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졸지에 범죄자 팬이 돼버린 이들의 웃픈 자화상, 영화 ‘성덕’ 오세연 감독

경향신문

첫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 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한 오세연 감독. 김지혜 기자

오세연 감독(22)은 ‘성덕’이었다. 팬 사인회에 한복을 입고 나타나 스타의 눈에 띄더니, 급기야 그와 함께 TV에 출연해 직접 러브레터를 낭독하는 영광까지 누린 명실상부 ‘성공한 덕후’였다. “공부 열심히 하고 효도하라”는 스타의 말에, 전교 1등까지 냅다 꿰찬 ‘성실한 덕후’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사랑한 스타가 정준영이라는 데 있다. 2019년 3월 폭로된 이른바 ‘정준영 단톡방’ 사건과 함께 오 감독은 졸지에 성범죄자의 팬이 됐다. 돌아보니 온통 폐허였다. 성범죄에 연루된 남성 연예인들의 목록은 나날이 길어졌고, 친구들은 하나 둘 “야 나도…” 범죄자 누구의 팬이었다 고백해왔다.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은 이 황당한 폐허 위에서 그려낸 ‘웃픈’ 자화상이다.

경향신문

<성덕> 은 스타가 아닌 그를 ‘덕질’하는 팬들의 뒷모습에 주목하는 영화다. <성덕> 의 한 장면. 오세연 감독 제공

“첫 영화, 첫 상영에서 이렇게 뜨거운 반응이 나올 줄 몰랐어요. 정말 귀하고 감동적인 경험입니다.” 지난 11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오 감독은 들떠 있었다. 그의 첫 영화 <성덕>은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영화제 기간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다. 상영 전부터 이번 영화제 최대 화제작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높은 관심이 쏠렸던 영화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상영 내내 극장이 떠나갈 듯한 박장대소와 공감 어린 탄식이 수없이 터져나왔다. 오 감독은 “기존에 ‘덕질(팬 활동)’을 하고 계시던 분들이 궁금증을 갖고 많이 찾아주신 것 같다”며 “팬들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매체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느끼는 충격과 재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오세연 감독이 직접 그린 정준영의 이미지. <성덕> 의 한 장면. 오세연 감독 제공

<성덕>에는 오 감독을 포함해 ‘같은 분노’로 치를 떠는 10명의 ‘덕후’들이 등장한다. 모두 오 감독의 친구, 가족들이다. 좋아했던 연예인의 혐의나 상황은 각기 달라도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를 돌아보는 이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덕질과 함께 성장한 시간을 통째로 부정당한 듯한 참담함, 혹시 연예인의 범죄에 자신들이 일조한 것은 아닌가 싶은 죄책감, 갑자기 ‘흑역사’가 돼버린 과거를 복기하며 느끼는 황당함까지…. 이 복잡한 마음이 표현되는 방식은 코미디다. 심지어 팬들의 상황이 ‘박사모’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태극기 집회까지 찾아가는, 꽤 발칙한 코미디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였어요. 저도 제 과거 모습을 볼 때마다 어이없고 기가 차면서도 늘 웃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 사람’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컸죠.”

경향신문

<성덕> 의 한 장면. 오세연 감독 제공

열렬히 좋아했던 것도, 처참히 배신당한 것도 결국 ‘내 삶’이기에 터지는 자조적 웃음들이 화면을 채운다. 영화는 그렇게 ‘빠순이’라 폄하되는 팬 개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팬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팬덤 현상’이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쓰면서도, 결국 집중하는 건 늘 스타잖아요. 팬들 이야기는 정말로 잘 안들어주거든요.” 오 감독은 추위에 떨며 팬 사인회 입장을 기다리다 주최측으로부터 폭언을 들었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팬들은 K팝의 가장 큰 소비자이지만, 1020세대 젊은 여성들로 주로 구성됐다는 이유로 늘 무시를 받는 것 같아요. <성덕>을 통해 팬들 개개인이 얼마나 복합적인 감정과 고민들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성덕>에서 박수가 터져나온 순간 중 하나는, 바로 오 감독이 2016년 정준영의 불법촬영 혐의를 최초로 보도했던 기자를 찾아가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기사를 믿지 않았어요. 화내고 욕하기 바빴죠. 이 장면을 통해 팬덤의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일면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오 감독의 사과가 드러내듯 이후 팬 문화는 빠르게 변화했다. “2019년에 다시 같은 혐의가 보도가 됐을 때, 저와 또래 친구들의 생각은 많이 바뀌어 있었어요.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팬덤의 다수를 이루는 젊은 여성들은 이제 기후·환경부터 페미니즘까지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팬 문화와 함께 연예계도 바뀌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향신문

오세연 감독이 정준영에게 직접 쓴 편지의 일부. <성덕> 의 한 장면. 오세연 감독 제공

오 감독과 친구들은 이 풍파를 겪고도 덕질을 멈출 생각이 없다. 그는 “덕질은 결과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라 말했다. 정준영의 음악을 들으며 가족도 없이 홀로 보내던 밤의 무서움을 견뎠다. 정준영에게 꾸준히 편지를 쓰며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정준영의 범죄와 별개로 그를 덕질하며 보낸 시간들은 오 감독의 현재를 만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이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됐다”는 영화 속 내레이션은 그래서 뭉클하다. 범죄와 단호히 선을 그으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긍정하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성덕>에 담겼다. “정준영 이후 덕질하고 있는 것은 영화”라는 오 감독은 영화 제작으로 잠시 휴학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로 돌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 펼쳐갈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계기로 <성덕>이 화제가 되면서 개봉 여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오 감독은 “개봉을 하게 된다면 생각해 볼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정준영뿐만 아니라 승리, 조민기 등 다양한 연예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언급된다. “약간 도를 넘는 솔직함이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인데, ‘삐’ 처리가 없는 지금의 버전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영화제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다양한 영화제를 계속 다니면서 지금 버전의 <성덕>을 많은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개봉은 물론 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중히 생각하려고 합니다.” <성덕>은 다음달 9일부터 열리는 광주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된다.


끝으로 정준영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인터뷰 내내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가던 오 감독의 말문이 막혔다. 오랜 고민 끝에 “욕해도 돼요?” 묻더니, 남긴 말은 이랬다. “나쁜 놈아,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라. 눈에 띄지 마라.”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오늘의 실시간
BEST
khan
채널명
경향신문
소개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다, 말하다