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불운한 시인의 잃어버린 삶을 찾아서, '백석우화'
매리킴의 연극 내비게이션
백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시는 역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일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나타샤’라는 이름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 백석은 유난히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 문학과 인연이 깊은 시인이었다. 영생교보 교사 시절, 함흥의 러시아인 상점을 드나들며 러시아어를 배운 그는 이후 수많은 러시아 문학을 조선에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푸슈킨, 숄로호프, 파블렌코, 이사코프스키 등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시, 소설을 번역, 출간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 강의를 맡기도 했다.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푸슈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번역해 널리 알린 것 또한 백석의 공이 컸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의 번역에 매달리느라 6.25때 아무 곳에서 피난가지 않고 원고에 매달렸던 것 역시 유명한 일화다. 결국 그가 번역한 <고요한 돈>의 1,2부는 북에서 출간되었지만, 포화 속에 매달렸던 3부의 원고는 포탄에 맞아 유실되었다.
안타깝게도 시인 백석의 삶 역시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러시아 작가들, 특히 20세기의 러시아 시인들의 운명과 비슷한 궤적을 따라갔다. 스탈린 통치 하의 소비에트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고 통제되었던 시대였다. 당의 정책이 곧 예술의 규범이 되었고, 모든 문학은 중앙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사상을 드러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에 거부하거나 적극적인 협조를 보이지 않는 작가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거나 시베리아 유형에 보내지거나 작가로서 활동이 금지되었다.
6.25 전쟁 이후, 이념적 선택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고향에 살고자 북에 남았던 백석의 삶은 소비에트 러시아 시인들이 겪었던 운명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계급적이고 사상적인 문학을 종용하는 압력을 피하기 위해 동화나 우화, 외국문학 번역에 주로 매달렸던 그는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비난을 받고, 시베리아와 다름없는 ‘산수갑산’ 협동농장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그는 당의 강요로 ‘관평의 양’ ‘눈길은 혁명의 요람에서’ 그리고 ‘붓을 총, 창으로!’ 등의 선전 문학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산수갑산으로 보내져 그곳 협동농장에서 평생 살다 죽었다.
<백석우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석의 시를 통해 백석을 그려내고자 한다. 단순히 시를 낭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창과 서도소리, 정가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그의 시어가 지닌 섬세한 결과 향토적인 정서들을 무대 위에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또한 백석의 시를 제시한 후에는 그의 시를 해석하는 화자들의 감상, 그의 시를 둘러싼 작가들의 치열한 토론 등을 통해 백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장면 속에서 이승헌과 김미숙을 비롯해 연희단거리패의 중견, 신인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암흑’으로 남은 백석의 말년을 그린 부분이다. 그의 시와 남아있는 문서들을 토대로 만든 앞부분과 달리, 아무런 자료도 없는 시기를 그리고 있기에 이윤택 연출의 상상력과 이를 무대 위에 구현해낸 오동식 배우의 열연이 더욱 돋보이는 장면이다. 30년간 매일같이 글을 썼지만, 매일 자신이 쓴 시를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시인의 헛헛한 웃음 속에서 불운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다간 예술가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지난 가을 초연 이후 많은 호평과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1월 17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재공연을 이어간다.
사진제공 | 연희단거리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