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온다면서 왜 여기와 있어"…'최대 7000명 암매장' 골령골 가보니
최소 1800명에서 7000명 매장…한국전쟁 당시 최대 학살지
유해발굴에도 신원 특정 어려워…사업 지속할 기관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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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뉴스1) 박동해 기자 = "휴가를 마치고 가시면서 나한티 손을 흔든 거시 엊그제 같흔디 벌써 70년이 되야쓰"
1948년 10월 여덞살 딸은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하는 아버지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금방 돌아온다"고 이야기했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72년이 흐른 지금 딸은 여든살 할매가 됐다. "온다믄서 왜 안 오고 여와 있어. 딸이 왔는데 왜 대답을 모대. "70여년이 흐른 지금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박귀덕씨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덕씨의 아버지 고(故) 박정환씨는 당시 여수 14연대 소속 헌병이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날 광주의 집에 외출 중이었던 정환씨는 복귀 중 광주 시내에서 경찰에게 연행됐다.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다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초기 한국 군·경은 후퇴를 하면서 대전형무소에 복역 중인 재소자 상당수를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했다.
집단으로 학살된 사람들 속에 정환씨도 있었다. 귀덕씨는 아버지의 재판 기록을 확인하려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문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가족들은 정환씨가 여순사건과 관련된 14연대 소속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끌려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 30일 방문한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에서는 25일째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작업은 오전 8시30분부터 시작됐다. 앞서 4일간의 발굴 휴식 기간 동안 노출된 유골들이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덮어두었던 천막을 걷어내자 지난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유골들이 드러났다. 얽히고설킨 채 흙 속에 파묻힌 뼈들의 모습은 마치 나무뿌리 같았다. 겹겹이 쌓인 뼈들은 이곳이 집단적인 학살 현장이었음을 방증했다.
발굴작업을 맡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원들은 묵묵히 70년간 쌓여온 세월을 훑어 내려갔다. 발굴은 흙과의 전쟁이었다. 호미로 파낸 흙은 쓰레받기로 퍼 올려 고무 양동이에 담아내는데 파 올린 흙이 다시 산처럼 쌓였다. 발굴단의 호미와 솔이 지나간 자리에는 곧 부서진 뼈조각부터 시작해 허벅지 뼈, 두개골 등이 모습을 나타냈다. 학살 당시 사용된 M1, 카빈 소총의 탄피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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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의 각종 문헌에 따르면 대전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최소 1800여명에서 최대 70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골령골은 한국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지다.
학살 대상자들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와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었다. 이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됐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하자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신청해 조사가 이뤄졌고 골령골에서 한국전쟁 직후 정부와 국군이 남하하던 1950년 6월말부터 7월초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3차례에 학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한국전쟁 중 대전형무소에서는 열악한 환경과 식량·의약품 부족, 고문 등으로 사망하는 재소자가 속출했다. 특히 1.4 후퇴 시기 제11사단이 대전에서 후퇴하면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66명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사형수들 중에는 억울한 누명으로 사형판결을 받아 향후 재심으로 무죄를 인정받은 이들도 있었다.
진화위는 진상규명을 위해 2007년 6월25일부터 9월22일까지 약 70일에 걸쳐 골령골에 대한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토지소유주와 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굴이 추진되지 못했고 일부 유해매장 추정 장소에서 34구의 유해만 발굴할 수 있었다 .
2009년 진화위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과 안장을 위한 건의'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했지만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유해발굴은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2014년부터 민간차원의 발굴작업을 진행했다.
2015년 2월 대전 골령골에 대한 민간 차원의 시범 발굴 작업이 개시돼 20여구의 유해가 출토됐다. 하지만 당시 발굴은 3.5m*5m의 한정된 장소에서 10여일 정도 진행된 시범발굴로 확장 발굴이 이뤄지지 못했다. 발굴단은 아쉬운 마음만 담기고 흙을 다시 덮어야 했다.
다행히 정부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 조성 부지로 대전 산내 골령골을 선정하면서 이곳의 유해발굴이 올해부터 재개됐다. 행정안전부는 올해 2월부터 약 400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토지매입에 나섰으며 9월25일부터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공동주최로 발굴 작업이 재개됐다. 현재까지 약 한달여 동안의 발굴 기간 동안 80여구의 유골이 확인됐다.
다만, 발굴을 마친다고 해도 신원을 특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는 형무소 재소자들이라 신원을 특정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마저도 유해가 뒤엉킨 채 발굴돼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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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유족들의 DNA를 등록해 유전자 대조 방식을 쓴다면 작은 유해라도 가족을 찾을 수 있지만 비용과 시간의 한계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 억울한 죽음이었더라도 '좌익활동을 했다'는 꼬리표에 일부 유족들이 유해를 찾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도 신원을 특정하는 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대전 골령골에서도 유족이 유해를 특정해 수습한 건은 1건도 없었다.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안경호 49통일재단사무국장은 "이번 발굴의 가장 첫번째 목적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며 "시민들이 스스로 발굴작업에 참여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인식하는 인권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발굴 현장을 찾았던 전숙자 대전산내사건 희생자유족회장은 "이렇게 (발굴 현장을) 열어보니까 몇년 전에 구제역 사건 때 구덩이를 파고 (돼지들을) 들이붓는 것 같이 사람들을 넣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너무 비참해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다"라면서도 이제라도 발굴이 재개되는 것에 대해 "하늘이 열린 것 같이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공동조사단은 오는 위령시설의 공사가 시작되는 2021년까지 발굴을 계속할 예정이다. 지난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12월쯤 2기 진화위가 출범할 예정이다. 진화위 활동 재개로 민간인 학살지 유해발굴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지만 법안에 유해발굴을 명시하지 않아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동조사단 단장을 맡은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는 "2기 법에 유해발굴이라는 것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 법이 미비하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향후 유해 발굴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되는 조직의 설치와 인원·예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는 "1기 진화위 때 168개 지역의 유해 매장 추정지가 나왔고 집단 학살지역 분명하다는 곳이 30여 지역인데 그중에 11곳 밖에 발굴을 못 했다"라며 "그 160여개 지역도 조사를 다 해봐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체계화된 조작과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potgu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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