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든 여자, 뒤집개 든 남자…①벌초 편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던 적이 언제였을까요. 까마득합니다. 추석은 생각만 해도 피곤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태산처럼 쌓인 일들 때문이죠. 이제는 '노동요'를 불러야 할 판입니다.
누가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럽게 벌초는 남자, 제사상 차리기는 여자 몫이 되었습니다.그런데 명절 남녀 역할 분담에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다수 있습니다.지난 2015년 구인구직 사이트 사람인이 기혼 남녀 478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80.6%가 '명절에 남녀 간 역할,노동량이 불합리하다'고 답했습니다. 순간 의문이 들었습니다. 역할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눈 걸까요.그래서 바꿔봤습니다. 여성 기자 3명이 낫을 들었습니다.
일단 벌초가 안 된 봉분을 구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요즘은 가족 규모가 줄고, 벌초 작업 중 사고가 잦아지며 대행업체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 벌초 대행업체를 통해 경기도 남양주시 봉분 3기를 소개받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벌초. 실력이 좋지 않으니 도구라도 제대로 갖춰야 합니다. 인근 농자재 가게를 찾았습니다. '여자들이 웬 벌초에요?' 가게 주인이 놀라 되물었습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도구는 예초기입니다. 그러나 예초기 가격은 20~30만원대. '예산초과'입니다. 게다가 미숙련자가 예초기를 다루면 사고의 위험도 큽니다. 대안으로 낫을 추천받았습니다.조경용 가위와풀을 긁어모을 갈퀴도 구입했습니다.
벌초를 위해서는 안전 장비도 필수입니다. 얼굴과 발을 각각 보호할 방충모와 두꺼운 장화를 샀습니다.일명 '아디다스 모기'로 불리는 산모기를 쫓을 모기기피제도 준비했습니다. 뱀 퇴치 효과가 있다는 나프탈렌도 4봉지나 구입했습니다.
난생 처음 낫을 잡아본 기자들. 회사옥상 화단에서 예행연습을 했는데요.'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하겠냐'는 선배의 핀잔이 귀에 박혔습니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지난달 30일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한 야산을 찾았습니다. 긴 팔에 긴 바지로 완전무장한 뒤, 벌초 대행업체 대표를 만나 산에 올랐습니다. 대행업체 대표는 여성이었습니다.
허리까지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헤치고 10여 분을 올랐을까요. 산 중턱에 다다르니 이날 작업할 무덤이 보였습니다. 벌초가 시급해 보였습니다. 기자들이 낫과 조경용 가위를 꺼내자 대행업체 대표는'20년 전에도 낫으로는 벌초를 하지 않았다'며깜짝 놀랐습니다. 그는못 미더운 얼굴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자리를 떴습니다.
오전 11시30분, 낫과 조경용 가위를 들고 풀 무더기 앞에 섰습니다. '예초기를 안 쓰고 벌초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습니다. 허리를 펼 새 없이 잡초를 제거했습니다.
벌초를 준비하며 가장 우려했던 것은 벌과 뱀이었습니다. 지난 2일 전남 여수시 한 야산에서 벌초 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벌에 쏘여 사망했습니다.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린 국민은 7만7063명에 달합니다. 사망자도 각각 9명, 133명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날 벌과 뱀으로 인한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낫질이 서툴러 잡초 대신 발등을 찍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단단한 장화 덕에 피를 보지 않았지만,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상외의 강적은 더위였습니다. 작업 시작 30분이 지나자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너무 더워서 모자를 벗고 싶었지만 '윙윙' 날아다니는 벌 한 마리 때문에 여의치 않았습니다. 등허리도 축축해졌습니다. 하지만 긴 팔 겉옷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겉옷을 걷어 올린 기자의 팔은 모기들의 급식소가 됐기 때문입니다. 장화는 달궈진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아, 이래서 요즘 납골당을 선호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1시간 정도 하다 보니 '제발 쉬다 하죠'라는 애원이 절로 나왔습니다. 빨갛게 익은 얼굴로 돗자리에 쓰러져 10분 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누구든 예초기를 들고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줬으면…'이라는 헛된 기대를 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합니다. 다시 낫과 조경용 가위, 갈퀴를 들었습니다. 옆의 정돈된 묘를 곁눈질로 살피며 봉분을 다듬었습니다. 누운 풀을 반대로 세워 다시 베는 '스킬'도 터득했습니다. 평소 싫어하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낫을 사정없이 휘둘렀습니다. 1시간30분 동안 무덤 3기의 벌초를 마쳤습니다. 어깨와 팔이 뻐근해졌습니다.
처음에는 해보지 않은 일이라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니 '벌초도 할 만 하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대행업체 대표에게 보여줬습니다. 대표는 '낫으로 벌초한 것 치고는 굉장히 잘했다'며 '100점 만점에 85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거친 느낌이 있다'며 '일정한 높이로 풀을 벴다면 더 깔끔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기자들이 미처 끝내지 못한 작업은 대행업체 쪽에서 예초기를 돌려 마무리 했습니다.
'충분히 여자도 벌초를 할 수 있다'는 게 이날 체험한 기자들의 공통적 생각이었습니다. '데미지'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여벌 옷을 준비하지 않아 편집국까지 악취를 풍긴 기자 1명, 산모기의 습격으로 가려움을 호소한 기자 1명, 발등을 찍은 기자 1명. 이 정도면 무난합니다. '무슨 계집애들이 벌초야' 말씀하셨던 아버지. 이번에는 제사음식 한 번 해보실래요?
정진용, 이소연, 신민경 기자 jjy4791@kukinews.com / 사진=박효상 기자 tina@kukinews.com
촬영 협조 : 경기 북부 기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