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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김연수입니다

내가 그 전화를 받은 건 두번째 직장을 그만둔 뒤였으니까 아마도 2000년 봄이리라. 전화를 받았더니 문학동네 강태형 사장이었다. 무슨 일인가 들어보니 내 소설집 표지 때문에 고민이니까 와서 직접 보고 의견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1997년쯤에 넘긴 원고였기 때문에 나는 그 소설집을 거의 잊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문학동네를 찾아갔다. 그사이에 회사는 명륜동 뒷길의 2층 양옥에서 동소문동 대로변의 빌딩으로 이사를 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여러 장의 시안을 두고 디자이너와 편집자와 사장의 의견이 다르니 작가에게 물어보자고 해서 나를 불렀다고 했다. 나는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시안을 살펴봤다. 하지만 뭐가 좋은지 딱히 고르기가 힘들었다.

“솔직하게 좋은 걸 말하면 돼.”

강태형 사장이 말했다. 다들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어떤 시안을 미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어떤 게 좋다고 말해야만 할지 정말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참 망설인 끝에 “아무래도……”라고 내가 말했다.

“제목이 ‘스무 살’이니까 이 파란색 표지가 좋지 않을까요? 청바지 느낌도 나고.”

그러자 다들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가 싶더니 강태형 사장이 말했다.

“그럼 그걸로 하자. 작가가 좋아하는 게 제일 좋은 거지.”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작가가 좋아하는 것. 1998년의 축축하고 어둡고 싸늘한 터널을 지나온 내게 그건 무척 신기한 말이었다. 그러니 언제 작가가 됐느냐고 묻는다면, 『스무 살』 무렵이라고 말할 수밖에. 그렇게 젊었을 때부터요? 또 그렇게 묻는다면, 시치미 뚝 떼고, 네, 그렇게 젊었을 때부터요, 라고 말할 수밖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_김연수, 「비로소 작가가 된 건 ‘스무 살’ 무렵」, 『문학동네』 2013년 겨울호

조금 길지만, 이 글의 뒷부분을 쭉 가지고 와봤습니다.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김연수 선생님의 잡지사 근무 시절을 얼핏 엿볼 수 있다거나 충동적으로 이발소로 들어가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거나), 무엇보다도 이 마지막 부분 때문에 좋아합니다. 더 정확히는 이 마지막 부분이 끝나고 그 아래 적힌 선생님 약력 때문에요. 계간지에 실리는 다른 글들이 그렇듯, 마지막에 약력이 실리는 건 당연한 거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 글은 읽을 때마다 매번 약력을 한번 더 꼼꼼히 읽게 되더라고요. 

1993년 『작가세계』에 시가, 1994년 장편소설이 당선되며 등단. 작가세계문학상,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국도 Revisited』,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대책없이 해피엔딩』(공저)이 있다. (약력도 같이 가지고 와봅니다 ... 1년 뒤 여기에 『소설가의 일』도 추가되죠.)

지금의 김연수 선생님을 떠올리면, "1998년의 축축하고 어둡고 싸늘한 터널을" 지나왔다는 말이 되게 거짓말 같죠. 방안에 누워 "내 인생이 어떤 밤보다 어둡다"라고 생각하는 모습도, 술자리에서 "넌 이제 끝났어, 인마"라는 말을 들었다는 얘기도요. 그래서 그 거짓말 같은 얘기들을 읽다가 마지막에 아무렇지 않은 듯 적혀 있는 이 약력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괜히 벅찬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단순히 객관적 사실, 어떠어떠한 상을 받았고 이러이러한 책을 냈다, 을 나열했을 뿐인데, 그 어둡고 싸늘했던 터널을 지나 이렇게 계속 글을 써오기까지의 시간들이 조금은 짐작이 되어서,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엔딩 크레디트까지 챙겨 보는 심정으로 그렇게 약력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하하 웃으며 앞부분을 읽다가도 마지막 약력에 다다르면 눈물이 난다 ... 꼭 전문을 찾아 읽어보시길 ...)

 

그리고 김연수 선생님의 약력을 읽을 때면 항상 이런 궁금증이 들죠. 모든 책의 약력마다 적혀 있는 저 『스무 살』이란 책은 도대체가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냐고. ("스무 살이 지나가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라는 『스무 살』 속 이 문장은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마치 도시괴담처럼 이 문장을 아는 자는 있어도 『스무 살』의 실체를 본 사람은 없다더라 ...) 저 역시 그 중 한 명이라,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을 뒤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검색해봐도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고, 드문드문 중고책을 판다는 글이 올라오긴 했지만 학생이었던 제게 그 가격은 너무 어마어마했죠. 그리고 마침내 그 "어둡고 축축하고 싸늘"했던 절판본 찾기 시절을 지나 드디어 『스무 살』을 다시 펴내게 되었습니다. 

 

『스무 살』이 저 문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는 저 문장에 담긴 뼈아프면서 애틋하기도 한 감성만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한 단편이 실려 있답니다. 특히 「마지막 롤러코스터」에는, '플라잉코스터'라는 상상의 롤러코스터를 만들어내어 극도의 스피드와 텐션을 추구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최근 김연수 선생님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분들에게는 신선한 즐거움이 될 것 같아요. 비가 오는 날, 플라잉코스터를 탄 두 남자의 모습을 묘사할 때의 그 속도감과 박력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리고 초판에는 없는, 개정판만의 스페셜 트랙! 「사랑이여, 영원하라!」 「두려움의 기원 」이 수록되어 있답니다!

가을엔 김연수입니다

짠, 김연수 소설 컬렉션!

그리고 『스무 살』과 함께 『사랑이라니, 선영아』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도 재출간되었답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김연수 선생님 소설 가운데 가장 수다스러운(!)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광수, 진우, 선영, 이렇게 세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론'이 발랄하게 펼쳐집니다. 사랑은 자본주의시대의 공산품일 따름이라 여기는, 자칭 문학계의 서태지 소설가 진우와 영원한 사랑은 있다고 믿는 광수 사이의 불꽃 튀는 대화가 무척 재미있답니다. 으이구 찌질해 절레절레 하다가도 제가 사랑과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가감없이 글로 적는다면 아마 이런 모양새가 되겠다, 싶어지는. 그래서 '작가의 말'에 적혀 있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런 소설이랍니다. 소설을 읽기 전 제목에서 받은 인상과 다 읽은 후 제목에서 느낀 인상이 무척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마지막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입니다. 소설 속 정지은이라는 인물은 고등학교 시절 도서부원이었는데요, 그때 「밤과 낮」이라는 시를 써서 문예지에 실었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의 딸인 카밀라가 이 시를 바다 위에서 낭독합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요조님이 어느 무대엔서가 이 시를 읽으셨네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누군가를 기억하는 다만 한 명의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죽는다 해도 영원히 잊히질 않는 거죠. 엄마의 시를 그 딸이 읽고, 또 그것을 요조가 읽고, 그것을 제가 여기에 쓰고, 또 누군가가 이걸 읽는 것처럼요.

제가 이제 정말 그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 게 뭐냐 하면 그 가을마다 책을 내는 거예요. 여력이 있으면 봄에 한 권 더 내고. 근데 어쨌든 가을마다는 책을 계속 내겠다. 이 말씀은 여러 번 드렸어요. 그래서 가을이 되면 자동적으로 책이 나오는 것처럼. 근데 시간이 점점 지나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 꿈이었는지 그거를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다는 건 알지만, 어쨌든 어떤 한 시기를 평생은 아니겠지만, 가능한 시기까지 계속 가을마다 책이 나와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가을들이 제 책으로 이렇게 그 책이 나왔던 해 뭐 이런 걸로 기억이 될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 큰 포부예요. 이게. 큰 꿈이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_김연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중

가을이 왔고, 이렇게 김연수 선생님 책 세 권이 나왔습니다. 선생님의 다음 꿈도 저희가 응원합니다.


편집자 김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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