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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by 머니그라운드

달라도 너무 다른 이병철·정주영이 만들어 낸 기적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라이벌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1세대 경영자 이병철과 정주영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정 반대의 배경과 성향을 가졌음에도 치열하게 1위 기업 자리를 두고 한 세대를 풍미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 속에서 한국에 있을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이 두 사람의 경쟁 관계 속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조금 더 알아보자.

1. 옷부터 교육 방침까지 달랐던 두 경쟁자

삼성과 현대의 창업주 이병철과 정주영은 1세대 창업자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서로 성향이나 경영관은 상반된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옷차림부터 드러난다. 마른 몸에 자신의 몸에 맞춘 신사복을 입고 다니던 이병철과 늘 작업복을 입고 현장을 점검하던 정주영은 옷 차림부터 차이가 났다.

또한 이 두 사람은 가정을 대하는데도 깊은 차이를 보였다. 딸과 아들 모두 경영 일선에 내보내며 경영을 배우게 한 이병철과 달리 정주영은 현대 특유의 가풍을 선보였다. 현대는 옷차림부터 철저하게 여성을 사회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유교적 가풍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가풍 차이는 와세다 대학 등 유학을 하며 세상을 배운 이병철과 강원도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초졸이 학력의 전부였던 정주영의 유교관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기업 경영에 있어서는 세기의 라이벌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시작은 어땠을까?

2. 이병철과 정주영의 전혀 다른 인생

이병철은 잘 사는 집안의 자제였다. 그는 도박으로 자산을 탕진하고 아이가 셋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또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에게 사업 자금으로 받은 금액만 해도 현대 금액으로 3억 원에 달했다.

반면 정주영은 가난한 강원도 농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지속적으로 가출을 했고 마침내 가출 후 취업한 쌀집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쌀집을 물려받기에 이르렀다. 이병철은 친구를 모아 정미소를 차렸고, 정주영은 주인에게 물려받은 쌀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중일 전쟁으로 쌀 배급제가 운영되며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된다.

이때 정주영은 쌀집을 그만두고 자동차 수리공으로 취업하지만,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세워 고철을 일본에 팔고 그 돈으로 한국에 각종 식자재 팔며 수익을 올렸다. 이병철은 이때 모은 돈으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창업해 재계 1위를 차지하는 한편 국민 식생활과 의류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동안 이처럼 이병철의 질주가 계속되는가 싶었지만, 정주영이 건설업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면서 둘 사이에는 라이벌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박정희는 집권하면서 대기업을 부정부패의 근원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대기업의 가치를 주장하며 오히려 대기업이 국가 발전에 초석이 됨을 증명했다. 이병철의 노력으로 체포된 기업 회장들이 해방되고 그들은 부정축재한 재산을 국가 재건, 발전에 투자하면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실각하게 된다. 한국비료를 맡은 이병철의 차남이 구속되고 책임을 물어 이병철이 물러나는 동안, 정주영은 건설업에 두각을 드러내며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이병철이 실각한 동안 정주영은 최단기간 경부고속도로 등의 국가 건설 사업을 연달아 성공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영에 대한 태도는 서로 달랐다.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을 하기 전 철저한 조사와 시장성을 따졌지만, 현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박정희가 강남을 개발하며 강남 침수로 애를 먹다 댐 건설을 위해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을 호출했을 때, 이병철은 철저한 준비로 정주영을 따돌리고 댐 시공권을 따냈다.

그런데 경쟁자인 이병철이 강남 댐 건설을 따냈음에도 불과하고, 정주영은 오히려 미소가 만연했다. 정주영은 “삼성이 댐 건설을 맡았으니 강남은 발전할 것이다”라며 강남의 부동산을 사들였다. 당시 댐 건설 대신 현대가 매입한 부지에는 무역 센터와 현대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이병철과 정주영은 특정 사업에서 지더라도 그 사업을 대체해 수익을 얻는 등 우위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을 지속해왔다.

3. 죽을 때까지 자동차 빼고 경쟁한 두 사람

이병철과 정주영은 자동차 빼고 모든 분야에서 겨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병철의 최대 업적이자 최대 도전으로 일컬어지는 반도체 사업 또한 정주영과 경쟁이 예고되었다. 정주영이 1983년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반도체 진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병철 또한 1983년 도쿄선언 후 해외의 비난과 사내 이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를 밀어붙여 64KB D 램을 개발하는 성과를 보였다.

정주영 또한 이병철처럼 반도체에서 기업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반도체 사업 추진 당시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음에도 정주영은 “아들의 장례는 검소하게, 운전기사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르라”라는 말만 남긴 채 반도체 사업 구상에 몰두했다. 그러나 적합한 인재를 찾아 반도체 선도자가 된 삼성과 달리 현대는 인재 부족에 시달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4.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

평생 동안 1, 2위를 다퉈온 이병철과 정주영은 평생의 라이벌로 살았다. 이들의 경쟁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주동력이기도 했다. 그 어떤 나라도 설탕과 옷조차 못 만들던 대한민국이 자동차와 조선업 그리고 반도체를 선도하는 나라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불가능하다 말했던 일들을 추진하고 이뤄낸 두 기업가는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국가 중 하나로 변모시켰다.

현재 삼성은 세계기업 브랜드 가치 5위의 기업으로, 현대자동차 또한 글로벌 판매 5위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원조 받는 나라는 많지만 원조 주는 나라가 되기는 쉽지 않다. 대한민국이 원조 주는 나라가 될 수 있던 까닭은 노동자들의 헌신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기업가들 그리고 1위를 치열하게 다툰 두 경쟁자 덕분은 아니었을까. 암 투병 중에도 정주영 회장의 고희연에 참석할 정도로 두터운 우정을 보인 이병철, 평생 1위를 두고 다툰 두 기업인의 정신을 되새겨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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