타나 지루할 새가 없다. 어두운 숲길을 밝히는 금강초롱꽃, 눈빛을 쏘는 듯한 눈빛승마, 작은 별이 반짝이는 듯한 각시서덜취, 자줏빛 꽃잎이 새침한 새며느리밥풀꽃, 귀여운 인형들이 올망졸망 달려있는 듯한 연보라색 진범, 바위에 붙은 떡처럼 보이는 바위떡풀 꽃들이 이어진다. 그들과 만나자마자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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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야생화. 왼쪽 금강초롱꽃, 오른쪽 진범. 금강초롱꽃은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에 의해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까이(Hanabusaya asiatica Nakai)라는 왜색 학명이 붙어 슬프다. 진(秦)범은 중국에서 불렀던 이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오독도기’라는 순우리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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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야생화. 왼쪽부터 송이풀, 바위떡풀, 눈빛승마. 송이풀은 꽃이 송이(덩어리)를 이루어 핀다는 뜻인데, 기자 생각으로는 ‘바람개비꽃’이 더 어울릴듯하다. 바위떡풀은 바위에서 자라는 잎이 떡처럼 생겼다는 이름이고, 눈빛승마는 흰꽃이 눈의 흰빛과 같은 승마(升麻)라는 이름이다. 사진(바위떡풀/눈빛승마) 신경희

축축한 급경사 길을 내려서서, 작은 물길 몇 개를 건너니, 어느덧 오전에 건넜던 출렁다리와 너래바위가 나타난다. 일행들과 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너른 임도를 내려가, 구름다리를 넘으니 곧 주차장이다. 목에 걸었던 출입증을 반납한다. 대암산 정상에서 한시간쯤 거리다. 야속하게도, 산 아래는 햇빛이 짱짱하고 하늘이 새파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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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초록 풀밭 용늪. 휘어진 데크 탐방로가 용처럼 보인다. 사진 장금만

대암산에는 큰용늪, 작은용늪, 애기용늪이 있는데 큰용늪만 탐방할 수 있다. 작은용늪은 과거에 군부대가 있던 곳을 습지로 복원 중이고, 애기용늪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용늪은 우리나라 최초의 람사르(Ramsar)습지다. 람사르란 이란의 람사르에서 체결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다. 세계적으로 171개국에 2,437개소의 람사르습지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우포늪, 순천만 갯벌, 제주도 물영아리오름 등 21개소가 있다. 날로 건조화되는 기후변화시대에서 습지는 생물서식지 보호와 이용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오늘 4천5백년이나 된 용늪을 45분도 못되게 돌아보았지만, 풍경의 여운은 오래 갈 것이다. 안개 속에서 바람에 일렁이던 사초들, 안개와 풀밭 속에서 반짝거리던 야생화들, 그리고 안개 너머로 폴짝 사라진 고라니의 뒷모습도 생생하다. 안개늪으로 오래 기억될 용늪이었다.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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