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없이 인생에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나의 실패사용법]
'나쁜 페미니스트' 등 80여권 옮긴 번역가 노지양
"실패 덕분에 웬만한 일엔 끄떡없는 전사가 됐다"
[편집자주]누구나 인생에서 크든 작든 실패를 경험한다. '폭망'일 수 있고 '소소한 좌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를 겪은 뒤 어떤 자세로 나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인생 항로에 영향을 끼친다. 각계각층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어떤 실패를 경험했는지, 또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의 선물'은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당신 번역에 실망했다. 얼마나 엉망인지 봐라.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번역료를 다 줄 수 없다."
6년 전 여름, 메일을 확인하고 그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200자 원고지 500매 분량의 원서를 몇 십번 읽으며 완성한 번역본이었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번역이 좋다"고 칭찬했던 편집자가 돌연 말을 바꿨다. 넉 달을 '올인'했으나 손에 쥔 돈은 80만 원 가량이었다.
'나쁜 페미니스트' '하버드 마지막 강의' 등 80여권을 번역해온 중견 번역가 노지양씨(44). 지난 15년 동안 번역을 해오면서 '자존심 다치는 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해 여름이 가장 처참했던 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철없던 20대…인생의 쓴맛을 보다
노지양씨는 어려서부터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반장을 도맡아 했고, 공부도 잘해 연세대학교에 가뿐히 합격했다. 부모님 덕에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괜찮은 스펙' 때문에 인생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다. 20대 초반 그의 자신감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 작가로 방송국에 '입성'하면서부터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꿈의 직업'이었는데, 서브작가는 '2등시민' 취급을 받았어요. 글을 쓰기는커녕 매일 커피 타고, 과일 깎고, 잡무 처리하기 바빴죠." 이 악물고 4년을 버텼으나, 메인작가의 길은 까마득해보였다. 결국 방송국을 나왔다. 그 시간이 노씨에게 안겨준 건 열패감이었다.
'좌절이 특기'라는 노지양씨는 "삶에서 깨졌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뉴스1 © News1 김민우PD |
'폭풍칭찬'도 잠시…자존감은 바닥을 찍고
번역을 시작한 계기는 거창한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 낳고 단 하루라도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그 탈출구가 '문화센터 번역수업'이었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갈수록 매력을 느꼈다. 수업 때마다 '폭풍칭찬'도 들었다. '나 잘 하는구나.'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듯 제법 빠르게 번역가로 자리 잡아 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번역에 발들인 지 3년쯤 됐을 무렵, 자존심 무너지는 일들이 몰려왔다.
온 정성을 쏟아 번역한 내용이 편집과정에서 뭉텅 잘려나가기도 했고, 번역 중간에 번역가를 바꿨다는 날벼락 통보를 들은 때도 있었다. 편집자에게 "문장이 이상하다"란 얘길 들은 날, 또 온라인 서점에 번역 악평이 달린 날도 숱하다. 제때에 번역료가 지급 안 돼 맘고생한 순간도 부지기수. "많이 울었죠. '나는 해도 안 되는구나, 내 인생은 망작(亡作)이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보낸 시간이 약 10년. 자존감이 바닥났어도 또 책상 앞에 꾸역꾸역 앉았다. "단 몇 문장이라도 번역하려고." 열등감과 싸우며 버텨낸 시간 덕분일까. 그가 옮긴 '나쁜 페미니스트'는 2016년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키며 출판계 안팎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노씨에겐 번역의뢰가 끊임없이 들어와 "이틀에 한 번꼴로 거절을 해야 할 정도"였다.
노씨는 번역을 하면서 "인내심, 집요함, 겸손함을 갖게 됐다. 번역이 인격수양에 좋은 것 같다"며 웃었다. (사진제공=노지양씨) © News1 |
실패가 인생에 주는 선물
두 언어와 '사투'를 벌였지만, 실은 열등감·무기력함과 끊임없이 맞서야 했던 15년의 시간. 노지양씨는 그 시간 덕분에 이제는 "웬만한 일엔 끄떡없는 전사가 된 것 같다"며 "'이 어려운 일도 다 지나가, 내가 버틴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오랫동안 학벌이 저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학교 나왔으니 상위 10% 안에 드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번역을 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예전엔 오직 '나'밖에 없었는데, 실패를 겪으면서 '아픈 사람'들이 보이고, 특권의식도 버리게 됐죠. 겸손해졌고요. 실패하지 않고 인생 앞에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김민우 PD js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