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궁 선수가 받게 될 로또 청약 내용
[MONEYGROUND 디지털뉴스팀] 올림픽 역사상 첫 양궁 혼성전과 남자 단체전에 참가한 김제덕 선수는 당당하게 금메달 2관왕에 올랐다. 그는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나라 남자 선수들 가운데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로, 그가 앞으로 얻을 혜택들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메달을 딴 선수는 아파트 특별공급 청약 자격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세종자이더시티 대상자 모집
경쟁률 92:1 기록해
대한양궁협회 홈페이지에는 ‘우수선수 주택 특별공급’ 대상자를 모집하는 공고문이 올라왔다. 공고에 따르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국제대학스포츠연맹, 국제경기연맹 등이 주최한 대회)에 입상한 사람은 기관추천을 통해 자신의 거주지가 속한 곳의 청약 특별 자격을 받을 수 있다. 기관추천은 선수가 속한 협회나 연맹을 통해 신청하는 것이고, 해당 기관이 청약 시행사에 명단을 넘기는 방식이다. 단체전은 15개 나라 이상, 개인전은 10개 나라 이상 참가한 경기에서 3위 이상으로 입상해야 특별 자격이 주어진다.
이번 달 초에는 ‘세종자이더시티’ 특별공급 대상자를 모집하는 공문이 대한양궁협회 홈페이지에 올라오기도 했다. 세종자이더시티는 공무원 특별공급이 폐지된 후 첫 공급 단지이자 전국구 로또 청약으로 불린다. 기관추천을 제외하고 22678명이 특별공급에 몰려서 평균적으로 92: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전용면적 84㎡의 분양가가 대략 4억 원대로 책정된 상태인데, 근처 같은 면적의 아파트가 8억 원대에 거래돼서 ‘4억 로또’로 불린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이 아파트에 15명의 선수가 신청했고 점수 순으로 당첨자 1명과 예비 당첨자 5명이 선정될 예정이다.
금메달 포상금 6300만원
연금도 매달 100만원씩 나와
김제덕 선수는 동메달 이상 선수에게 제공해 주는 병역 특례 혜택도 누리게 된다. 우리나라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남성 선수에게 예술체육 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체해 주는 특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등학생이지만 병역 특례가 확정되면서 누리꾼들에게 ‘군필 남고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또한, 메달리스트는 국가로부터 포상금과 연금도 함께 받는다. 우리나라는 금메달리스트에게 6300만원, 은메달리스트에게 3500만원, 동메달리스트에게 25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단체전에 참가하여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은 개인전 포상금의 75%를 받는다. 연금은 월마다 금메달리스트 100만원, 은메달리스트 75만원, 동메달리스트 52만원을 지급한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양궁협회에서도 포상금을 준다. 우리나라는 종목별로 대기업과 스폰쉽을 맺어서 포상금을 별도로 마련해 대대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한국 양궁을 지원하고 있는데,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든 종목을 휩쓸어서 25억 원의 포상금을 지급한 바 있다.
R&D 기술로 지원 제공해
직접 도쿄 방문해 응원하기도
우리나라 양궁이 세계 대회를 석권하는 것에는 현대차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이 빠질 수가 없다. 1985년에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뒤, 37년간 변함없이 양궁 종목을 지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선수들에게 맞는 장비 개발과 인재 발굴에 약 500억 원을 투자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한양궁협회장을 맡는 중인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도 직접 도쿄에 방문하여 올림픽을 직관하는 열정까지 보여줬다.
특히 이번 도쿄올림픽 준비를 위해서 현대차그룹의 미래 자동차 R&D 기술을 접목하여 다양한 지원 시스템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예로 고정밀 슈팅 머신, 선수 맞춤형 그립, 딥러닝 비전 인공지능 코치, 비전 기반 심박 수 탐지, 점수 자동 기록 장치 등 5대 분야다. 이런 시스템들을 위해 AI, 비전 이식, 3D 프린팅 기술 등을 적용했다.
한편 이번 양궁은 공정성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서 MZ 세대에게 큰 환호를 받고 있다. 대한양궁협회는 ‘그해 가장 잘 쏘는 선수를 내보낸다’라는 원칙 아래에 오로지 실력만으로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했다. 누리꾼들은 17세 ‘막내’와 40세 ‘큰형님’ 선수가 한 팀으로 경기를 치른 것을 블라인드 채용의 정석이라고 일컫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