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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창시자` 르코르뷔지에, 그는 4평 오두막에 살았다

르코르뷔지에 (건축가, 1887~1965)

마그리트의 파이프와 르코르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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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담배 파이프는 1929년에 탄생했다. 화가 마그리트는 짙은 밤색 파이프를 그렸다. 실제 파이프를 묘사한 그림이다. 문제는 파이프 그림 아래 텍스트였다. 마그리트는 파이프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관객은 혼란에 빠졌다.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려 머리를 굴렸다. '왜 파이프를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걸까?' 마그리트가 노린 건 혼란 그 자체였다. 사물 이름처럼 세상이 굳게 믿는 규칙에 균열을 내며 낯섦이라는 감각을 전하려 했다. 마그리트는 꾸준히 현실 공식이 사라진 그림을 그렸고, 초현실주의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파이프 그림 탄생 배경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마그리트는 한 건축가의 저서를 읽던 중 책 안에 실린 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미나무로 만든 파이프 그림이었다. 마그리트는 책 속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해 파이프를 그렸다. 초현실주의 예술의 대표작은 그렇게 태어났다. 마그리트가 탐독한 책 이름은 '건축을 향하여'다. 저자는 현대 건축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염세적이었다.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그들은 인간이 쌓아 올린 이성과 합리성을 의심했다. 그래서 꿈, 무의식 등 현실 너머 불확실한 세계에 집착했다. 하지만 폐허 위에도 주춧돌을 올리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초현실적인 비극 앞에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해답을 찾는다. 르코르뷔지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건축의 5원칙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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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의 `건축 5원칙`이 모두 적용된 빌라 사보아. /사진=flicker(CC BY-ND 2.0)

프랑스 파리 근교 푸아시에 있는 건축물 빌라 사보아는 르코르뷔지에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쏟아부은 작품이다. 이 건물은 하얀색 기둥 위에 직사각형 상자가 살포시 얹힌 형태다. 새하얀 외관과 군더더기 없는 형태 덕분에 미니멀리즘 예술품처럼 보인다. 빌라 사보아는 현대 건축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인류의 유산이다. 르코르뷔지에 이전까지 유럽 전통 집들은 벽이 모든 건물 무게를 지탱했다. 벽은 두꺼울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집 내부 공간은 협소해졌다. 창문도 크게 낼 수 없어 채광도 열악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5원칙'을 세웠다. ①필로티 ②옥상정원 ③자유로운 평면 ④가로로 긴 창 ⑤자유로운 입면. 빌라 사보아에는 다섯 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적용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해 기둥(필로티)을 만들었다. 기둥 위에 건물을 얹었다. 기둥이 집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벽은 자유를 얻었다. 빌라 사보아 외벽은 간결하고 가볍다. 창문도 크게 냈다. 집에서도 햇볕을 넉넉히 맞게 됐다. 전통 주택의 넓은 마당은 옥상정원으로 대체했다.


빌라 사보아는 2차 세계대전 중 크게 파손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겨우 형태만 유지한 채 창고로 쓰였다. 1960년엔 재건축 바람이 불어 빌라 사보아는 철거 위기에 놓였다. 전 세계 건축가들이 빌라 사보아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청원을 넣었다. 결국 빌라 사보아는 재건됐고,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빌라 사보아 외에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은 16개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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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의 후기작인 롱샹성당. /사진=flicker(CC BY 2.0)

르코르뷔지에는 시계 산업으로 유명한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시계 장식을 배웠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라는 뜨거운 엔진을 달고 미래로 질주했다. 공예보다는 공업, 토목, 건축의 미래가 밝았다. 미술학교 교사는 르코르뷔지에 재능을 알아보고 건축을 권했다. 스승의 설득으로 르코르뷔지에는 전공을 건축으로 바꾸며 1907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오귀스트 페레 건축사무소 인턴 자리를 얻었다. 페레는 철근 콘크리트를 활용한 건축 양식을 개척한 인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스승의 영향으로 콘크리트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년간 인턴 생활을 마치고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긴 여행을 위해 짐을 싼다. 반년 동안 보헤미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터키, 그리스 등을 방문해 생경한 문화와 건축을 관찰했다. 그리스에서 결정적 순간을 맞았다. 투명한 빛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파르테논 신전은 르코르뷔지에의 삶을 바꿨다. 단순하지만 견고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위엄을 휘감은 파르테논 앞에서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이상을 본다. 그는 며칠이나 아테네에 머물며 파르테논을 찾았다. 자신만의 파르테논 신전을 짓겠다고 다짐하며 여행을 마친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가 건축 이론을 세우는 데 골몰했다. 30세가 되던 1917년 프랑스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1920년대 파리는 예술가들의 둥지였다. 르코르뷔지에는 화가들과 어울리며 스위스에 있을 때처럼 미학 이론에 매달렸다. '퓨리즘(Purism·순수주의)' 운동을 창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는데, 핵심은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퓨리즘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퓨리즘은 '기계 미학'으로도 불린다. 당시 유럽은 과학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할 때마다 세상도 변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기계의 효율성, 명확성에 매료됐다. 건축도 기계 시대에 보폭을 맞춰야 한다고 여겼다. 명확함, 간결함,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모더니즘 건축' 청사진을 견고하게 그렸다. 르코르뷔지에는 드디어 1922년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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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아파트로 평가받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사진=flicker(CC BY 2.0)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인 동시에 이론가, 철학자, 사상가, 정책자,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치열하게 건축 철학과 이론을 정리하고, 이상적인 도시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다. 르코르뷔지에가 남긴 저서만 50여 권에 달한다. 그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했다. 집 역시 자동차, 비행기, 철도처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쑥대밭이 됐다. 산업화로 대도시만큼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시골 농부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려고 도시로 왔다. 파리 인구는 팽창했다. 주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도시 곳곳에 빈민촌이 형성됐다. 하층 계급 노동자들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견뎠다.


르코르뷔지에는 하층민을 위한 집과 도시 모델을 고안했다. 그는 수직 도시 청사진을 그렸다. 내용은 이렇다. 파리 구도심에 60층 고층 오피스 빌딩들을 세운다. 빌딩 숲 한가운데 교통센터를 구축해 기차역, 버스터미널을 만든다. 수직으로 솟은 빌딩 덕분에 절약된 용지엔 녹지를 조성한다. 상업지구 인근엔 시청, 법원 등 공공기관을 세운다. 더 바깥엔 실용적인 형태의 공동주택을 조성한다. 상업, 공공, 주거지구가 계획적으로 분리된 이 청사진은 오늘날 현대도시와 닮았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구상은 거절당했다. 도시 개발 결정권자들은 가난한 유대인, 상경한 농민, 하층 노동자를 위해 파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낙담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도시 계획안을 업데이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유럽은 또 폐허가 됐다. 르코르뷔지에에게 도시 재건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그는 적은 용지에 많은 사람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주거지를 고안했다. 그렇게 1952년 마르세유에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세워졌다. 가로 137m, 높이 70m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337가구로 구성된 이곳엔 1600여 명이 살 수 있다. 건물 내부엔 상점, 세탁소 등 편의시설도 있다. 옥상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성인이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마련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로 평가받는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 주변부로 밀려난 서민들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아파트라는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 도시계획처럼 유니테 다비타시옹 역시 거센 공격을 받았다. '빈민층이 모여 사는 곳'이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깎아내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미친 건물'로 취급하며 당국에 철거까지 요구했다. 결국 르코르뷔지에가 꿈꿨던 아파트 유토피아는 서유럽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4평짜리 오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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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가 머물렀던 4평 오두막. /사진=flicker(CC BY-NC-ND 2.0)

르코르뷔지에의 이상을 과감히 받아들인 나라는 한국이다. 1963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마포아파트가 준공했다. 한국 최초 단지형 아파트였다. 마포아파트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그대로 본떴다. 준공식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유력 인사가 참석했다. 아파트는 근대화 상징으로 위상을 떨쳤다. 마포아파트 이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현재,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서울에서 오히려 인간이 기계다. 평범한 사람이 기계처럼 일해도 내 집 마련 꿈을 이루긴 쉽지 않다. 주택청약은 로또가 됐고, 아파트는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됐고, 집값 잡기는 정부 숙원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아파트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기능적으로만 생각해보자. 인구밀도 높은 서울에서 아파트보다 나은 주거 형태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파트는 다른 형태 주거지보다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다. 매달 일정한 관리비만 지불하면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다. 주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고, 채광과 환기 시스템도 뛰어나다. 기능이 전부는 아니다. 웬만한 신축 아파트 단지에는 산책로, 공원, 독서실, 어린이집, 카페 등 정신을 고양하는 편의시설이 가득하다. 르코르뷔지에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하며 꿈꿨던 세계는 현재 서울 대단지 아파트와 얼추 비슷할 테다.


한국 외에도 르코르뷔지에의 청사진을 받아들인 나라는 많다.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대규모 도시 개발로 국가 위상을 높이려 했다. 북서부 도시 찬디가르를 행정 도시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 임무를 르코르뷔지에에게 맡겼다. 1951년부터 10년 넘게 찬디가르 개발을 맡은 르코르뷔지에는 국회의사당, 종합청사, 대법원 등 굵직한 건물을 지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찬디가르 도시 전체를 디자인했다. 그는 인도 프로젝트를 마친 후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가 직접 지은 4평 오두막이 있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여름휴가 때마다 이 오두막에서 지냈다. 그는 오두막을 '나의 궁전'이라고 말했다. 지중해 나라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미래를 설계했던 그는 결국 지중해 품속에서 여정을 마쳤다. 4평짜리 궁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르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루브르궁에서 치러졌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해 싸웠다." 르코르뷔지에는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두 번의 폐허를 목격했다. "집은 기계"라고 선언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기계를 선물하려 했다. 그의 시도는 종종 오해받고 모욕당했다. 하지만 기계처럼 묵묵히 전진하고 할 일을 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꿋꿋이 폐허 위에 주춧돌을 놨다. 오늘날 우리는 그 주춧돌 위에 피어난 세계에 산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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